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증상에도 이름이 있나요?>
'번역가의 경비 지출'에서 언급한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1分で精神症状が学べる本304(1분 만에 정신증상을 배울 수 있는 책 304)>이지만 국내에서는 <내 증상에도 이름이 있나요?>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을 찾아 뵙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1분은 무리죠(소곤).
304가지 정신질환과 정신 증상을 짤막하게 정리하고 사전 형태로 엮은 책이라 두고두고 참고하기 좋을 것 같아 샘플 번역에서 떨어지더라도 한 권 사서 소장하려고 했는데 다행히 붙었네요. 19,500원 굳었습니다. 곧바로 <DSM-5-TR 간편 정신질환진단통계편람>을 주문해 번역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앞서 '번역가의 경비 지출'에서는 편람 덕분에 자료 조사 시간이 30%는 줄었다고 했지만, 번역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이 책에서 커버하는 정신 증상의 폭이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편람은 6장 '의존과 탐닉'부터 책상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18장 '신경인지장애'와 20장 '그 외'를 번역할 무렵에는 어느새 책장에 꽂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1장 '기분장애'와 2장 '불안과 강박'과 14장 '조현병'처럼 이 책과 DSM-5-TR 모두 비중 있게 다루는 카테고리에 관해서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책 띠지를 보면 '교양을 쌓고 싶은 일반 독자'와 '어디에나 통하는 지식이 필요한 (의과 내지는 간호학과) 학생'과 '최신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싶은 의료인'에게 추천한다는 문구가 눈에 띄는데요. 책을 번역하다 보니 여기에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 작가'를 추가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에는 우울증, 조울증, 불안장애처럼 잘 알려진 정신질환 뿐만 아니라 코타르 증후군, 간저 증후군, 탈억제성 사회적 유대감 장애처럼 비교적 덜 알려졌지만 그렇기에 새로운 인물상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는 정신 증상도 실려 있습니다. 코타르 증후군은 (간략히 설명하자면) 자기 자신을 비하하다 못해 죽는 것조차 불가능한 존재라고 믿는 망상입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가 자신의 배를 갈라 장기와 잡동사니를 바꿔치기했다고 확신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영감을 얻는다면 일반적인 독자로서는 사고방식을 상상하기 힘든 캐릭터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살갑게 대하는 캐릭터에게 탈억제성 사회적 유대감 장애라는 설정을 덧붙이면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는 동시에 양면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 사전』(윌북, 2020)을 흥미롭게 읽은 분이라면 이 책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번역 작업을 하다 보면 원서 내 일러스트가 유지되는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국내 작가 분께 새로 의뢰하는 경우도 있고 아예 전부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책은 내용에서 오는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곰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었는데 국내 출간본에도 그대로 실려서 좋았습니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든 가족이나 친구 등 주변 사람에 관해서든, 이 책에 실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어떠한 병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p.9)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평범하지 않다. 애당초 이 세상에 평범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p.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