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송 Sep 03. 2020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육식의 뒷배경

고기도 가죽도 아닌, 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

 어릴 때 시골 할아버지 댁에는 소 두 마리가 있었다. 한 마리는 송아지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귀에 노란색 번호표를 달고 할머니가 쒀준 여물을 우적우적 느리게 씹어대던 그 소는 몇 년이 지나 명절에 찾아갔을 때 사라지고 없었다. 외양간도 텅 비어 있었다. 때는 90년대 말로, 아마 할아버지께서 본격적으로 경운기를 이용하면서 농사짓는 가축으로써의 소의 가치가 상실된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아무튼 나에겐 별 일은 아니었다. 내가 사이코패스여서가 아니라 자주 보는 소도 아니었거니와 그 소들이 죽어서 고기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 고기를 먹는데 그 고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리 동네에 있는 다섯 개의 정육점의 선반을 채우기 위해 매일 수많은 소와 돼지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죽기 전에 또 아름답고 평화롭게 살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대다수의 가축들은 아주 좁은 우리에서 평생을 살다가 도축을 당하러 가는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형틀을 벗어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인지하고서는 육식을 유지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고 할지언정, 그리고 인간도 동물의 한 종류일 뿐이다)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가축은 우리가 사육하지 않는다면, 먹지 않는다면, 돌보지 않는다면(좁은 우리에 가둬놓는 것도 돌보는 걸로 포함한다) 죽고 멸종할 수밖에 없다며 죄책감을 달래는 것이 축산업계라고 이 책 <1389번 귀 인식표를 단 암소>는 말한다.

 저자 캐스린 길레스피(이제 보니 유명한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와 성이 같다)는 축산업의 잔혹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조사를 다니는 과정에서 경매장을 방문한다. 그리고 그 경매장에서 동물이 그저 물건 혹은 재산으로서 거래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어미 소와 송아지가 팔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생명을 상품화한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미 소와 송아지 간의 유대와 그 둘을 갈라놓는 폭력이 과연 어떤 것인지 경매장을 가로질러 서로를 부르는 소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 본문 중에서

 

 저자의 말을 심정적으로 거북하게 느낄 순 있어도 이성적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가축을 철저하게 상품으로 대하고 있으며 소와 돼지와 닭이 고통받고 죽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경매장에 가거나 도살장에 가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아마 직접 가서 본다면 저자와 분명 같은 심정을 공유하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 자리에 앉아 소 하나하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소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들을 그렇게 체계적으로 교배시키고, 사육하고, 바닥까지 착취하고, 팔고, 죽이고, 소비하는 종의 한 구성원이라는 사실이 구역질 나고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싫었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오직 우리들 인간의 편의를 위해 다른 종을 착취해왔다. 눈앞에서 그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마음 편하게 고기를 먹어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 정말 진지하게 고민이 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것인가? 괜찮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육식의 뒷배경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진출처 @Farmsanctuary

  책에서 나온 동물 구호 업체 중 <팜생크츄어리>라는 곳이 있다. 이 단체의 인스타그램을 찾아 팔로우하게 됐는데 최근에 닭의 사진이 몇 장 올라왔다. 그 아래 달린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흔히 우리가 동물복지에 신경 쓴다고 알려져 있는 '케이지 프리(cage-free, 닭장에 가둬놓지 않고 사육하는 방식)' 농장에서 자란 닭임에도 불구하고 닭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팜생크츄어리에서 돌본 지 한 달이 넘었다고 하는데도 사진과 같은 모습이었다. 채식주의에 관심을 갖기 전에도 계란을 고를 때 그래도 기왕이면 닭에게 신경 쓰는 곳이 좋다 생각해(정확히 말하면 닭에게 좋다는 점보다는 항생제, 동물사료를 쓰지 않고 닭장 밖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계란이 내 몸에 좋을 거라고 생각해서) 케이지 프리 계란을 사 왔는데 그곳조차도 닭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저자는 책에서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다.

 인간의 이익을 중심에 두지 않고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돌봄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고, 돌봄을 재평가하는, 세심하면서도 윤리적으로 더 나은 방식은 없을까?

 

 우리 모두 동물에 대한 폭력을 당연시하는 기존 규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때다.

매거진의 이전글 육식이 좋긴 한데, 미래는 어떡해야 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