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에 들어서 조금 걷다 보니 아담하고 새하얀 카페 건물이 나타났다. 이곳 애프터눈티를 미리 예약해둔 친구 덕에 직원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착석하고 마실 차를 고른다. 생경했던 이름의 홍차들 중 추천을 받아 무난한 것과 독특한 것을 고른다. 함께 곁들일 스콘이나 구움 과자 들은 디저트가 진열되어 있는 테이블에서 보고 고르면 차와 함께 내어 주었다. 서버가 쪼로로록 따라주는 홍차, 스콘에 클로티드크림을 발라 맛보며 홍차의 왕국 영국에서 처음 먹어보는 이 조합을 그것도 오후 2시, 영국인들처럼 애프터눈티 타임에 경험해 봤다는 그것! 영국에 왔다는 황홀경에 휩싸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 느꼈다. 여행 중 만난 티타임과 디저트,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카페가 주는 행복을! 홀짝이며 홍차를 음미하고 처음 먹어보는 클로티드크림을 듬뿍 발라 스콘을 한 입 베어 물고 나니 입안 가득 버터풍미 그윽한 스콘과 고소한 크림의 어우러짐이 흥미롭다. 친구와 영국과 스코틀랜드 여행을 떠났던 15년 전, 여러 관광지를 다니고 좋았지만 가장 생생하게 그때의 기분과 느낌이 생각나는 순간은, 시각과 후각, 미각을 골고루 만족시켜 준 영국의 어느 정원이 딸린 카페에서, 애프터눈티 타임에 맛본 홍차와 담백한 스콘을 만났던 순간이었다.
여행을 가기 전, 계획을 짤 때마다 이 코스 하나쯤은 꼭 넣어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특히 평소에 자주 가기 힘든 먼 나라, 처음 가는 장소라면 더더욱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싶어서 바쁘게 관광할 계획을 장황하게 세우곤 한다. 나의 여행스케줄에 꼭 들어가야 하는 필수여행코스는 단연코 달콤한 현지의 디저트샵 그리고 디저트카페에 들르는 것이다. 사실, 이 코스는 내 직업과 연관이 있어서라고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베이킹하는 이 일을 하기 전에 다녔던 여행지에서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볼 때, 나는 어디를 가든 그 여행지에서 먹어볼 수 있는 디저트와 예쁜 카페를 들르는 코스를 꼭 넣곤 했었다. 왜냐, 쇼케이스 가득 채워진 예쁜 케이크나 구움 과자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바쁜 여행 중 달달한 디저트와 진한 커피 한잔은 피로를 잊게 해 주니까 말이다.
12년 전, 아들을 배에 품고 만삭의 몸으로 떠났던 홍콩, 마카오여행길에서는 유명하다는 두 가지의 에그타르트를 제대로 맛보기 위해 일부러 일정을 잡았다. 그것은 바로 홍콩 본토 스타일인 '타이청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와 '마카오식' 에그타르트였다. 정말 신기한 것은 20년 전에 가서 먹었던 타이청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는 여전히 인기가 있어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은 엄청난 베이커리로 성장했다고 한다. 딩시는 홍콩의 힙한 거리 소호 인근 미드레벨에스컬레이터 근처의 작은 빵집이었는데 지금은 그 위치에서 더 넓고 깔끔한 매장으로 탈바꿈했다. 타이청베이커리의 에그타르트는 내가 주로 만들고 종종 강의품목으로 올리는 스타일인데, 쿠키 같은 타르트반죽으로 타르트 지를 만들고 그 안에는 푸딩 같은 에그필링을 담아 찰방 찰방하고 부드럽다. 그래서 갓 구워져 나온 후가 가장 겉바 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으로 먹을 수 있다.
홍콩에 가면 또 하나, 마카오식 에그타르트가 있는데 이는 바삭한 패스츄리 타르트지 속 촉촉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이게 살짝 그슬린 에그필링을 자랑한다. 나는 이런 스타일의 에그타르트를 마카오에 들렀을 때 처음 맛보았는데, 당시에는 로우스토우 베이커리가 유명했다. 포르투갈이 타르트의 본고장인데, 마카오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 영향으로 마카오식 에그타르트를 포르투갈의 파스탈 데 나타 (Pastel de nata) 방식 에그타르트 그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에그타르트 맛집을 찾으면 대부분 이 포르투갈식, 마카오식 파스탈 데 나타 방식의 에그타르트가 대부분인데, 사람들이 에그타르트는 타이청베이커리 스타일처럼 다른 종류도 있음을 알았음 싶다.
