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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Apr 23. 2020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인생 첫 해외여행은 5박 6일 보라카이였다. 일행은 퇴직금을, 나는 아르바이트비를 모아 자유여행을 계획했다. 첫 해외여행이다 보니 많은 게 낯설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공항에서 거쳐야 하는 과정들, 처음 듣는 언어, 여행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 낯선 호텔 침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여행 준비가 미숙했던 탓인지 사건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바닷물에 침수되어 핸드폰이 고장 났고, 실팔찌를 사달라고 다가온 아이들이 구매를 거절하자 한국어 욕을 크게 외치고 도망갔고, 결제가 완료된 줄 알았던 호텔비가 미납되어 현장에서 큰돈을 현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여행 준비를 열심히 했지만, 급작스럽게 닥쳐오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할 방법까지 준비해온 건 아니었다. 


급기야 마지막 날 바로 전날에는 준비해 간 달러와 페소를 전부 소진하였는데, 시내에 있는 ATM 기계가 고장이 나서 돈을 뽑을 수가 없었다. 칼리보 공항은 입출국 시 공항세를 내야 하기 때문에 꼭 돈을 인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역내에 있는 ATM 기계도 10일 중 9일은 고장 나 있는 상태라는 글을 보았다. 그 글을 읽은 후 초조함으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갔는데 ATM이 고장 나있으면 어떡하지...? 공항세를 못 내면 비행기도 못 타는 건가? 비행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지?' 고민이 꼬리를 문채 빙빙 맴돌았다.


한참의 검색 끝에,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이 한인 쉼터에 가서 한국돈을 페소로 돈을 바꿨다는 글을 보았다. 그 글을 보았으면 안심하고 자도 괜찮았을 텐데 이번에는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샌딩을 해주기로 한 업체에서 약속을 펑크 내면 어쩌지? 로비에서 만나면 되는 건가? 로비에서 못 만나고 엇갈리면 어쩌지?' 결국 고민을 하다가 날밤을 새고야 말았다. 물론 샌딩 기사님은 약속된 시간에 리조트 로비에 잘 나타났고, 우리는 무사히 칼리보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ATM 기계는 예상대로 고장 나 있긴 했지만, 블로그에서 본 대로 한인 쉼터에서 페소를 바꿔 공항세를 낼 수 있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저런 것까지 걱정을 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오작동하는 ATM 기계를 대체하여 돈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건 ‘문제 해결’이지만 나머지 생각은 전부 ‘걱정’이다. ‘걱정’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해결을 더디게 한다. 공항세를 내지 못한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고, 샌딩 업체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의 상황까지도 상상하는 건 무의미한 감정 소모였다. 사실 대부분의 걱정이 이러하다. 걱정할 가치가 없는 것이고, 설령 중요한 문제라고 해도 미리 걱정해서 달라질 일이 아니다. 


걱정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온다. 특히, 겪어보지 못했거나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미래가 기다릴 때 발생한다.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걱정이 문제를 해결해줄 거야.’라는 역기능적인 신념을 가진다. 이러한 인지 오류를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걱정의 힘을 믿는, 그리고 걱정이 익숙한 사람은 불안한 미래가 오면 곧장 ‘걱정’이라는 방법을 선택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  →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  → 뭘 해야 할지 모르겠음 / 하고 싶지 않음  → 아무것도 안 함 자기→ 혐오 → 무기력증 → 우울


‘걱정’은 위 단계 중 ‘아무것도 안 함’ 대신 온다. 뭘 해야 할지 모르거나 해야 할 일은 알지만 하고 싶지 않으면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인 ‘걱정’을 택한다. 걱정을 하고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아니라고 자기 위안을 하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걱정을 통해 걱정을 해소하려는 격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바보 같은 짓이다. 걱정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으니,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진배없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라는 티베트 속담을 보면, 먼 옛날의 티베트인들도 걱정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잘 알았던 것 같다. 걱정이 없어지길 바란다면, '아무것도 안 함'의 과정에서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불안한 상황에서 걱정을 멈추고 싶다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을 쭉 적어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내 경우, 직장/가족/인간관계/금전/건강/미래와 같이 카테고리를 나눈 후 그에 해당하는 고민을 나열한다. 생각나는 대로 적은 후에는 통제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으로 나누어본다. 나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아니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면 그 고민은 과감하게 끝내는 게 좋다. 


나만의 작은 팁을 공유하자면, 통제할 수 없는 고민과 마주쳤을 때 '될 대로 되라지!'라고 외친다. 나처럼 걱정이 많은 사람에게는 '다 잘 될 거야!'라는 말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차라리 아무렇게나 살자, 망나니처럼 살자, 망해도 괜찮아 라는 마음가짐이 더 도움이 된다.


'대충 막살아버리자.' 생각하면 세상에 어려울 게 없다. 촘촘하게 짠 그물을 찢고 예기치 못한 불행이 들이닥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그런 불행은 대비할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는 자연재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안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불행이 떠난 자리에도 소중한 것들은 남아있을 것이라는 걸.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조개껍질처럼 연약하지만 어여쁜 것들이 있다는 걸.


한때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망망대해에 떠있는 작은 조각배 같다고. 기상이 나빠져 파도가 거센 날에는 그대로 산산조각 날듯 위태한 항해를 이어갔다. 하지만 뒤집어질 듯 기우뚱거리면서도 난파하지 않았다. 햇살이 좋고 파도가 잔잔한 날에는 근처 작은 섬에 정박하여, 꽃과 나무를 보기도 하였다. 좋은 삶이란 불안이 없는 삶이 아니라, 불안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걸 배웠다. 그렇게 흘러가듯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파도가 치면 돛을 접고 바다가 잠잠해지길 기다리면 된다. 그렇지 않은 날에는 삶의 좋은 부분을 즐기면서 말이다.


내가 상상하는 최악은 잘 오지 않는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때론 자연재해보다 강력하고 창의적이다. 천만분의 일 확률의 최악을 계산해본 사람은 많겠지만, 천만분의 일 확률의 최악을 겪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될 대로 되라지'라고 생각하고 살아도 오히려 마음먹은 것보다 열심히 사는 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 타인의 선택과 내 선택을 비교할 필요는 없다. 내 삶을 살아본 건 나뿐이고, 그에 대해 판단 내릴 수 있는 것도 나뿐이다. 될 대로 막살아도 괜찮고, 잘 살지 않아도 괜찮다. 걱정은 걱정을 없애지 못한다. 걱정을 없애는 건 스스로에 대한 너그러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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