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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코 Jan 22. 2022

공격수로 거듭나기

모닝 루틴 회복 다짐과 더불어. 

벌써 1월이 반 넘게 지나고 어느덧 2월을 바라보고 있다. 

새해엔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나도 '목표'라는 것을 세워봤는데, 공수교체.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 절대적으로 수비수였던 지난 시간을 통감하며 꽤나 아픈 연말을 보냈던지라 이제는 공격적으로 치고 나가야지, 공격적으로 살아야지 다짐에 다짐을 더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1월이 반 넘게 지나가니, 내가 어떤 목표를 세웠더라, 아니, 목표를 세웠던가? 하면서 자꾸 가물가물해졌다.


20대 중후반 어떤 시기에 나는 정말 24시간이 모자랐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번 돈을 고스란히 나에게 투자하며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고, 운동하고, 춤을 추고, 오디션 메일을 보내고 오디션을 보고. 일을 하지 않는 때엔 스터디를 하고 워크숍에 다니고. 꿈이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기의 나는 오직 꿈만을 씹어 삼키면서 하루하루 버티어냈다. 연기를 잘-하는 멋진 배우가 되기를 아주 간절히 소망하면서 말이다. 그 시간 동안 어쩌면 나는 아주 많이 자랐고, 지금을 이루는 토대를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을 소진해버리는 시기이기도 했다. 장거리 마라톤 중이었는데, 이미 숨이 차 버렸던 것이다. 원래의 속도를 유지하기는커녕 레이스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나서 다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질려버렸다. 


지구력이 딸렸다고, 인내심이 부족했다고 하기에는 조금 가혹한 시간이었다. 뛰어야 하는 이유를 외부에서는 단 한 가지도 찾지 못했던 시기였다. 오로지 내 안에서 나 스스로 그 에너지를, 열정을 채워 넣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였다. 모두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며 사회를 이루는 한 부분이 되어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는데, 나는 혼자 떨어져 나와 외따로 부단히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기능을 전부 상실한 것처럼. 기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고 되뇌었던 내 다짐이 아주 우습도록 나는 내가 초라해 미칠 것 같았다. 나 아니면 믿어줄 사람 없으니 스스로 믿어주자던 나의 외침이 오히려 너무나 고요해서 나를 짓눌러 버리는 때가 왔고, 때마침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나는 이 보기 좋은 구실을 핑계 삼아서 많은 것을 놓고 말았다.


꼴랑 2년동안 정말로 많은 것을 놓아버렸다. 쥐고 있는 것을 놓음으로써 갖게 되는 아릿한 아픔이 삶 전체를 짓누르는 아픔으로 커질 동안 나는 다른 것에 열중했다. 오직 연기 이외의 것에 열중했다. 연기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연기가 아니어도 살 수 있다고 합리화하면서, 정말로 도망칠 작정으로. 그렇게 열심히 회피하며 나를 잃어가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어떻게 하면 이 길 위에서 멋있게 걸어갈 수 있을까 고민했던 나에서 어떻게 하면 이 길 위에서 보다 안 쪽팔리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덜 쪽팔리게 포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의 포기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포기할 만큼 열심이었나. 포기할 만큼 해볼 거 다 해본 것 맞나. 포기하더라도 떳떳하고 싶으니까, 죽어도 떳떳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도망치고 싶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정말 그래서 딱 그만큼 괴로웠던 시간을 보냈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누군가는 많은 것이 전보다 나아지고 있다고, 좋은 일들이 연달아 생길 거라고 용기를 주는 말들을 보태주기도 하지만 사실 나는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인 기분이다. 다만, 지금은 조금 덜 도망치고 싶다. 도망치고 싶은 나를 끌어다 놓고선, 어떻게 하면 오랫동안 이 일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덜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 고민해보고 있다.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것 말고 내 안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불어넣어 줄 수 있으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나는 여태껏 너무 많은 것들을 해온 것은 아닌가? 적당했으면 편했으려나? 하지만 적당히 생각하고 적당히 행동하고 그렇게 적당히 적당하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연기 자체를 열렬히 사랑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연기를 하지 않는 길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서 혼란스러웠다. 마음이 몹시 아팠다. 결국 내가 원래의 레이스에 복귀해서 신발끈을 동여맨다면, 나도 언젠가 그 길 바깥에 있게 될 것만 같았다. 튕겨 나오든 그냥 레이스를 접어버리든 또다시 이렇게 나를 외면한 채 삶에 살아지는 시간을 보내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몰아붙인 레이스는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결국 내가 완성할 수 있는 사랑의 길이 아니다. 나는 돈이 있건 없건, 일이 있건 없건, 외부 상황이 어떻게 되건 말건 이 직업보다 내가 더 커져서 내가 이 일을 애틋하게 품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이 배우라는 업으로 나를 한계 짓지 않고, 배우보다 더 큰 내가 되어서 연기하는 나 자신을 사랑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구구절절한 글은 단지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내 일을 애틋하게 여겨 주기 위해서, 내 일을 가엾이 여기면서도 존중하면서 함께 가기 위해서, 나는 새로운 습관을 심어보기로 했다. 이미 내 삶에 깊이 박힌 게으름을 일순간에 빼낼 수는 없겠지만, 조금씩 서서히 내 삶을 새롭게 물들이고 싶다. 아티스트 웨이 책에 도움을 받아서, 모닝 페이지로 아침을 열며, 아티스트 데이트를 해 나가면서. 내 안에 이미 있었던 창조성을 매일 발견하고, 삶에 이미 있었던 아름다움을 매일 찾아내는 삶. 행위와 별개로 연결되어 있는 삶. 기능과 별개로 존재하는 삶. 이번에는 좀 더 똑똑하게 찾아가 보고자 한다. 


자기를 드러내야만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말은 비단 사람관계뿐만은 아닌 것 같다. 나와의 대화 속에서도, 나 자신에게 나를 얼마나 온전히 드러냈는가, 나는 나와 얼마나 친밀한가, 나는 나와 얼마나 진정한 관계 속에 있는가. 스스로 자문했을 때 가끔은 정말 하찮은 답을 했던 날도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이기기 위해서, 수비수의 태도가 아니라 공격수의 태도가 내 안에 자리잡기 위해서. 삶에 뛰어들어 좀 더 치열하기 위해서, 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기 위해서. 굳은 다짐과 함께 몇 가지 목표를 정했다.


아침에 일어나 성실히 모닝 페이지를 작성한다. 뒷산에 오른다. 아티스트 데이트를 실천한다. 약속되지 않은 외박은 하지 않는다. 매일 무언가를 발견하는 설렘을 안고 살아간다. 24시간을 떳떳하게 보낸다.


물론 촬영이 있는 날도 있고 예기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는 날들도 있겠지만, 삶을 이렇게 버려두어선 안 되겠다고 다짐했으니 지켜야지. 버려두지 말아야지. 아껴줘야지. 이렇게 공격적으로 나를 사랑해주었던 적이 있었던가! 어쩐지 정말로 좋은 변화가 생길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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