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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Jul 14. 2020

욱씬이와 살고 있습니다.


나는 생리전증후군(PMS)이 심한 편이다. 스트레스가 쌓였던 달에는 유독 심해진다. 근거 없이 짜증이 나고, 뭘 해도 안 될 거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대부분은 생리가 시작된다는 전조다.


고시텔 살이를 계획보다 이르게 끝낸 것도 생리전증후군 때문이었다. 생리전증후군이 왔을 때 충동적으로 퇴거를 결정했다. 평소 좁고 어둑한 곳에 있는 게 갑갑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고, 학교를 다니면서 주 5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버거웠다.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여기 더 이상 살면 안 되겠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곧장 관리인에게 퇴거를 희망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 결정에 후회는 없다. 오히려 가끔은 막 저지른 결정이 고심 끝에 내린 결정보다 낫다는 걸 배웠다.


이제는 나쁜 생각이 들 때면 '아, 또 생리전증후군이네. 오늘은 일찍 누워서 소설이나 읽다가 자야지.'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하루 이틀이 지나면 짜증도 가신다. 호르몬에서 기인한 생각임을 아니까, 그날의 나를 평소의 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내게는 생리전증후군 같은 녀석이 또 하나 있다. 생리전증후군과 비슷하게 사고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스스로 조절하기 힘들다는 점도 닮았다. 바로 욱씬이라는 녀석이다.


욱씬이가 뭐냐고? 적어도 반려견, 반려묘의 이름은 아니다. 그건 내가 느끼는 감정에 임의로 붙인 이름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재화해온 감정, 고착화돼서 별다른 문제가 없을 때도 나를 침범해오는, 가슴이 욱신거리면서 나는 결국 망할 것이고, 외로움에 사로잡혀 죽을 것이라는 극도의 공포를 주는 감정. 그걸 욱씬이라고 부른다.


욱씬이와 함께하기 시작한 건 아마 이십 대 초반 즈음일 거 같은데, 확신할 수는 없다. 나는 내 감정을 인지하는데 둔해서 스트레스를 받아도 '난 괜찮아.'하고 있다가 신체화 증상이 오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욱씬이는 나와 더 오래 함께 했을지도 모른다.


욱씬이는 주로 늦은 시간에 찾아온다.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제일 힘들어하는 시간은 자기 직전이라고들 한다. 혼자 남겨진 것 같고, 적막하고, 두렵고, 외로운 시간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영원히 아침이 오지 않을 것만 같다. 욱씬이 역시 주로 그 시간에 찾아온다. 찾아오는 빈도수는 매번 다르다. 매일 올 때도, 몇 달에 한 번 정도 찾아올 때도 있다.






욱씬이라는 이름은 상담을 받을 때 붙여준 것이다. 내 인생의 핵심 감정과도 같았던 죄책감, 그리고 박탈감. 상담 선생님은 그 감정을 보다 잘 조절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보라고 했고, 나는 가슴통증과 비슷한 그 감정을 욱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감정에 이름을 붙여준 이후, 욱씬이는 어찌해야 할 바 모르는 정체모를 공포가 아니라 생리전증후군처럼 잠시 다녀가는, 잘 조절해나가며 함께 살아갈 무언가가 되었다. 생리전증후군이 오지 않도록 음식에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 수치가 높아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처럼, 욱씬이를 다루는 법도 비슷하다는 걸 알았다.



선생님은 욱씬이를 내 인생에서 소거하기보다는 자주 오지 않도록, 오더라도 심리적인 불편감이 크지 않도록 노력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욱씬이를 만들어낸 자동화된 사고('내 잘못이야. 내가 더 노력했어야 했어.')를 수정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했다. 선생님은 자동화된 사고를 바꿀 수 있는 대체적 사고를 아래와 같이 적어줬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그리고 보통 통제하려고 하면 부정적 결과가 더 많이 뒤따르는 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문제 행동은 말리지 않은 내 문제가 아니다.

내 탓이라는 생각은 그 사람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한 말에 굴복해서 스스로에게 내사한 것이다. 내가 매정하고, 문제라는 생각은 초등학교 때 만들어진 욱씬이(내가 임의로 부여한 이름)가 전이되어 계속 나를 자극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가 아니다.’


마음이 힘든 날에는 대체적 사고를 주기도문처럼 절박하게 되뇐다. 그럼 불편했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았던 문제가 내 탓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마음의 상처는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흉터를 지우더라도 상처를 남긴 기억을 지울 순 없다.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한다. 다만, 함께 살면서도 내가 많이 힘들지 않도록, 힘든 감정을 10에서 2~3 정도로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므로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이라는 말을 한다. 그러니 내가 가진 우울도, 삶의 한 부분일지 모른다. 행복이라는 바탕색에 우울이라는 오물이 묻은 게 아니라, 우울이라는 바탕색에 행복이라는 물감을 칠해나가는 게 삶이라고 믿는다. 게다가 우울하게끔 태어난 인간이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가끔씩 행복해할 줄 안다는 건 정말이지 근사한 일이다.


그러니 욱씬이와 함께 사는 삶도 괜찮다. 골칫거리에 말도 안 듣고, 귀엽지도 않지만 결국은 욱씬이도 '나'니까. 대책 없이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나니까. 상처 받은 나를 또 한 번 방치할 수는 없으니, 앞으로도 욱씬이와 잘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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