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루코 Feb 12. 2022

본투비 바보였음을 인정하다.

매일 아침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을 꼬박꼬박 가지면서 오히려 힘든 며칠이었다. 누군가에게 안 좋은 감정이 있었대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옅어지고 잊혔을 텐데, 모닝 페이지 이 놈으로 하여금 곱씹게 되니까, 어디에서 어디까지 왜 기분이 상한 건지 낱낱이 밝혀졌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에게 감사한 마음 혹은 사랑을 느꼈대도 깊게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잊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아침마다 꾸역꾸역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다 보면 왜 이걸 감사히 여겼는지, 나의 어떤 부분이 이 지점을 필요로 했는지, 이 사랑을 어떻게 더 확장시키면 좋을지로 생각이 이어졌다. 모닝 페이지 이거, 단순한 아침 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계속 무한히 내 세계를 확장시키고 있어서 나는 본의 아니게 아주 커다란 세상에 놓이게 되었다.


오늘은 나의 '바보스러움'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나는 스스로를 굉장히 똑부러지고 똘똘하다고 생각하는데, 주변 친구들은 나를 허술하고 허당끼가 다분한 사람으로 오해하곤 한다.(오해가 맞아. 암 오해가 맞고 말고!) 누군가 나를 못 미더워할 때마다 나는 '어? 나 잘하는데? 생각보다 나 엄청 꼼꼼한데? 사람 참~ 사람 볼 줄 모르시네.' 하면서 그 사람의 반응을 불편해했다. 막상 무언가 일처리를 하는 걸 보면 꼼꼼하게 잘하는 편인데 생각은 종잡을 수 없이 여기저기 튀어 다니며 산만하고 마음은 오르락내리락 왔다 갔다 하니 못 미더워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 어쩌면 말이다. 성격이 꼼꼼한 건 꼼꼼한 건데, 그것과는 너무 별개로 사실 상식이 많이 없고 굉장히 많은 것을 가감 없이 모른다고 말해버리는 나를 두고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황당한 시선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건 나는 주로 '바보스럽다'는 평가를 받으며 누군가의 귀여움을, 때로는 무시를 받고는 한다. '아, 나도 좀 지적인 "언니" 같아질 수는 없는 건가?' 

나는 남몰래 언니 같아지고 싶어서 어느 순간부터 언니 같은 척을 하기 시작했다. 말투는 최대한 차분히, 떨릴 때는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고 더 더 더 차분히. 목소리 톤이 원래 높지 않으니, 아주 조금만 힘을 빼고 말해도 성숙해 보이니 그건 참 다행이네, 하면서. 그게 성공한 건지 언젠가부터는 누가 나를 처음 보면 나를 두고 아주 차분하시다는 말을 보탠다. (더 나아가 나른해서 졸려진다는 말까지도...) 나의 '언니 같은 척'은 누군가에게 졸음을 유발할 정도까지 되어버렸다.(이 정도면 나름 성공임) 처음에 나를 그렇게 알아버린 사람은, 내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가끔 푸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사이에 교집합을 찾으려 열심히 애를 쓰다가 이내 포기해버리곤 한다. 계속 연이은 물음표 다리를 건너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첫인상과 다르네요 라는 말로 정리해버린다.


그렇게 초면에서 구면이 되고 나를 점점 알아가면서 그들은 나의 '바보스러움'을 알아버린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의 바보스러움을 조금도 인정할 수 없으니, 그들의 새로운 인식 또한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럴 때면 더 더 더 차분한 언니 같은 척을 해 보는 거다. 더 똘똘한 척, 더 정돈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척, 더 인내심 있는 척, 더 사랑을 하는 척, 더 이해하는 척, 더 위로하는 척. 이게 왜 언니 같은 척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온갖 언니 같은 척을 계속해 나간다. 사실 척인지도 모른 채.


그러다 오늘, 이번에 유퀴즈에 누가 나왔다더라- 말을 하다가 나는 갑자기 이런 말을 해버렸다. 

