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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루코 Jan 25. 2022

INFP와 INTP의 싸움

흔한 3년 차 커플의 싸움

아, 정말 질기게 싸웠다. 싸움이라는 것이 서로 공격적인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라 에너지도 빨리 소진되는 데다가 아무래도 연인끼리의 싸움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조정하고 싶을 때가 많지 않은가. 나는 그렇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생각해보니 상대는 그렇지 않다. 하하하) pms가 겹친 것인지 정말로 서운할만한 일이 벌어졌던 건지 글을 쓰는 지금은 잘 모르겠다. 다만 어제는 아주 사소한 부분에서 서운함이 켜켜이 쌓였고, 결국엔 아주 예기치 못한 포인트에서 내가 폭발해버렸다. 나에게는 그를 배려했기에 몇 번을 참고 넘어갔던 맥락이 있었지만 상대방에게는 갑작스러운 폭탄이 떨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거의 핵폭탄급 공격이었다. 갑작스러운, 그리고 무자비하게 날아오는 나의 펀치를 그는 요리조리 피해보다가 에이씨 하고 한대 나를 퍽 쳤다. 그 순간 의욕을 상실해 버린 나는 나 또한 펀치를 날린 것은 까맣게 잊고 '됐다, 그래' 하고 마음의 문을 쿵! 닫아버렸다. 


인프피인 나는 그저 감정을 알아주길 원했을 뿐이었다. '이거 서운해!'라고 말했을 땐 그 서운한 감정만 고스란히 알아주면, 더 이상 증폭될 감정 따윈 없었다. 그냥 '에고 머니나, 서운했구나.' 그러면 나는 '응! 서운했다고!' 하면서 털어버릴 것이었다. 애초에 그것만을 원한 것이니 우린 다시 평탄히 저녁을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인팁인 상대방은 '이거 서운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우선 당황스럽다. 우린 방금 전까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았는가. 어찌하여 그것이 서운한 일이 되어버린 것인지 분석을 시작한다. 본인 기준에서 서운할만한 것이라고 판단이 되면 사과를 하지만, 서운할 만 것이 아니라고 판단이 되면 억울해진다. (일단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해보는 것도 그는 잊지 않았다.) 어제 인팁인 그는 최선을 다해서 여러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인프피인 내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곧 억울해졌다. 나는 곧 서러워졌다. 


얕은 화해로 보수공사만 아주 찔끔 진행하고 어색하게 밥을 먹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인프피는 아주 차가운 얼음동굴에 쭈그려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입김을 화아 내뱉으면, 내뱉자마자 입김마저 얼어붙을 것처럼 마음이 차가웠다.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기분이 나아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그만큼 우리 사이가 멀어질지도 몰라! 싶었다. 결국 자기 전, 그에게 다시 한번 '내 감정을 알아주세요' 기술을 시전 했다. 

한편, 인팁은 미안하다는 말도 했고, 상대방도 멀쩡히 밥을 먹었기에 일단락되었다고 굳게 생각한다. 할 수 있는 노력은 이미 다 하지 않았는가. 약간의 땐땐함은 조금 서운하다. 그래도 끝까지 좋은 분위기이고 싶어서 농담도 던져본다. 그리고 곧 자겠다는 인프피. 잘 자, 굿나잇 인사까지 무사히 마치고... 이제 됐군 싶었는데, 띠로리! 인프피에게 다시 연락이 온다. 

하지만 그는 역시나 불굴의 인팁. '이 구역의 해결사는 나야' 기술을 시전 했다. 명석하고 철저하게 상황을 분석한 뒤, 네가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했다. 겉보기엔 아무 문제없는 대화였다. 그러나 그 순간 인프피가 꽂힌 말이 하나 있었으니- '일리? 일리가 있다?... 그냥, 정말 그냥, 에구 서운했지.' 하면 끝나는 거였는데. (한 번 꼬리를 물면 파고 들어가는 것은 이럴 땐 참 못된 재능이다. 휴)

인프피는 날카로운 창을 가져와 상대방을 찌른다. 

'너 말이야,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지금 돌아보니 참 모호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생각해보면, 그의 생각이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정답 또한 있었다. 퀘스쳔 마크를 달았지만 분명한 마침표로 마무리되는 문장이었다.


나의 정답 : '우리 관계?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잘 챙겨주지 못했지. 우리 관계가 불안하다고 느꼈구나. 미안해. 내가 요즘에 정신이 좀 없어서 신경을 못 썼던 거지, 자기가 나한테 덜 소중해졌다거나, 우리 관계를 등한시하는 건 정말 절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게 해서 미안하다...' 


