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타인을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이라면, 내가 엄마의 사랑을 가장 뚜렷하게 느꼈던 건 장염에 걸렸을 때였다.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 때였나. 어두컴컴한 저녁, 극심한 통증에 배를 부여잡고 울었다. 뭘 잘못 먹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장염은 그저 설사나 많이 하고, 기운만 없는 병인 줄 알았지 그렇게 아프다는 걸 처음 알았다. 상상 이상의 통증이라 누워서 바닥만 데굴데굴 굴렀다.
난감하게도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었고, 나는 병원까지 걸을 힘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구나 하며 곡소리를 내자 엄마는 나를 들춰 업었다. 그 당시 나는 엄마와 체격이 크게 차이 나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나를 업고 울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세부적인 상황이나 그때의 고통 같은 건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울면서 어찌할 줄 모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엄마가 날 참 사랑하는구나. 나는 누군가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구나.' 하고 안도하던 기억은 오래오래 남았다. 우습게도 그때만큼 엄마의 사랑을 직접적이고 강렬하게 느껴본 적이 없다.
그날 이후로 내가 성적이 어떻든, 외형이 어떻든, 성격이 나쁘든 좋든, 엄마가 어쩔 수 없이 나를 사랑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할 것이고, 못 지내고 있다면 속상해할 것이라는 걸. 못 지내는 나날에 도움을 주지 못해서 본인이 더 속상해할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런 것이 사랑이라는 걸, 내 존재 자체를 귀애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때론 그 사랑이 버겁기도 했지만, 그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더 많이 힘들었을 거란 걸 알았다.
내 존재 자체를 주목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행운은 생각보다 자주 오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함부로 평가하고 뭉뚱그려 생각하고 재단하기 바빴다. 나도 남에게 그랬다. 나는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90년생이 온다'에서 튀어나온 90년대생이었고, 아시안이었으며, 사람이기보다는 그저 여성이었고, 손아랫사람이었고, 서비스직 근무자이거나 막내 사원이었다.
사회가 이해할 수 있는 바운더리 내에서만 이해받고, 이해하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외로웠던 거 같다. 자꾸만 남의 눈으로 나를 보았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려 애쓰지 않는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독거노인 댁을 방문하여 말벗이 되어주고, 반찬을 나누어주는 봉사를 한 적이 있다. 두어 번 봉사활동을 하며 여러 어르신들을 뵈었는데 그중에서도 한 할아버지를 만나 뵌 일이 기억에 남는다. 할아버지는 오래된 여관의 작은 방에서 살고 있었다. 말이 여관이지 고시텔 방처럼 한두 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지저분한 방. 코를 찌르는 냄새. 싱글 사이즈 침대가 들어가니 꽉 차는 좁은 공간. 그의 주거 공간은 첫인상부터 경악스러웠다.
“괜찮다면 앉아요.”하고 권하는 말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자신의 공간에 남을 초대하는 것이 퍽 낯설어 보였다. 우리도 어색하게 가져온 라면과 즉석밥 등을 주섬주섬 내려놓았다. 그는 우리가 가져온 음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다만 혼자뿐이던 공간에 누군가를 초대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사실에 들뜬 듯했다.
그는 하루에 한 끼를 무료급식소에서 먹는데 이가 몽땅 빠져서 국물이 아니면 잘 먹지 못한다고 했다. 몸이 아파서 하루에도 약을 수십 알씩 먹는다며 약통도 직접 꺼내 보여주었다. 흰색 약통과 약봉지가 한 움큼도 넘었다. 그리고 얼마 전엔 유일한 친구가 술을 먹다가 죽었다고 했다. 자신은 술이 없으면 잠을 못 자는데 돈이 없어서 슈퍼에 가서 외상을 해달라고 벌러덩 드러누웠다는 이야기도 했다. 내밀한 이야기가 부지불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그는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들어주는 이가 있다는 게 그에게 퍽 감사하고 신나는 일이었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우리가 떠날 때에는 악수 한 번 하자며 붙잡은 손을 연신 쓸어내렸다. 떠나기 전, 그는 망설이다가 자기가 신발이 없는데 운동화 한 켤레를 사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는 운동화를 사들고 꼭 다시 오겠노라 약속해버렸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어릴 적 동네 구멍가게 손녀였고, 외상 술을 꿔가서 동네 어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술꾼들을 혐오했다. 그러나 실상 그들의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며, 궁금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편으로 우리 할머니를 생각했다. 본가에 가면 늘 정물처럼 그 자리에 있는 할머니. 다리가 불편해서 걷지 못하는 할머니. 내가 그에게 해주지 못한 많은 것들을 떠올리니 이내 또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마음만 무거워진 채, 한껏 달라진 기분을 느끼며 실상은 달라진 게 없는 채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몇 개월 뒤. 다소 들뜨고, 곳곳에는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크리스마스였다. 나는 친구들과 만나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길래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가, 나다. ㅇㅇ 할아버지." 봉사활동에서 만난 할아버지였다. 당시에 적어두고 간 내 번호로 연락을 한 것이다.
“아가, 언제 또 우리 집에 올 수 있니?” 언제 올 수 있냐 묻는 말에 한참을 고민했다. 그가 사는 곳은 너무 멀었다. 그때 봉사를 같이 갔던 사람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는 상태인 데다가 이번에 찾아간다고 해서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지 몰랐다. 덜컥 겁이 났다. 가지 못하는 이유만 계속 떠올렸다. 죄책감과 수치심이 뒤범벅된 마음으로 가지 못한다 고했다.
끔찍한 짓이었다. 한 사람의 삶에 멋대로 침범해놓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놓고, 그대로 발길을 끊어버렸다. 고작 라면 몇 봉지에 반찬 몇 가지가 그의 삶에 진정 도움이 되었을까? 오히려 오지 않는 대학생 봉사단 때문에 더욱 절망하지 않았을까?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걸 처절하게 실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간신히 깨달은 것은 난 여전히 1인분밖에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이고, 나 역시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살 수 없으리란 사실이었다. 할아버지가 좁은 여관방에서 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다, 종이에 적어둔 번호로 전화를 걸고, 전화를 끊고 다시 혼자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몹시 두렵고 슬퍼졌다.
무심한 호의는 서늘한 후회로 돌아와, 지금껏 또렷한 삶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는 언제나 부끄럽고 두려워진다. 먼 미래에는 어떤 불가항력으로 내 존재에 주목해주는 사람과 이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렵다. 쓸쓸한 크리스마스와 텅 빈 방이 두렵다.
내 삶에는 나의 안부를 궁금해해 줄 타인이 필요하다. 너의 고통이 너만의 것이 아님을 이야기해줄 타인이 필요하다. 그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그때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여기에 남긴다. 15년도 크리스마스에 난 어떻게 했어야 할까? 미래의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