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말은 하나도 틀린게 없어.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믿으며,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 에너지를 얻는 '나'라는 사람에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일침을 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엄마다. 엄마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파르르 하며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표출하거나 의견을 이야기할 때마다 말씀하셨다.
"의외로 가까운 사람이 적인 경우가 있어. 늘 조심해야 해. 너는 늘 좋은 사람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살아봐라."
20대에도, 30대에도 나의 신변이 변하고 주위 사람들이 변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사귈 때에도 엄마는 늘 말씀하셨었다.
"너무 다 내어주지 마. 독이 될 수도 있어."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말했다.
"엄마는 왜 늘 부정적으로 말해? 세상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늘 좋은 사람들만 만났던 것은 아니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베이킹일을 할 때, 진상 손님도 만나봤었고, 한참 콧대가 높을 대로 높았던 20대 때에는 남자들, 특히 남자들이 많은 팀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일부 아저씨들, 그들이 20대 여자 직원을 대하는 태도에 짜증이 나서 큰 소리를 내고 상사에게 보고한 적도 있었다. 눈이 처지고 순한 인상 때문에 손해 보는 상황이 되거나 남들이 나를 물로 보는 상황이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참을 수가 없었고 나는 극복해 낼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내 방식대로 물었다. 살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나를 힘들게 만드는 순간이 올 때마다 혼자 괴로워하며 삭히기보다는 이 상황들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며 의견을 주고받았고, 여러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나를 되돌아보며 결론을 지었다. 그 결론은 바로 내가 살아야 하니, 치졸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들이받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야 내 가족이 있고,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내가 다 감당할 필요는 없어. 부당한 이유로 손해 보고는 살지 않을 거야.'
우악스럽게 욕을 하고 개진상을 떤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할 말은 다하고 상대방을 나지막이 조용한 톤으로 제압하는 것. 법적으로, 혹은 권력이 있는 사람의 힘을 빌어서라도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행동해야 했고 그렇게 하고 감내야 할 시간들이 있고, 그러고 나면 또 시간이 흘렀고 잊혀 갔다.
그런데 딱 하나. 자영업을 하던 시절, 어이없는 진상손님에게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나에게 포장 비닐을 차문 밖으로 뿌려 던지고 사라졌던 그 레인지로버 차주인 그녀. 그녀에게만은 고객이기에 거듭 죄송합니다 말만 하고 그 쓰라린 경험을 감당하고 집에 돌아와 남편 품에서 꺼이꺼이 울고 욕을 해댔던 적은 있었다.
장사를 하다 보면 '손님은 왕이다'라는 모토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하게 되는데, 솔직히 동네 장사를 하다 보면 모두에게 좋은 이미지, 친절한 사람, 정직한 가게라는 이미지를 새기기 위해서 나는 나를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으르렁 할 것 같았던 성질을 죽이고 상냥하고 참한 동네 가게 주인이 되었어야 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날이 선채 회사생활을 하던 시절보다는 정서가 안정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이를 키우면서는 좀 달랐다. 웬만하면 내 성질을 죽이고 여러 상황들을 감내해 왔지만, 아들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더라. 학교에서 아이에 대해서 부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하면 내 아들을 보호하려고 맞서 싸워야 했다. 그러려면 내가 많이 알고 힘이 있어야 함을 알았고, 여기저기 자문을 구했고 나는 여러 아이들로 인해 심각하게 어수선한 초등 1학년을 보냈던 아들을 위해 총대를 메었다. 2학년에는 스스로 반대표를 자처하고 내 아들이 좋은 선생님과 좋은 아이들 속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부드러운 감시에 돌입했었다. 담임선생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교장, 교감선생님까지 얼굴 도장을 찍고 아이들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지켜보는 오지라퍼 엄마를 자처했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에서 가게를 하고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했지만 나의 사회적 지위는 다 접어두고, 아들을 위해 총대를 메었다. 누군가 뒤에서 쑤군거렸을 수도 있었겠지만 괜찮았다. 내 아들이 힘들어하는 꼴은 못 보겠더라. 학교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그 덕분에 그나마 다소 차분한 2학년을 보내고 이사와 동시에 아들을 전학시켰다.
정말로 나는 분노를 싫어한다. 웬만하면 평온하게 살고 싶고 평화를 빈다. 매일 분노할 정도로 정신적 육체적으로 에너지가 넘치지도 못하다. 거기에 쓸 에너지라면 나는 다른데 써야 할 것들이 많아서 아까울 정도이다.
주말 중 하루, 오전에 4~7세 아이들과 베이킹 수업을 통해 만난다.
꼬물꼬물 아가들과 베이킹 수업을 하는 시간은 나에게 힐링이다. 처음에는 아이들 수업을 이끌어가는 것이 어려운 것 같았지만 적응이 되고 내 아이를 키우며 경력이 쌓이다 보니 단순한 수업을 떠나서 아이이 각각이 보였다.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진 한 가정의 소중한 아이들 말이다. 그리고 젠틀하신 부모님들의 강사에 대한 신뢰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의 온화한 말투와 성품,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내 강의에서는 오롯이 나를 따르는 이 아이들과 부모님들이 참 감사하고 행복했다.
인사를 하고 활기차게 박수를 치고 수업을 시작한다. 마치 '뽀뽀뽀'의 뽀미언니가 된 듯, 하이톤의 말투로 아이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반짝이며 나를 보고 있는 아이들의 사슴 같은 눈망울들이 눈에 들어온다.
괜히 선생님이 다가가면 쓰윽 손을 잡는 아이, 수업을 마치고 나와 수줍게 사탕을 주고 가는 아이, 선생님 준다고 그림을 그려 선물로 주는 아이, 괜히 다가와 백허그, 아니, 키가 안되니 허벅지 허그를 하는 아이.. 너무 귀엽지 않은가!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잘하든 잘못하든 나는 작은 부분도 캐치하여 칭찬을 해주곤 한다. 아이에 대한 칭찬은 아이도 좋아하지만 동행한 부모님들을 절로 춤추게 한다. '내 아이가 잘한다, 이 부분이 특히 좋다.'라고 칭찬하는 선생님이 있는데, 내가 부모라 해도 어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겠나.
"선생님, 감사해요~"
이 한마디. 빈말이어도 이 한마디에서 오가는 정이 있다. 부모가 되지 않았음 모르겠는 그 마음말이다.
오늘도 케이크 시연을 마치고 짜잔-하고 보여주니,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진다. 아이들의 '우와!' 하는 탄성도 들려온다.
지난 힘들었던 순간들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에게 위로받고.
그렇게 살아간다.
본 매거진 '다섯 욕망 일곱 감정 여섯 마음'은 초고클럽 멤버들과 함께 쓰는 공공 매거진입니다. 여섯 멤버들의 '희로애락애오욕'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