그니까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은, 사실 우리 사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듣고 싶다는 말이었으며, 우리 사이를 소중히 여긴다는 말은 내가 너를 무척이나 아끼고 생각하고 있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해도 마음만은 사랑이 넘치고 있다는..... 그 말을 듣고 싶다는 뜻이었다. 지금 와선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사이를 귀찮아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좀 불안하다고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상황 안에 들어가면, 그 감정 속에 파묻히면 사람들이 다들 어리석어지지 않은가. 나 또한 참 어리석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어젯밤 서로가 서로에게 시전 한 기술은 서로에게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단 한차례도 감정을 읽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함, 계속 노력하는데도 서운함이 풀리지 않는 것에서 오는 답답함. 아주 날 선 대립이 이어졌다. 서로의 입장이 중요했던 두 사람 중 누구 한 명도 그저 져주지 못했고 할퀴는 대화가 몇 마디 오고 갔다. 그리고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여섯 시까지.


스스로 모닝 페이지를 적기로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잠이 왔고 난 그때 비로소 잠이 들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해가 뜨지 않은 어둑한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니까, 모닝 페이퍼를 하기로 스스로 약속한 그 시각에 난 자고 있었다. 이대로 스스로와의 약속이 깨져버리는 것은 그 무엇보다 원하지 않았다. 결국 알람을 맞춰놓고 세 시간 만에 몸을 일으켜 모닝 페이지를 적어 내려갔다. 


그에 대한 서러운 마음, 서운한 마음이 일차적으로 마구마구 쏟아졌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이유는 그다음 순서였다. 준비성, 책임감. 두 개의 키워드가 머릿속에 스쳤다. 우리의 데이트에도, 우리의 관계에도, 내 감정에도 일정 부분 그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준비성을, 책임감을 요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우리면서, 요즘에 그가 얼마나 시달리고 있는지 아는데, 어쩌면 내가 많은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란 둘이 만들어 가는 것이니 관계에 대해선, 우리 둘의 일정에 대해서는 그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내 감정에 대해 책임감을 요구하다니, 그것은 부당한 요구였다. 사실 내 감정은 내 몫이 아닌가? 서운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이해시키는 것은 내 몫이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고. 만약 그가, 내가 원하는 만큼 이해해주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의 감정을 내가 정할 순 없는 노릇이니, 나도 존중했어야 했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네 탓이라고 퍼부었던 나의 짜증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그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짜증에 그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그제야 보였다. 멀리서 보면 꽤나 단단한 성을 가진 그이건만 비가 오면 온통 젖고 바람이 불면 휘청이는 시기일 터. 그런 그를 두고 그 성을 향해 내가 발길질을 막 해댔으니- 무척 놀랐으리라. 그 또한 작은 발길질이 엄청난 공격으로 느껴졌으리라. 누군가 자신의 성을 흔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인데, 내가 미친 듯이 후드려 패고 있으니 나와 거리를 두고 싶은 것 또한 당연했다. 간밤에 그가 내게 낸 상처는 그의 방어였을 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도, 미안함과 가여움이 마음 안에 차올랐다고 해도, 쉽사리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페이지를 꽉 채웠는데도 쉬이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안고 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산에 가는 동안 작은 다짐을 했다. 


노여움이 전-부 가셨을 때 연락을 하리, 정말로 온전히 그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됐을 때 연락을 하리. 


헉헉 거리며 산에 오르면서 그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게 될 때 할 수 있는 말, 하고 싶은 말을 연습했다. 오늘 산에서 나를 마주친 사람은 날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혼자 중얼중얼, 그러다가 그건 마음의 문제잖아... 하면서 으앙 눈물을 터뜨리다가. 다시 후우 후우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쌓여있는 에너지를 마구마구 걸음걸이에 승화시켰다. (무릎이 안 좋아질 정도로 팍팍 걸었다는 소리이다) 정자에 앉아 숨을 고르고 십 분 정도 쉬다가 산을 내려왔다. 


그때 갑자기 드라마 '그해 우리는'에서 매일 져주던 웅이 생각이 스쳤다. 웅이는 연수가 자존심 때문에 미안하다고 못해도 매번 찾아와 주던데, 이 놈의 그놈은 자존심이 세서 꼭 나한테 이기고야 마는가?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걸음, '내가 웅이가 되지 뭐. 지는 게 이기는 거랬어.' 생각이 들었다. 올해 들어 가장 올바르고 성숙한 생각을 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결국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한 뼘만 내려놓으면 나는 그를 받아들여줄 수 있다. 내가 먼저 인정받고 싶고 포용되고 싶어서 그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망할 자존심은 그가 아니라 내가 엄청 셌는지도 모르겠다.


져주리 마음먹고 한 전화 통화 속에서 그는 이미 온순해져 있었다. 수화기 너머로 잘 잤어? 물어보는데, 눈물이 핑 고였다. 우리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고, 서운한 감정이 모두 제 자리를 찾은 후 아주 바쁜 하루가 흘렀다. 그리고 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20분이 흘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계속 졸고 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고 자야겠다. 내일의 모닝 페이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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