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형 박사 집필 도서 '숙맥도 괜찮아 용기만 있다면'
살아오며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있다. 지기 싫어서 아예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 사람. 한 번 지면 마치 인생이 끝장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이다. 얼핏 보면 자존심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작은 패배 하나가 깊숙이 숨어 있던 열등감을 건드릴까 두려워, 애초에 시합 자체를 피하는 것이다.
나는 아흔을 넘긴 지금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생은 길고, 생각보다 길다. 오늘 한 번 졌다고 인생 전체가 틀어지는 것도 아니다.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온다. 인생은 한두 번의 승패로 결정나는 짧은 레이스가 아니다. 그러니 져도 괜찮다. 그게 끝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지면 창피하다’는 정서가 유독 강하다. 특히 운동선수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자주 본다. 후배에게 지느니 일찍 은퇴하겠다는 선수들도 있다. 체력이 문제라기보다, ‘나는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승부는 개인의 기량을 넘어 지역과 국가의 명예까지 짊어진 거창한 일이 되고, 패배는 곧 전체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런 과도한 의미 부여는 열등감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미국 선수들이 금메달에 담담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진다고 해서 나라가 몰락하는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는다. 개인의 패배는 개인의 일이지, 국가적 비극이 아니다.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70년대 골프계를 호령했던 잭 니클라우스는 어느 시기에는 거의 잊혀진 선수였다. 그러다 8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자 기자가 “돌아오셨군요!” 하고 기쁜 소리를 냈다. 그때 니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난 떠난 적이 없어요. 다만 이기질 못했을 뿐이지요.”
얼마나 담담하고 멋진가. 패배도, 나이도, 주변 평가도 전혀 의식하지 않은 태도였다.
요즘 세계 테니스계를 이끄는 조코비치 역시 마찬가지다. 아주 중요한 순간, 자신에게 유리한 판정이 나오자 오히려 심판에게 “이건 아니오” 하고 챌린지를 신청해 상대 선수의 득점을 인정받게 했다. 관중들은 패배보다 정정당당함에 더 큰 박수를 보냈다. 이 모습은 승패를 넘어선 품격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세상 모든 승자는 이길 때보다 졌을 때의 모습이 오래 기억된다. 최선을 다했다는 사람은 져도 당당하다. 하지만 완벽해야 한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한 번의 패배에 깊은 절망을 느낀다. 완전주의는 사람을 지치게 하고, 결국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든다. 인간은 완전과 불완전 사이 어딘가에서 사는 존재다. 질 때도 있고, 이길 때도 있다. 그게 자연의 이치다.
지금은 경쟁의 시대다. 패배가 두려워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미 마음의 패배다. 져도 좋다. 그 경험이 쌓여 결국 더 단단한 사람이 된다. 당당한 패배는 비굴한 승리보다 훨씬 더 명예롭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 보자. 승리하는 것도 좋지만, 질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강한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지금의 패배는 결코 끝이 아니다.
살아보니,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시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