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

by 여비

온양에 가려고 코레일톡을 열었다. 엄마 같은 막내 고모집에 다니러 가려 남편에게 허락을 받았다. 61번째의 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서다. 시집살이할 때는 어머님이 흰 봉투에 떡값으로 생일은 여느 날과 같이 그냥의 그날이었다. 여태껏 내 생일도 간단히 외식이나 하며 보냈는 데 말이다.

결혼 날짜를 받고 살림장만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직장생활을 했다 해도 안정된 수입이 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보니 냉장고, 세탁기, 장미 홈세트, 전기밥솥 등 협찬을 받았다. 구색을 맞추어 시집보낸다고 해도 가당치도 않은 예산 부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 당시 혼수 장만의 계획도 못, 세우는 지질한 나는 전폭적으로 빚을 얻어 시집을 가야만 했다. 내무부장관의 사퇴한 자리는 나를 더욱 쓸쓸하고 두려움에 떨게 했는데 막내 고모의 번뜩이는 재치가 나를 구제하여 무난하게 결혼이라는 화려한 궁궐에 입성했다. 그 당시에 막내 고모도 사정이 좋지 못해 원 도아인 냉장고를 사 주시며 눈물지으셨다. 철없던 나는 한 번도 물질의 궁핍이나 혼자서 남대문시장에서의 그릇, 이불, 한복 같은 혼수 장만은 해 본 적도 없고 예식장의 패키지 옵션인 전신 마사지만을 받고 웨딩드레스를 입으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무모하고 허당인 나를 못내 이해하려 애써본다. 막내 고모는 선생님이었다. 제자들은 모두들 똑똑하고 나름 성공을 했다. 모기업에 요직을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기에 딸처럼 여기는 조카를 시집보내려고 품앗이계의 계주 노릇을 자처하여 조그마한 종잣돈을 내게 쥐어 주었다. 그 시절에도 싱글이었고 지금의 80세에도 여전히 싱글이다. 평생을 교편생활로 그리고 전도사님으로 봉사하고 도고에서 혼자서 생활하고 계신다. 학창 시절에 나는 학생으로 막내 고모는 선생님으로 우린 학교엘 나란히 다녔다. 지방에서 각자 한 블록의 두 집으로 시집갈 때까지 한 동네서 살았다. 그러나 한 솥밥을 해 먹지는 않았다. 각자 독립을 원칙으로 하고 사생활은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뒤늦게 철이 드는가 보다. 갱년기를 호되게 보내고 두 딸들도 자립을 했고 한시 반시 몸을 놀리지 않아도 목구멍에 밥이 거저 들어간다. 힘겹다고 버둥대다 보니 이젠 숨 고르라고 뱃살도 위와 아래를 구분 못하는 원통이 되었다. 몇 해 전에 함께 했던 동유럽여행을 두고두고 얘기하고 마당 한편에 테라스 바비큐 파티를 언제 또 할꺼나 하신다. 내게 중단한 학업을 다시 이어 하게끔 용기 주시고 직접 손뜨개로 긴, 재킷을 짜 보여서 한올의 정성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다. 맘 한편에 서늘함을 따스한 온기로 데워 외로움의 자리로 몰아가지 않도록 늘 기도 해 주신다.

티켓은 로그인 버튼으로 결재하기가 확인이라는 빨간색을 누른다. 나는 기억한다. 막내 고모님은 오빠인 아버지가 홀로이 어린 자식 셋을 건사 못해 온전한 가정을, 외로 비튼 고갯짓으로 허풍만을 불고 떠나버린 자리매김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안 했다는 것을... 미역국의 육수는 다시마를 넣은 맑은 간장으로 순수라는 간을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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