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마련해주신 등록금을 모두 탕진했다. 친구의 밀린 하숙비로 나머지는 나의 유흥비로, 시간과 공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한 학기가 다 가도록 공부에 풀기가 빠진 내가 저지른 비행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서 귀결 지어졌다.
교수의 하찮은 강의는 이가 빠진 동그라미로 더 이상 이어 붙여지지 않았고, 학교 앞 다방을 들락대는 죽순이가 되었다.
호떡 골목을 지나 친구의 하숙집으로 쥐방 구리처럼 들다가 나중엔 아예 몇 벌의 옷가지만을 들고 눌러앉았다. 친구는 의대생이었다.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해부학 책 표지가 뻘겋게 회칠을 한 유충이 꿈틀대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다. 얼굴을 덮은 뿔테 안경이 지적으로 보인다. 나는 이렇다 할 의지도 없이 학력고사 점수에 맞춰온 학교생활은 마냥 무력하기만 했다. 뿌옇게 흐린 안개가 멍청히 흘러가고 시들한 내 일상은 쉰내가 펄펄 났다.
통일호 기차에 몸을 실었다. 호떡과 멀건 동치미 국물을 안주삼아 목축인 막걸리가 울렁거리는 속에 머리가 띵하고 집으로부터 전해진 읽지 않은 편지는 허름한 유니온 백에 들어있다. 차 창가로 달려드는 불빛, 그위로 어른대는 나의 얼굴이 흔들리며 낯선 조롱이 씹힌다. 앞 좌석에 앉은 아저씨는 벌써부터 코를 골며 잠들었고 사위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이 조용하고 쓸쓸하기까지 하다.
일사불란하지 못한 가족들은 제각각의 살길을 위해 흩어졌다. 여수 어딘가로 흘러들어 갔다는 엄마를 찾아 밤 열차를 타고서 낙서장에 연필을 그어댄다. 얼음처럼 하얀 백지에 태양을 동그랗게 그려놓는다. 날아오르는 한 무리의 새떼들이 태양을 넘어 지나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