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긴 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세이 Dec 30. 2020

취향이 바뀌는 일

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생기는 변화

1.

책 읽는 방법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람.


이사를 하며 더 이상 새 책은 사지 말자던 다짐과 달리 올해 유난히 많은 책을 사고 읽었다. 코로나에 발목 잡힌 일상. 거실에, 회사에, 침대 옆에 책을 쌓아두고 읽는 일만이 죄책감 없이 허락되는 한 해였다. 12월엔 연말 선물처럼 이석원 신간이 나왔다. 2년 만의 신간이었다. 그 사이 나에게는 책 읽는 방식에 변화가 있었다. 이 얘기를 하자면 그 애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2년 전 그 애. 닮은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듣는 음악, 생활 패턴, 식습관, 하물며 서로의 집을 오갈 때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갔고, 그 애는 버스를 타고 왔다.      


책 읽는 방법 역시 달랐다.

나는 주로 에세이만 사서 훑어보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그 챕터만 골라 읽었다. 문장을 사냥 나온 사람처럼 빠르게 책을 넘기다가, 몇 문장만 건져도 성공. 그리고 그 문장들을 언제든 꺼내볼 수 있게(=카피에 응용할 수 있게) 모아두었다. 그 애는 내가 읽지 않는 책들만 갖고 있었다. 두껍고 길고 어렵고 책들. 한 권을 정독하고 어떤 날엔 서평까지 쓰기도 했다. 독후감. 그것은 나에게 숙제 같은 일이다. 숙제가 아니고선 절대 할리 없는 일. 책이든 영화든 보고 난 후 내게 감상을 묻는다면, 재밌거나 재미없거나 두 가지 답뿐이다. 그 책이 어땠는지 길게 말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직업이 카피라이터인 내가 글을 읽고 쓰는 일에 훨씬 더 가까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그 애와 책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나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지곤 했다.     


2.

발을 맞춰 걷는 것처럼

속도를 맞춰 책을 읽는 일.


그렇게 다른 우리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이석원을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가까이 지내던 2년 전에도 이석원의 신간이 나왔다. 예약해둔 신간을 같은 날 받아들고, 우리는 속도를 맞춰 책을 읽었다. ‘지금 어디 읽고 있어?’ ‘이 부분 우리 얘기 같지?’ 등의 대화를 하며. 발을 맞추며 걷는 것처럼 속도를 맞춰 책을 읽었다. 그동안 많은 산문집을 사고 읽었지만 하나씩 짚어가며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읽은 첫 번째 책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많이 좋았나 보다.


그 뒤로 책 읽는 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그 애처럼 책등에 줄이 가도록 활짝 펼쳐서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읽는다. 긴 글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말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좋았던 부분은 표시해 두었다가 따로 노트에 적어둔다. 좋아하는 문장들로 채워진 노트는 행복이다. 그 안에는 내가 살고 있는 삶과 살고 싶은 삶이 모두 들어있다.


'필사'는 신기하다. 작가가 쓴 문장을 토씨 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따라 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꾸 내 맘대로 조사나 어미를 바꿔 쓰게 된다. 눈으로 보면서도 결국 내식대로 읽는 것이다. 어떤 문장은 단순히 어미나 조사 정도가 아니라 문장 자체를 잘못 받아들일 때도 있다. 한 책에서 ‘사진첩에 남지 않은 순간들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필사 했는데, 다시 보니 오리지널 문장은 ‘사진첩에 남지 않은 순간들을 사랑한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지나는데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라고 쓰여있었다. 작가의 의도와 달리 내식대로 읽고, 좋은 부분만 표시해 둔 것이다. 아직도 좋은 문장을 사냥하듯이 찾아내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잘못 적은 부분을 지우고, 작가의 의도대로 다시 쓴 뒤 곱씹어 본다. 그 작은 차이에도 말맛이 달라진다. 그렇게 필사를 하며 책을 두 번 읽는다.      


3.

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다 보면

내 삶에 변화가 생긴다. 


그 사람을 닮아가는 것인지, 따라하는 것인지, 그저 모든 걸 같이하고 싶었던 노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애를 만나서 한 권의 책을 오롯이 읽는 사람이 되었다. 그 전에도 후에도 내 인생에는 좋은 사람들이 등장했다. 어떤 사람은 독립영화만 상영하는 작은 영화관에 나를 데려갔고, 또 누군가는 내 방에 필름 5통을 남기고 떠났다. 회사 동료가 데려간 하프커피가 인생 커피가 되기도 하고, 알지 못했던 몇몇 가수의 노래가 여전히 내 플레이리스트에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하는 동안 그들의 취향과 습관이 내 일상에 슬며시 들어온다. 나를 바꿔놓는다.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알지 못했을 한 세계에 발을 들이고, 시간이 흘러 그가 사라져도 이제 나는 혼자 입장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의 나. 상영관 통로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여행갈 때 필카부터 챙기는 나는. 지난 사람들이 주고 간 조각조각으로 채워진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 취향도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묻어있을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은 역시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