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 하면 주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다 고만고만하게 주머니가 가벼웠기에, 안주는 부실하게, 술은 거하게 마시곤 했다. 어묵탕 하나만 시켜놓고 소주를 몇 병씩이나 마시기도 하고, 고추장찌개를 하나 시켜놓고 육수 대신 물을 부어 계속 끓여 먹기도 했다.
대학생활에 술을 제외하면 거의 0에 수렴하겠지만, 강렬한 음주의 기억 외에도 기억나는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심리 상담’이다. 각 대학에 있는 대학생활상담센터는 대학생이라면 누구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나는 상담학과 학생이었기에, 대학생활상담센터의 존재를 남들보다 좀 더 빠르게 인지하고 요긴하게 활용하였다.
처음 상담실을 방문한 건 스무 살이었다. 정확히는 스물한 살을 앞둔 20.9999세쯤이었다. 상담실에 간 이유는 성격 검사를 받고, 느낀 점을 제출하라는 전공 과제 때문이었다. 검사지를 받아 문항에 성실하게 답한 뒤, 결과 해석을 듣기 위해 선생님과 마주 보고 앉았다.
"세로 씨, 만약에 상담을 받는다면 어떤 문제를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나요?"
"어... 딱히 없어요....”
“거창한 고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음… 그렇다면… 남에게 제 이야기를 털어놓는 게 힘든 것 같아요."
"세로 씨가 괜찮다면, 한번 상담을 받아보는 건 어때요?"
심리검사지를 들여다본 상담 선생님이 먼저 상담을 제안해 주셨다. 심리적 불편감이 꽤 높게 나와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상담을 한다는 건 선생님께도 '일'이었을 거고, 이미 밀려드는 상담 요청으로 바빴을 텐데 선뜻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으니 말이다.
선생님의 제안을 받았을 때의 심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게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라는 미약한 예감이 들었을지도 모르고, 그저 상담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 마음이 어떤 모양새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담을 수락했다. 우리는 5회기로 구성된, 짧은 상담을 진행하기로 약속했다.
상담실에 방문하면, 선생님은 맨 먼저 ‘일주일 간 있었던 일 중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시시콜콜하다고 여겼던 일상 중 기억나는 한 토막을 꺼내놓자, 선생님은 “세로 씨는 그때 어땠어요?”라고 물었다. 질문을 받고 과거로 돌아가, 무심히 지나쳤던 감정과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었다.
선생님은 ‘나’의 생각과 감정에 주목했다. 선생님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 보면, ‘아, 내가 여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해야 한다.’는 압박과, 죄책감을 잘 느끼는 사람이었다. 남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이유도 솔직한 이야기를 터놓으면 상대가 나를 떠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부정적인 감정이나 모습 같은 건 일기장에만 털어놓았다.
그런 생각의 근간에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스스로를 조이고, 안 좋은 환경에 처했을 때조차 환경이 아닌 '노력하지 않는 나 자신'을 탓했다. 내가 원망하고 화살을 돌리는 상대는 항상 자신이었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돕기 위해, 상담 중 나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면 즉각적으로 칭찬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잘한 것에 초점을 두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참 많은 노력을 해왔네요. 세로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사람마다 살아온 방식과 삶의 내용이 모두 달라요. 그러니 서로를 비교할 수 없지요.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에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세로 씨는 이미 잘하고 있어요.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날 둘러싼 환경이 나빴다는 것을 충분히 미워해도 괜찮아요.”
우습게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나 열심히 노력했던 거구나, 내가 아닌 다른 것을 미워해도 괜찮구나.’ 그동안 내가 미워하던 것들은 거대하고 악랄한 숙적이 아니었다. 그 역시 나처럼 연약한 인간이었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명백한 악이었다면 마음 놓고 미워라도 했을 텐데, 그를 미워하는 나 자신을 용납할 수 없어서 또 한 번 내가 미워졌다.
그동안 힘들었겠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더 오래 방황했으리라. 더 이상 노력할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를 긍정받는 경험은 정말이지 특별했다. '경청. 공감. 무조건적인 존중.' 전공서적으로 배웠던 모호한 개념들이 상담실 안에서 또렷하게 재현됐다. 앞으로 살면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일 거다.
차츰 내 이야기를 하는데 익숙해졌다. 상담실에서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데 그치지 않고, 공개적인 SNS에 글을 쓰기도 하고, 친한 친구들에게 터놓기도 했다. 그간 내가 아닌 타인에게 중심을 두고 생각했다는 걸 깨닫고 난 후에는, 내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내 삶을 인정하고, 나의 환경, 장점과 단점, 성격, 외모 등 모든 부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까짓 거, 변할 수도 없는 거 있는 그대로 좋아해 주자! 그랬더니 한결 편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 전공 교수님이 그러셨다. “날 욕하는 놈이 있다면 그건 무조건 그놈이 나쁜 겁니다.” 예전이었다면, 나를 욕하는 사람이 생기면 '내가 뭘 잘 못했지?', '저 사람이 나를 왜 미워하지?' 하면서 힘들어했을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반성해야 하는 게 옳지만 스스로 몰아세우는 나쁜 버릇은 고쳐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항상 내 편에 서서 날 응원하는 건 ‘나’ 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