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을 다스렸던 다섯째날
5.
이틀 동안 모닝 페이지를 작성하지 못했다. 작심사일...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은 억울한 부분이 있다. 모닝 페이지를 하지 못한 것이 게으름이 이유는 아니었으니 봐주고 넘어가기로 한다. 오늘도 역시 (사흘 전처럼) 해가 뜨지 않은 시각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모닝 페이지를 쓰러 책상 앞에 앉았다. 사실 모닝 페이지를 쓰는 것이 첫날처럼 설레지도 않는다. 집중도 잘 못한다. 몸을 일으키는 속도도 첫날에 비하면 몹시 느려졌다. 이럴 땐 마음을 탁탁 털어서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이 내 생애 처음인 것을 괜히 자각해 보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처음이므로, 타성에 젖지 않는 것! 그러면 삶에는 또다시 새로운 색이 도는 듯하다.
모닝 페이지를 쓰는 도중 오늘은 중간중간 내일 촬영에 대한 걱정, 생각, 상상이 끼어들었다. 연기를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상상하다가 이렇게 해보고 또 저렇게 해보고. 매번 촬영 전에는 촬영에의 긴장감이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다. 그런 것들도 자연스럽게 그냥 글자로 옮겨 적어보았더니, 아주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다 별게 아니다. 괜히 힘주어 삶에 긴장을 더할 필요가 없다. 적당히 힘을 빼고 나에게 여유를 주면서 가면 그것이 상황을 더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만들어 줄 것이다.
라고 나를 거의 세뇌시키면서 산에 올랐지만,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진 않았다. 걸으면서도 어느 순간 다가올 촬영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사실 적당한 긴장감은 삶에 활력을 주지만, 그 긴장감을 내가 수용하고 있나? 그래서 그 긴장을 설레는 쪽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고 있나?라고 자문하면, 차라리 거부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긴장 자체가 몹시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기분. 내일을 뛰어 넘겨버리고 싶은 기분. 이런 종류의 감정은 삶의 활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생기를 사라지게 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내 의식을 붙잡아 내 심장소리에 집중하도록 했다.
콩닥 콩닥 콩닥 콩닥.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심장은 그냥 고요하게 콩닥 콩닥 같은 템포로 뛰고 있었다. 사실은 산을 오르는 중이었으므로 콩 쾅 콩 쾅 열렬히 뛰고 있었다. 심장이 열심히 펌프질 하는 것을 순간 느끼면서, 요 조막만 한 장기 하나가 그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 제 몫을 다하고 있어서 나를 살리고 존재하게 해 주고 있구나 싶었다. 인프피는 순간 감격스러웠다. 내 심장이 이토록 성실하고 열렬히 나를 살리고 있는데, 매 순간 새롭게 나를 태어나게 해 주고 있는데, 조금씩 내 삶을 세상과 연결시켜 주고 있는데- 나는 심장이 뛰는 소리에 집중하면서, 내 몸 안에 장기들이 열심히 일해주고 있음을 느끼면서 차츰차츰 이 순간으로 온전히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꽤나 잘 살아있다.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불안한 상황들을 걱정하면서 지금에 존재하지 못했던 것은 오늘을 사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다. 설사 내일 그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내 심장을 포함한 다른 장기들은 이렇게 열심히 일해주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잘 살아있을 것이며, 내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아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일 것이다.
내게 닥쳐올 모든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지금의 불안이나 걱정을 에너지로 치환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연기를 잘하지 못할까 봐 불안한 거면,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그 상상에 힘을 더하기보다는 그냥 좀 더 연습을 하는 쪽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면 어떨까. 그렇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것. 지금을 사는 것. 다른 시공간이 아닌 지금 이 시공간을 사는 삶. 그 삶은 언제나 힘이 있고 강력하다.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은, 약 열두 시간 후에 있을 촬영이 아주 조금은 더 설레 졌다. 내일 촬영이 끝나면, 나에게 작은 선물을 꼭 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