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박씨 Oct 10. 2021

애증의 아빠

1. 미취학~초등학교 시절

나와 부모와의 관계. 또 할아버지와 아빠의 관계. 도대체 어디서부터 우리의 뿌리는 시작되는 걸까? 나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조상에서부터 지금 내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연결되고 다시 연결된다. 그게 대물림이란 것. 지금 내가 바로서야 되는 이유다.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미래의 후손들에게 대물림될 것이니까.


아빠와의 관계는 내 인생의 숙제였다.

철부지에 가족을 부양할 능력은 없는데, 자존심과 자책감이 뒤섞여 참 이상한 성격으로 가족들을 괴롭히곤 했다. 아빠 외의 가족들은 똘똘 뭉쳐 아빠를 힐난했다. 희생만 하는 엄마를 보호하고자 했다.  딸들은 엄마만 위한다며 아빠는  볼멘소리를 자주도 했다. 어릴 적엔 무서웠지만 나이 들어서는 외로워진 아빠였다. 하지만 사랑했다. 그럼에도 사랑을 준 아빠니까,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아빠는 술주정뱅이였다고 한다. 어떻게 아빠와 결혼을 결심했냐고 많이도 물었다. 공부도 잘했고 얼굴도 예뻤던 엄마라는데. 도대체 뭘 본 걸까? 엄마를 재밌게 해 주었다는 단순한 대답이었다. 그렇게도 결혼이 되는구나, 미혼 때는 이해가 안 됐는데, 3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보니, 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부자였던 할아버지, 특출 났던 첫째 형 밑의 아빠는 반항 어린 자유인이었다. 고모 말로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한다며 할아버지와 형한테 많아도 혼났다고 한다. 혼난 정도가 아니라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울분이 해결되지 않은 채  결혼 한 아빠는 엄마 속을 많이도 썩였다. 사업은 하는 대로 말아드셨고, 내기 당구, 화투에 빠지며 인생도 말아 드실 뻔했으나, 할머니와 엄마의 열성으로 교회를 다니고 변화되어 목사까지 되었다.


부모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한 법. 우리 집은 바람 잘 날 없었다. 여섯 살 차이 나는 언니가 가장 폭풍의 시기에 어린 시절을 맞았고,  나 역시도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은 7세 이전은 거의 기억에 없다. 엄마랑 아빠는 이불공장을 운영하느냐 바빴고, 집에 할머니와 방치된 채 지냈던 것 같다.


밥시간이 아빠를 데려 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당구치고 있거나 화투 치고 있는 아빠를 찾아갔던 기억,  아빠가 상을 뒤엎으며 화내면 엄마가 동네 친한 아줌마네(나는 산동네 이모라고 불렀다.)로 도망가있던 생각들도 난다. 나는 울며 엄마를 찾아 나섰다. 다행히 엄마는 늘 산동네 이모네 있었다. 산동네 이모네 문 앞에서 엄마의 파란 슬리퍼를 보고 안도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까지는 아빠를 최고로 여겼다. 아빠의 사랑은 충분히 느꼈기 때문이리라. 엄마 말로는 아기였을 때 매일 저녁 아빠의 잠바 속에 나를 안아 넣고는 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가장 예뻐했다고 했다. 나는 아빠의 언니의 통통한 귓불을 참 좋아해서 잘 때마다 꼭 만지고 자야 했다.


 밥을 잘 먹지 않는 나를 잘 먹게 하기 위해 아빠는 놀이를 제안하기도 했다. 빨리 먹은 사람이 늦게 먹은 사람 양쪽 귀를 댕기는 게임이었다. 그 덕에 밥을 잘도 먹게 되었다. 매운 김치는 아빠한테 꼭 빨아서 달라고 애걸복걸했고, 아빠는 기쁘게 김치를 빨아 주었다.  놀아주는 아빠였다.


병원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아빠는 '대구포'를 사주겠다며 설득했다. 대구포는 사실 언니가 더 좋아했는데, 언니가 좋은 건 나도 왠지 좋아 보여서 좋다고 했다. 아빠와의 즐거운 추억들도 많았다.


삼자매 중 둘째였던 나는, 언니와는 반대의 성격으로 자랐다. 언니는 고집이 셌고, 아빠와 강하게 부딪혔다. 어릴 적엔 작은집과 함께 살았었는데, 언니는 본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엔 끝까지 굽히지 않는 성격이어서, 사촌 오빠들과 다 같이 혼날 때도 언니는 도무지 잘못했다는 말을 안 해 작은 아빠가 외려 겁을 먹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때는 귀를 뚫어 아빠에게 귀가 찢어질 뻔하도록 혼났으나, 꿈쩍도 안 했다는 후문이다. 그걸 보고 두려웠었는지, 나는 고분고분한 성격으로 혼나는 걸 피하며 사랑받았다. 사실은 고분고분한 게 아니라 혼나기 싫어 참았던 거다. 공격성이 다분했으나 수동적인 짜증으로 표출했다. 혼나지만 않으면 되니까.


부모님이 늦둥이를 두어 내 나이 아홉 살에 동생이 생겼다. 막내가 태어나고는 나는 오줌 실수를 빈번히 했다. 부모님은 옛 방식대로 소금을 받아오라는 둥, 키를 씌워 보내야겠다는 둥의 이야기로 혀를 끌끌 찼다. 동생을 본 아이의 감정에는 무심했다. 교회와 집이 분리되어있지 않아 나의 실수 이야기는 자주 드다는 교인들에게 소문이 자자했고, 하나둘씩 그에 관한 이야기를 던졌던 것 같다. 지금의 육아 방식과는 많이 달랐다. 부끄러웠어도 나는 한동안 계속 실수했던 걸로 기억한다. 수치심으로는 아이를 고칠 수 없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오은영 효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