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운이 좋아. 날씨복이 있어”
어릴 적부터 소풍 가는 날 날씨가 안 좋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는 나에게 늘 엄마가 해주신 말씀이었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학창 시절 소풍을 가거나 수학여행을 가던 때에는 날씨가 늘 맑았다.
그래서 늘 날씨에 대해서는 자신이 있었고, 기대하던 날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날씨 걱정은 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가 붙여주신 ‘날씨복 있는 아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라서인지, 날씨에 대해서는 늘 자신만만했고, 행여 좋지 않아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금방 개겠지, 혹은 날씨가 궂어도 오늘을 알차게 살면 되는 거야 라면서 자기 암시도 잘하는 사람으로 자라게 되었다.
‘날씨복’. 커가면서, 바쁘게 살아가면서 잊혀 가던 단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날씨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눈을 떠서 맞이하는 아침, 날씨에 따라 하루의 기분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라,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아무래도 내가 부모님의 손을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내 삶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한 성인이 된 이후부터, 나는 ‘날씨복’이라는 단어를 망각한 채, 점점 걱정 투성이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오늘 이동이 많은 날인데 어떤 옷과 신발을 신고 어떤 이동수단으로 나가야 할까를 고민하거나, 비가 온다는데 우산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흐리기만 해도 우산을 챙긴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었다. 반대로 날씨가 맑으면 그동안 못 신었던 천 소재가 들어간 신발을 신어볼까 살랑살랑 치마를 입어볼까 이런 행복한 고민도 적잖은 스트레스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한치의 오차도 실수도 허하지 않겠노라 하며 미리 준비한다고 하는 고민들인데, 이 준비 자체도 나를 짓누르고 있는 무언가였던 것을 그땐 왜 몰랐을까.
그런데 언제부턴가 날씨 따위가 나의 하루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마저도 마치 사치인 것처럼, 날씨에 굴하지 않고 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나’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비 맞는 것은 참을 수 없어. 눈 오는 날은 지긋지긋해, 특히 눈 오고 녹아가는 더러운 도로를 걷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
이런 불평불만과 나만의 신조가 가득했었다면, 이제는 조금 너그럽게 내려놓고 이러면 어때 저러면 어때 그래도 오늘 하루는 지나갈 것이라며 덤덤하게 생각하려는 자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변화는 나이를 먹어서인 것일지, 아니면 마음가짐이 변해서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젠 나도 내가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하고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가고 있는 중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맑고 청아한 날씨가 주는 행복감을 제대로 만끽한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하다. 날씨가 좋으면 좋은가 보다 하고 나의 삶을 살기 바빴고, 날씨가 안 좋으면 일하러 가야 하는데 날씨가 왜 이래 이러면서 책망하기 바빴다.
하지만 하루의 기분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날씨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한다.
그날 그날의 감정들에 약간의 영향을 받을 순 있겠지만, 내 삶의 주체는 ‘나’ 이기에, 나의 감정을 날씨에 살짝 실어본다 하더라도, 긍정적인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