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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을 쌓자

5월 24일 시원하게 비가와서 신랑 차를 얻어탄 하루

by 수박씨

한 남자 대리님과 네이트온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복직한 걸 보고는 먼저 말을 걸어왔는데,

알고 보니 대리님의 와이프도 임신을 했단다.

결혼한 친구들이 없어서 애기얘기는 관심도 없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한 시간을 넘게 이야기했나보다.


아니 이 사람, 남자야? 여자야??


아무리 애기아빠라고 해도 이렇게 육아와 임신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곰곰 생각해보니 이 대리님은 원래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누구하고도 수다스럽다 싶을 정도로 말이 많았지만 과하지 않았고 관심과 배려가 있었다.


그 대화 형식은 일에도 묻어난다.

IT부서에는 요청할 일도, 물어볼 일도 많다.

까칠한 분도 적잖은데 이 대리님은 항상 웃으면서 최대한 처리해준다. 아 이 사람의 생활방식이구나 싶은 게, 그것이 참 부럽기도 하다.


관심과 배려.

대화를 잘 하는 사람들은 자기 얘기도 잘 하지만, 상대의 일에도 관심을 갖고 적합한 질문을 한다.

“어? 내가 이런 얘길 이분에게 했었나?”싶은데,

어떻게 기억하고 묻나도 싶고, 또 비슷한 주제의 본인 얘기줄줄 이어 나간다.

사람과의 관계는 결국 관심과 배려가 아닐까.

이야깃거리는 관심이 없으면 생겨날 수 없다.

그러나 배려없는 관심은 없느니만 못한 법.

이웃과 동료뿐만 아니라 가족과도 마찬가지.


가사와 육아에 지치면서 나는 남편에게 불만이 많아졌다. 남편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껄껄거릴 때, 왜 그렇게 얄미운지 모르겠다.


그 때는 분명, 나 혼자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다.


남편은 가사일이나 육아에 굉장히 많이 동참하는 편이지만, 한 번 무신경해지면 어떻게 저렇게 무신경하나 싶을 정도로 모르쇠다.


한 번은 월말에 내야하는 글이 있어

아들을 재우고 작업에 몰두해 있었다.


“으아아앙~”


재운지 30분도 안됐는데 웬일인지 아들이 깨버렸다.


남편이 봐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잠이 든 채 꿈쩍을 안했다.

할 수 없이 내가 다시 들어가 달래고 재웠다.

10분 뒤, 또


“으아아앙~”


여전히 쿨쿨 잠만 잔다.

나는 다시 아기를 재우고 돌아서는데,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 남자를 어떻게 하지?”




오늘 아침 다운받아 놓은 동상이몽을 보면서 식사를 했다.

술에 찌든 남편 이야기였다.

한참 남편을 욕하다가,

끊임없이 잔소리하는 아내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고는, 저것도 문제다 입을 모았다.


그러고보니 나와 다를게 무언가 싶었다.

남편의 잘못된 것만 보다가는 나 역시 잔소리만 달고 사는 여자가 되겠구나, 그리고 나 역시 불행한 삶을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찔했다.


이후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면서 더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결국 내 인생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나’뿐이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내가 먹고 던져둔 우유갑을
대신 치워주는 다정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 몫의 책임을 남에게 슬금슬금 떠넘기는 어른이란 끝까지 행복할 수 없다.

책임이란 곧 자기결정권을 뜻한다. 이제까지 인류가 발견한
정신과 마음의 법칙을 동원해보면
아무리 좋은 삶의 여건들을 누린다 해도 자기 결정권이 없으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무리 작은 질서라도
내 책임 아래서 내가 만들어낸 것일 때에 살아 숨쉬는 일을 보람으로 여길 수 있는 게 사람이다.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208쪽 중에서-
어느 순간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식물을 기다리듯
그들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면 물을 주듯 칭찬을 했다.
그들이 윤기 나고 풍성한 잎을 틔우지 않는다고 안달하지도 않았다.
마른 가지에 초라한 잎 몇 개를 달고 있어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새 나무가
부쩍 자라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봄을 맞으면 갑자기 잎이 번성하기도 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남편은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딸은 모나지 않고 누구와도 잘 지내는 사춘기 소녀로 자라났다.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 198쪽 중에서-



그러니까,

엄마가 되었고, 주부가 되었고, 아내가 되어서 행복하려면

누군가가 해주기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울상일 게 아니라,

내가 할 건 기꺼이 하고,

상대에게 원하는 건 당당히 요구하고,

그래야 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머리로는 알아도,

아직은 시간을 들여 내공을 쌓아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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