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부 책장수 아저씨

by 여비

책상 위에 놓여있는 동화책이 나를 보고 웃고 있다. 학급문고 책도 아닌 옆집 영숙이네서 빌린 책은 더욱 아니다. 내가 모은 용돈으로 그것도 월부책을 들인 것이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엔 "일일 공부" 보급소가 있었다. 매일 집으로 배달이 되는 학습지다. 나는 공부에 취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심심해서 아저씨를 따라다닌다. 골목길 모퉁이에 두 친구 집엔 내가 맡아서 학습지를 배달한다. 영숙이와 노는 것도 심드렁하고 순이 언니는 공민학교엘 가니 나는 풀기 빠진 후줄근한 낡은 옷 같다. 아저씨는 사실 일일 공부 배달보다 월부로 책장사를 한다.

돌리다 남은 학습지를 내게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답안지 채점 그리고 표지에 컬러가 별빛보다 더욱 반짝이는 전집을 만져보게 하신다.

그림동화집, 안데르센 동화, 세계명작선 집 모두 양장본으로 곱게 치장한 책이다.

아버지에게 졸라봐야 헛일이란 걸 나는 안다. 내겐 하루에 10원을 받는 용돈이 있다. 물론 아버지가 술기운으로 기분이 좋은 날엔 20원이 쥐어지기도 한다. 그것이 여러 날이 아니라 아쉽지만 그래도 나는 아버지의 술타령은 징글징글하다.

아저씨는 내게 60개의 칸이 그려진 카드를 건네주고 나는 동화책을 건네받았다. 하루 한 칸의 10원 도장이 찍힐 때마다 내겐 동화책 한 장이 생겨난다. 특히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는 재미가 있어 머리가 쏴하게 뚫렸지만 카드에 도장만 생각하면 힘이 빠졌다. 꿈과 용기로 무장한 동화책은 한없이 기운을 빠지게 만들었다. 600원의 돈으로 동화책을 거머쥐고 눈물을 흘렸다. 한 달 육성회비나 되는 큰돈을 하루하루 찍힌 도장으로 만들다니..

나는 450원의 육성회비를 내고 때로는 교무실로도 불려 갔던 때였는데..

노란 나무장 맨 앞에 동화책은 오랫동안 꽂혀 있었다. 나 혼자 하루하루 모은 용돈으로 상으로 받은 공책이나 국어사전보다 소중했다. 양은 냄비세트, 전기프라이팬도 할머니는 월부로 사지 않으셨는데 나는 배짱도 좋다고 나중에 웃으며 얘기했다. 뭘 모르고 월부로 들였다고 눈을 째시며 다시는 안된다며 우격다짐을 하셨다. 네 귀퉁이가 닳고 재봉실이 너덜대고 제본이 찢어지도록 친구들과 돌려보았다. 나의 책사랑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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