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칼럼은 90년대~ 00년대 이시형 박사가 젊은이들에게 보냈던 이야기입니다. 약 20년의 시간이 지나고, 그때의 젊은이들은 4-50대의 중년이 되었고, 이제 다시 새로운 20대의 젊은이들이 이 사회를 이끌어 나가려고 합니다. 지난 이야기를 읽으며, 그때에 비해 지금은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발전했는지, 어떠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
‘우린 왜 도박에 취약한가.’ 지난달 한국마사회가 주관한 도박산업 건전화를 위한 세미나에서 내가 했던 강연 제목이다. 도박의 폐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경마는 대표주자다. 강연 청탁을 받고서는 ‘병 주고 약 주나’ 하는 생각에 좀 괘씸한 기분도 들었다. 한데 회의 분위기는 진지했다. 폐해의 심각성을 이제나마 이해하고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자세가 짐짓 놀라웠다.
흥분, 스릴, 시소, 환호…. 경마장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오른다. 하지만 그 뒤에는 실망, 한숨, 후회…. 개인은 물론 한 가정을 파멸의 늪으로 몰아넣는 무서운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기반까지 흔드는 사회병리는 단연 중독이다. 술, 담배는 이미 세계 정상급이고 마약, 쇼핑 중독도 만만찮다. 도박은 정부가 주도하고 있다는 게 더욱 문제다. 각급 지자체들은 도박장 개설에 가히 혈안이 되고 있다. 부족한 세수를 충당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번 돈으로 얼마나 훌륭한 사업을 하겠다는 건지. 물론 정부도 그 폐해를 알고 있다. 하지만 소수의 취약한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포기할 순 없다는 논리다.
한국의 도박 중독은 단연 세계 정상급이다. 세계 평균이 1∼2%인데 비해 마사회 보고에 의하면 성인 인구의 9.3%, 즉 300만명이 중독 단계라고 한다. 이런 사회는 건전할 수 없다. 한국인은 문화적으로 도박에 결정적으로 취약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린 전통적으로 노름에 대해 관용적이다. 긴 겨울, 농한기에 별다른 취미가 없어 모이면 술과 노름뿐이었다. 거기다 우린 주술적 심성이 강하다.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고 도박장으로 달려간다. ‘도박하면 잃는다’는 명명백백한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일단 발동이 걸리면 적당한 선에서 끝낼 줄 모른다. 거기다 몇 푼 잃으면 그만 쉽게 열을 받는다. 눈에 보이는 게 없고 이판사판 막간다. 이러고도 이 사람이 건재하다면 기적이다.
불행히 우리는 고급스러운 문화를 향유할 줄 아는 여유가 없었다. 무대 예술이나 미술관은 물론이고 사색, 독서, 명상과도 거리가 멀다. 즉흥적이고 즉물적이다. 짜릿한 말초신경의 흥분을 즐기는 경향이 강하다. 아름다운 가족적 전통도 한몫을 한다. 가족이 빚을 갚아 주기 때문이다. “이번만!” 하면서 계속 빠져든다. 전문가는 이를 공의존(共依存)이라 부른다. 잊지 말자. 돈 나올 구멍이 있는 한 노름은 안 끝난다. 결국 부모 형제, 처가까지 패가망신하게 된다. 내 돈 없어도 노름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그뿐인가. 현대 산업사회의 빠른 템포가 우리를 초조하게 만든다. 단숨에 뭔가를 이루어야 한다. 과정이야 어떻든 목표에 집착한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도박이 기승인 이유다. 로또 열풍이 아직 식지 않은 것도 그래서다. 이 한 장으로 운명이 바뀐다는데 누가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있으랴.
“로또는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다.” 남편을 여의고 장애인 딸과 파출부 생활로 사는 아주머니의 독백이다. 월수 100만원 남짓에 매주 10만원, 월 40만원을 로또에 기부한다. 복권은 중독성이 약하다는 정부 당국에 물어보자. 운명이 바뀐다는 희망찬 몽상에 젖어 있다가 매주 토요일 밤이면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몰래 소주잔을 기울여야 하는 이 아주머니를 말려야 하나, 그냥 둬야 하나. 800만분의 1 확률을 끈기 있게 기다려 보자고 격려를 할까, 아니면 그 돈으로 치솟는 강원랜드 주식을 사라고 권해볼까.
지자체가 다투어 도박에 뛰어드니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미 50여 군데가 성업 중이다. 말싸움에서 소, 개, 닭싸움까지 등장하고 있다. 접근이 쉬울수록 중독은 늘어난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점잖은 대전시도 도박판을 벌이겠다고 나선 모양이다. 시민단체들이 반대한 건 물론이다. 오죽했으면 그곳 YMCA에선 시 지원금 전액을 반납까지 했을까. 당국에 물어보자. 그래도 손쉬운 판돈 몇 푼에 충청도 양반의 자존심을 팔 생각이냐고?
크건 작건 정부는 품격이 있어야 국민이 믿고 따른다. 어쩌면 그렇게 철학이 빈곤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