'글을 써서 나중에 유퀴즈 나갈 거야.'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생소한 장면이었다. 왜 내 입에서 그런 말이 툭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나는 정말이지 손으로 입을 합! 틀어막았다. (입틀막) 헤에, 소리는 덤이었다. 나는 그 순간 나의 바보스러움이 보였다. 놀랐다고 입을 틀어막은 거야? 나 지금? 무슨 만화 속 장면처럼? 것도 내 말에 놀라서? 명명 백백 활동하고 있는 바보스러움이 그 순간엔 내 눈에도 보였다. 어? 너구나. 너를 두고 사람들이 바보스럽다고 한 거구나. 


나는 앞에 앉은 연인에게 물었다. 나 바보 같아? 그는 아니-라고 대답해...주지 않고, 똘똘한 척을 한다고 대답을 했던 것 같다. 사실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어쨌든 바보 같기는 하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게 아니라고, 정말 정말 소중하고 순수하고 좋은 거라고 덧붙이면서. 그러니까 이렇게 돌리고 저렇게 돌려서 바보 같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들어도 저렇게 들어도 바보 같다는 거였다. 


나는 갑자기 바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삐이이익 거리는 표정. 웨에에에에 하는 표정. 이상한 춤을 추었다. 갑자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편안해졌다. 이제까지 바보스럽기 싫어서 얼마나 언니 같은 척을 열심히 해왔던가?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본투비 차분이들은 될 수가 없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본투비 무게감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데. 오르지 못할 나무를 몇 번이나 올려다보고 몇 번은 올라가다 떨어지고를 반복하고는 오히려 절망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 나무는 내 나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라리 어리숙한 사람이었고 순간순간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참 본능적인 사람이었고 그렇게 때마다 내지를 때 편안해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면 사랑해! 말하고 고마우면 더 크게 고맙다고 말하고, 싫은 마음은 뭐 저딴 게 다 있냐 무시해버리고, 조금 충동적이고 아는 게 많지 않지만 그걸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는 본투비 바보...였다.


과거 한 시기의 상처로 나는 바보스러운 부분을 최대한 축소시키고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됐었다. 당시에 나는 성숙한 사람이어야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고 그때는 누군가의 인정이 절실한 시기였기도 했다. 어느 순간 내 모습을 잃어버렸다. 사실 굉장히 작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상황이었다. 그 시기가 내 안에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도 사실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 놈의 모닝 페이지. 이 요물 같은 것. 어떻게든 주어진 분량을 채우려 하다 보니, 수다쟁이가 필요했고, 그 수다쟁이는 나도 모르는 내 비밀을 가끔씩 툭 툭 꺼내놓는다. 


너무 척을 열심히 해서 내 진짜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내 인생에 많아지고 있다. 이건 아주 엄청난 일이었다. 진짜 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내 관계망 안에 점점 많아졌다. 관계를 피곤해하는 사람으로 커 나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 진짜 얼굴로 있을 수 없으니 보통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했고, 그렇게 에너지를 쓴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보여준 적이 없었으니 아무리 알려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관계 안에 있으면서도 외로워져 갔고 내 방문을 스스로 닫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갑자기 활짝 열면 어디 탈이 나 버릴지도 모른다.

일단 창문부터 서서히 열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를 열어 보이고 싶다. 꽁꽁 닫아놓고 보여주지 않았던 부분들을 꺼내 보일 수 있을 때까지. 모닝 페이지를 하는 시간이 조금은 괴롭다고 느껴지지만 100일 후가 설레는 건 이런 과정 때문이리라. 나를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과정, 곧 나를 더 섬세하게 알아가는 과정, 보다 단단하게 나와 관계를 맺고 확장하는 과정. 이 과정이 더 맑고 밝고 선한 미래로 연결되기를 바라며 잠들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사소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자신을 배려하는 연습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