홍콩은 게다가 영국령이었다 보니 영국의 영향을 받아 애프터눈티 문화가 잔존해 있었다. 따라서, 홍콩의 호텔들에서는 애프터눈티세트 메뉴를 예약해서 맛볼 수 있었는데, 3단 트레이에 예쁘게 올려진 디저트를 순서대로 즐기며 마치 우리가 영국 귀족이라도 된 냥, 느긋하게 애프터눈티 타임을 즐겨볼 수 있는 시간도 만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여행 중 눈이 즐겁고 입이 즐거운 시간, 마음이 바쁜 여행 중이라 하더라도 한갓지고 느긋하게 즐기는 이런 달콤한 시간은 어느 여행지를 가던지 간에 꼭 필요하다.
일본은 디저트의 성지이다. 우리나라보다 몇 년은 앞선 디저트 문화가 있었기에 배울 점이 많았다. 나는 취미로 제과제빵을 수학하고 양과자전문자과정을 밟은 후 일본에서 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그래도 나는 일본어 전공생이니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므로 닥치는 대로 일본 서적들을 구해 디저트 연구에 몰두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베이킹을 시작했던 15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 이렇게 다양한 디저트 샵도 없었고, 대기업 빵집 몇 군데가 동네 빵집의 전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에 드나들면서 만나게 되는 동네마다 꼭 있는 골목 어귀의 작고 아담한 개인 빵집 혹은 케이크샵은 일본 스러운 디저트 스타일을 탐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베이킹을 배우고, 시작하고 판매와 클래스까지 바쁘게 취미에서 일로 채워가는 동안, 열심히 일본을 드나들며 일본 베이킹서적을 구하고, 일본 베이킹 도구와 재료들을 사다 날랐으며, 일본에서만 살 수 있는 특이한 도구들을 구비하고 수업을 하곤 했었다. 또한 운영하는 블로그에 일본의 어느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들르는 디저트샵, 베이커리, 카페투어등의 사진과 글로 정리를 하면서 나는 더더욱 디저트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해졌던 것 같다.
일본이 디저트가 발달한 이유는 아무래도 유제품이 풍부하고 가격적으로도 우리나라보다는 경제적이고, 우유, 크림, 버터 등의 유제품의 풍미가 우리나라보다 좀 더 신선하고 고소하며 풍부함이 느껴진다는 점에 있다. 우리나라는 유제품이 소량 생산되고,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유제품가격이 유독 비싼 나라이다. 다양한 지방 함량이 있는 생크림종류가 있어 용도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은 일본의 유제품 시장이 살짝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 디저트 시장은 트렌디하게 변하고 있고 가격도 치솟고 있지만, 최근에 가본 일본은 큰 가격적인 상승 없이 아담하고 신선하고 깔끔하게 케이크를 만들어 쇼케이스 가득 채운다. 그 변함없음이 참 멋스럽다 싶다.
일본에 가면 큰 지하철 역사마다 사람들이 줄 서서 사고 있는 베이커리들에 주목해야 한다. 거의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일본을 드나들지만 변함없이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빵은 크루아상이 아닐까 싶다. 한 브랜드의 미니 크루아상을 무게로(그램)으로 재서 살 수 있는데 이 것을 사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굉장히 놀라웠다. 빵을 사려고 줄을 선다는 개념 자체가 예전에는 우리나라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할아버지 모양의 도장이 꽝 찍혀있는 폭식한 수플레치즈케이크와 크렘브륄레처럼 윗면을 토치로 캐러멜라이즈드 하여 그슬린 치즈케이크도 사람들이 많이 사 먹어서 신기해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붐이 일었던 도지마롤케이크는 또 어떻고.. 나는 일본 오사카에서 도지마롤을 처음 맛보고, 이런 종류의 롤케이크를 만들고 먹어볼 수 있음에 놀라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었다. 일부러 찾아간 롤케이크 전문점 ‘롤야’를 비롯하여 일본산 고소한 생크림과 촉촉한 시트의 어우러짐을 입안 가득 머금어 볼 수 있었다.
최근 일본 지하철역사에서는 크림샌드쿠키와 크루아상, 그리고 새롭게 까눌레가 등장했다. 일본인들의 디저트 입맛도 점점 변해가는구나. 이런 흐름을 여행을 통해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 것도 즐거운 여행의 맛이다.
