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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상 Sep 09. 2021

백만 번을 산다해도 사랑이 없다면

그림책<백만 번을 산 고양이> 사노 요코 글, 그림

#백만 번 산 고양이 #사랑 #애착 # 삶과 죽음의 경계 #온전한 세상


백만 번을 산 고양이가 있었다. 백만 번을 태어났고 백만 번을 죽었다. 고양이는 그렇게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는 동안 삶에 대한 미련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그저 누군가의 고양이로 태어나 감동없는 삶을 살다 갔다. 한때는 왕의 고양이로 태어나 사랑을 받았지만 전쟁터를 따라갔다가  화살을 맞아 죽게 된다. 또, 한때는 선장의 고양이로 태어나 바다를 항해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는다. 그 후에도 마술사의 고양이로 태어나 마술을 함께 하고, 도둑의 고양이로 태어나 도둑질을 하며, 할머니와 소녀의 고양이로 태어나 그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그렇게 다양한 삶을 산 것처럼 다양한 이유로 죽음을 맞는다. 고양이가 죽을 때면 그때마다 고양이와 함께 했던 주인들은 슬퍼하며 울어주었다. 하지만 고양이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계속 반복되는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고, 매번 살아낸 인생이 고양이에게는 별반 의미가 없어서인 것 같기도 했다.


고양이에게 삶과 죽음의 의미가 생긴 것은 예쁜 하얀 고양이를 만나게 되면서 부터였다.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에게 환심을 사고싶어 재주넘기를 하기도 하고 자기는 백만 번을 살았노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얀 고양이는 별다른 반응없이 "그래" 라고만 반응한다. 그래라는 말은 그런 말에 크게 관심이 없다는 무심함의 모습으로 보이지만 내심 '네가 진정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는 진심을 묻는 말이었다. 고양이는 그제야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았을 것 같다. 그리고 "네 곁에 있어도 되겠니?"라고 묻는다. 항상 무심했던 고양이의 삶에 하나의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는 하얀 고양이 곁에 머물며 자연스레 새끼 고양이를 낳고 오붓한 가정을 이루게 된다.


시간이 흘러 자식들은 독립해서 떠나고 하얀 고양이는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하얀 고양이와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었던 고양이는 처음으로 삶에 애착을 갖게 된다. 하얀 고양이와 몸을 부비며 다정하게 머물었던 시간이 흘러 하얀 고양이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다. 고양이는 처음으로 울었다.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또 밤이 되고 아침이 되도록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꺽꺽 운다. 어느 날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 곁에서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다. 그리고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고양이가 백만 번이나 태어나고 백만 번이나 죽었던 것은 중요한 무언가를 몰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고양이가 알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지막 삶에서 고양이는 처음으로 타인의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공감하게 되었으며, 진실한 관계맺기를 하였다. 하얀 고양이를 좋아하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였고 삶에 애착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하얀 고양이가 떠났을 때,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사랑 받음에 고마워하지 않았던 고양이는 하얀 고양이가 자신에게 주었던 행복한 시간들에 감사하며 처음으로 하염없이 울게 된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은 시간이 너무도 소중했구나, 그 시간은 다시 올 수 없는 것이었구나, 나를 사랑해 주었던 무수한 주인들도 이런 마음으로 슬펐겠구나, 나는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모르는 아둔하고 어리석은 삶을 반복했구나하는 회한과 감사와 그리움이 엉킨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사랑이 무얼까 생각해 본다. 얼마전 코로나로 오랫동안 가지 못한 성당에 갔다. 2층에 자리를 배정받아 아래층을 바라보니 동안 보지 못한 신자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마음 속에는 한 명, 한 명에 대한 껄끄러운 감정 한 조각들이 함께 따라 올라왔다. 저 분은 이래서, 저 분은 저래서 왠지 불편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착찹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올라왔다.


'사랑이란 아무 조건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것이구나. 그에게 아무 문제도 없다고, 아무 흠결도 없다고 생각하고 온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구나. 그 마음을 가진다면 상대방은, 나아가 세상은 완전한 것으로 나에게 다가올 것이며 내 마음에는 평화가 흐르겠구나. 사랑은 그런거였어. 티클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는 것. 내 안에 있었던 무수한 비판과 불안과 의심의 눈을 거두는 것…'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어야만 내가 평화와 행복감을 가질 수 있음을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 하셨던 것인가. 그래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으니 말이다.


치유의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상처를 털어내고 나를 온전히 수용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뭔가 제약이 있는 것 같았다. 글쓰기가 버거워지고 과거가 오히려 생생히 살아나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화가 더 올라 오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고,  이상한 집착이 나를 사로잡기도 하는 시간을 지났다. 그리고 내가 참 불행하다는 감정도 느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치유글쓰기가 나의 무거운 감정들을 내려 놓는 좋은 자리를 내어주긴 했지만,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놓아보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항상 미진한 찌꺼기가 남아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피해의식을 벗어나려 하면서도 여전히 환경이 문제였다는 생각도 버리지 못했다. 나에게 삶이란 불안정한 사람들과 불안정한 세상이 빚어내는 불협화음들로 와 닿았기에 마음의 평화가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백만 한 번째 찾아온 단 한 번의 사랑으로 고양이는 이제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되었다. 고양이는 백만 번이나 사랑의 실패를 했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주인들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했고, 감사하지 않았고, 무심한 마음으로 대했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고작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삶인데도 그리 살지 않는가 생각해 본다. 지금 나의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사를 표현하고 따뜻한 표정으로 마음을 나누려 하는가. 항상 불만스런 마음으로 바라보며 책망하지 않았던가 하고 말이다.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고양이가 마지막에 백만 번을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자책과 후회, 미안함 때문일 것 같다. 나도 죽는 순간 이런 마음을 갖지는 않아야 할텐데.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어본다. 이 세상이 모두 온전한 것들로 이루어진 사랑 가득한 곳이라 인식한다면 한 번 뿐인 삶을 살아도 행복하게 살다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백만 번을 살아도 자신에게 소중하고 의미있는 관계가 없다면, 함께하는 이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 삶은 가치가 바래지고 무료한 것이 될 것이다. 쳇바퀴 도는 것처럼 반복했던 과거의 시간들은 나를 사랑하지 않고 타인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나하는 나름의 답을 내며, 이제 그 시간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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