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늘 설레었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붉은 잎들이 노랗게 변해가다 시들어 갈 때쯤이면 슬슬 코끝이 시려져 가고, 나는 겨울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늘 내 생일 즈음에 내가 사는 서울에 첫눈이 내리곤 했었다. 가늘게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면서 생일을 맞이하고, 부지런히 생일을 준비해 준 가족들이 있어 행복했다.
12월에 태어난 언니와 나는 연년생, 1년 이틀 차이의 생일이다. 엄마는 늘 언니 생일에도 미역국을 끓이고 케이크를 준비했다면, 이틀 후인 내 생일에도 새 미역국에 새 케이크를 준비해 주셨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반 친구들을 초대해 집에서 생일파티도 해주셨는데, 언니와 내 생일이 있는 주간에는 우리 집이 늘 북적거렸다.
겨울이 되면 즐거운 일이 참 많았다. 생일이 있고, 조금 지나면 크리스마스, 그리고 연말, 새해. 이렇게 줄줄이 이어지는 행사들이 가득 찬 12월이 참 행복했다.
소복하게 내리던 흰 눈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눈이 내린 후의 고충을 서서히 느껴가면서 나는 슬슬 아이다움을 벗어나버리게 되고 눈이 마냥 즐겁지만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눈이 내린 후에 쌓여서 미끄러워지는 길이 싫었고, 한 두 번 넘어지는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눈길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된통 슬라이딩을 한 어느 날, 더러워진 교복 치마를 털고 일어나면서 얼마나 눈이 싫었던지, 그 후부터 나에게 눈길은 공포에 가까울 정도로 힘든 존재였고, 눈이 오면 미끄럽지 않은 신발을 신고 뒤뚱뒤뚱 걸었던 내가 있었다.
눈이 녹으면서 질척해지고 더러워지는 길도 싫어서, 눈 오는 날에는 가급적 외출을 자제했다.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은 아름다웠지만, 이제는 이 눈이 쌓이면 어쩌지, 나의 오늘을 살아내는데 걸림돌이 되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하는 눈의 낭만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지금 하는 베이킹 일을 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이렇게 눈이 오면 설렘과 걱정을 동반한 겨울을 보냈었다면, 베이킹 일을 시작하고부터는 겨울을 대하는 태도가 좀 바뀌게 된다.
겨울은 베이킹하는 사람들에게는 피크 시즌이다. 12월은 크리스마스까지 계속 강의와 주문제작 케이크들로 분주했고, 이런 삶이 12년째 계속되고 있다. 물론 내 업장을 마무리하면서 여느 업장들처럼 크리스마스 시즌에 엄청난 양의 케이크를 만들어 내는 일은 이제는 하지 않지만, 가족들이 먹을 케이크, 선물할 케이크,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며 연말을 맞이한다.
팬더믹으로 인해 강의마저 멈춰버렸던 재작년 12월, 1월은 유독 춥고 눈이 많이 왔지만 그런 낭만을 누릴 여유도 없이 마음은 차가웠다. 쉬게 되는 기간에 쉼을 누리지 못하는 나에게 남편은 여유롭게 마음을 가지라고 늘 말해주었지만, 십 년 넘게 분주하게 살다가 여유로워진 현실이 편안했다기보다는 괴로웠었다.
겨울에 캐럴을 들으면서 크리스마스 쿠키를 만들고 케이크를 굽고 생크림을 부드럽게 바르는 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하고 소중했다. 겨울에 내가 하는 일들이 많은 사람들의 연말을 행복하게 해 주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는 부쩍 더 겨울을 맞이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되었다.
삶의 패턴이 변하면서 생기는 변화. 이는 내가 어린 시절 가장 설레었던 계절인 ‘겨울’을 맞이하는 나의 태도를 변하게 했다. 여전히 눈이 내리고 강의를 가야 하는 날이면 쌓여서 얼면 어떡하지 도로 사정이 어쩌려나 걱정부터 하고는 있지만, 적어도 베이킹을 하는 시간만큼은 즐겁고 행복한 생각들을 가득할 수 있어서 좋다.
겨울이 끝나간다, 이제 봄베이킹을 준비해야지. 따스한 봄이 되면 또 어떤 수강생들을 만나려나. 또 다른 설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