8년 전 한참 베이킹 공방을 운영하는 중에는 유독 자주 출장으로 도쿄를 방문하곤 했었다. 직업을 베이킹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한 후 처음 만난 일본 친구는 나를 위해 하루는 도쿄의 유명 디저트샵, 베이커리를 데리고 가주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일본 친구들은 일본과 한국을 드나들 때마다 나에게 당시 트렌디한 도쿄의 디저트를 선물해주곤 했다. 한참 일본 디저트에 빠져 있을 때 떠난 도쿄의 디저트 투어 때에는 하루종일 긴자, 오모테산도, 롯폰기 비롯 유명 파티시에의 디저트샵이 몰려있는 지유가오카 등, 다양한 곳을 성지순례 하며 새로운 케이크샵들을 둘러보는 재미에 폭 빠져있던 적도 있었다. 특히 지유가오카에서 일본 최초의 몽블랑케이크 가게에서 만난 의외로 수수한 몽블랑케이크의 자태에 살짝 실망했으나, 그 깊은 맛과 조화로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난다.
일본은 어느 빵집을 가도, 케이크샵을 가도, 귀여운 구움 과자 전문점을 가도 다 맛있다. 재료가 좋으니까, 그리고 다양한 재료의 종류 덕에 해당 디저트에 대해 적절한 식감과 맛을 내는 데에 탁월했다. 여전히 일본의 어느 도시를 가도 디저트샵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보며 이제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고 따라나서는 것도 재미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 가족은 모두 디저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가족이지만, 나의 취향에 맞춰준다는 것임을 잘 알기에, 이 또한 여행지에서 함께 하는 여행메이트의 취향을 존중하는 예의도 서로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태국을 좋아해 여러 번 다녔다. 태국에서도 디저트샵 투어는 빠질 수 없는 코스였다.
방콕 어느 외곽 마을에 왕실에 빵을 납품한다는 한 빵집 겸 카페를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 버스도 지하철도 없던 외진 곳인데 현금이 없어 택시도 못 타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 한참 걸어 나와 편의점 한 군데를 겨우 발견해 현금을 찾아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왔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함께 한 여행메이트인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우리는 가뭄의 단비 같았던 편의점을 만나 평소 잘 마시지도 않는 코카콜라를 벌컥벌컥 마시며 목을 축였던 그 추억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그 왕실에 납품한다는 빵은 특별한 것이 없는 평범하고도 심심한 빵이었지만, 그 허름한 카페에서 내가 이 빵과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맛본 것에 의의를 두었던, 이 코스를 여행 코스로 넣은 나란 사람도 참 재미있다 싶었다.
솔직히 내가 접해본 동남아시아 디저트는 수준이 한참 낮았고, 크림도 너무 느끼하고 달거나 디자인도 촌스러웠다. 그런데, 몇 년 전 오랜만에 다녀온 태국 방콕에서 일본 셰프와 협업하였다 하여 들렀던 한 케이크샵은 수준급이었다. 이제 동남아시아지역도 태국이나 인도네시아 같이 빠르게 젊은이들이 외국 문화를 흡수하는 트렌디한 나라에서는 한국식 일본식 디저트샵들이 많이 유입되고. 상당히 수준이 많이 높아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나 한국의 디저트를 따라오기엔 한참 멀어 보인다. 일본과 우리나라 파티시에의 섬세함과 꼼꼼함, 그리고 창의성은 아무래도 그들이 넘을 수 없는 모종의 벽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 미국이나 유럽의 디저트는 또 조금 다른 느낌이랄까!
지금까지 여행을 다니면서 늘 디저트투어, 카페투어를 일정에 넣었던 것 같다. 함께 하는 여행메이트에게는 잠시나마 쉼의 시간을 주고, 나 역시도 커피 한잔과 달콤한 케이크 한 입으로 여행의 피로를 녹여내고 온몸 가득 당과 카페인을 충전시켜 기분을 끌어올리는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기에 택한 방법이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달콤한 디저트를 맛보고 그 공간의 분위기를 온전히 느꼈던 시간들은 베이킹하는 일이 업이 된 지금에도 충분히 필요하면서도 직업적으로도 도움이 되는 부분도 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을 여행 중에 슬며시 밀어 넣는 것. 그게 바로 진정 여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과거의 여행지들에서 만났던 달콤한 디저트에 대한 추억, 그 달콤함을 맛보지 않았었다면, 그 식감을 비교해보지 않았었다면 몰랐었을 재미있는 경험! 이것이 바로 여행의 맛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