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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상 Sep 15. 2021

내면아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꿈을 깨고나서

2021년 9월15일의 아침

#내면 아이 #아이를 보내며 #사랑으로 #새로운 시작


잠이 오지 않아 힘들게 잠을 청해야 했고 이상한 꿈에 시달리는 지난 밤을 보냈다. 꿈 속에 너무 예쁜 어린 아이를 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동그랗고 하얗고 해맑았다. 근데 누군가 그 아이를 죽였다고 했다. 깨고 나서도 현실로 돌아오기까지 어리둥절한 마음이었다. 너무 생생히 여겨지는 예쁜 아이의 존재가 끔찍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기분이랄까. 아침부터 버벅대는 기분이다. 몸도 마음도 조금 에러가 난 것 같다.


고양이 밥을 주러 휘청거리며 마당에  보니 전날의 사료가 남아있었던 것인지 비둘기 서너 마리가 마당에서 북적거린다. 물을 마시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자기 밥통을 건드리는 비둘기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쪽에서 세상 모르게 꿀잠을 자고 있다. 비둘기가 의외로 무서운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것 보다는 같은 신세의 아이들에게 호의적인 마음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료를 주고 나서도 마음에 걸리는  오히려 나다. 마당에 멀뚱하니 서서 비둘기가 오나 지켜 보았다. 기껏 챙겨  사료를 훔쳐 먹을까 걱정스러워 그런 것이다.  놈이 다시 돌아왔다가 내가 있으니 다시 도망간다. 괜히 손을 휘젓고 있다가 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란 고양이가 우리 마당에 찾아든 것은 재작년 겨울 부터였고 이젠 아예 마당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되었다지만 그새 정이  것인가. 냉정하게 생각하면 똑같은 신세의 고양이와 비둘기를 편먹기 하고 있는 것이다. 비둘기도 밥도 먹어야 하고 목도 마른데 말이다.  이기적인 휴머니즘이 아닌가.


꿈과 현실이 헷갈리는 아침을 보내서인가. 늦잠을 자서인가. 마음이 붕 떠 있는 것 같다. 태풍이 온다더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하늘은 가을가을 하고 햇빛은 쨍하니 빛나는 늦은 아침. 멍하니 창 밖을 보게 된다.


참 해맑지만 아이같은 내가 있었다.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 버겁고 싫었던 고지식한 아이. 부모는 나를 지켜주어야 하고, 세상은 나를 위해 움직여야 하고,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목말랐던 아이. 그 고지식함이 자신을 옥죄어 세상이, 부모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인생이란 평화로워야 하고, 행복해야 하고, 좋은 것들로 넘쳐야 한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의 바람을 벗어나는 일들을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나를 격랑에 흔들렸던 존재로 느끼며 순수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그리워 했다. 그런 아이가 이젠 죽어야 함을 자각하고 있다.


사랑이란  세상과 타인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이라는 자각과 함께 그것이 나에게도 평화로움을 준다는  깨달았다. 누가 옳은지를 따지거나  논리성을 찾는 것을 멈추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자비이고 사랑이  거라는 생각이다. 나를 고집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가 그렇게 못할 때면 고독이 몰려오는  경험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아이가  안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세상을 떴다는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예쁜 아이는 내가 애지중지 했던 에고와 고지식함이 아니었을까.


나름 해몽을 해 본다. 이제 나 중심의 사고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며 이별을 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해맑은 아이같은 나를 보내고 타인을 배려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어른으로 나아가는 내가 되어야 하는 때가 온 것 같다. 이 정도의 성장을 하기에도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상처받은 내면아이가 이제 안녕을 고해주고 있어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과거를 붙잡고 상처를 붙잡고 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다. 지긋지긋해서가 아니라 내가 더 큰 사람이 되기 위한 마음으로 보낼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쁘다.


2021년 9월 15일의 아침은 다른 날보다 더 힘들고 멍하게 시작되었지만 각별한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장하고 웅장하다. 답은 내 안에 있었는데도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와 화해하고 한 발짝 나아가기가 참 어려웠다. 이마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면 나는 아이인채 죽는 꼴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쁜 아이였고, 어리숙한 아이였던 내 안의 아이를 보내며 비로소 성인이 되려는 나를 응원해 본다. 성인으로써 펼쳐야 할 인생의 청사진을 그려보아야 한다는 숙제를 마음에 담아보며 늦은 아침의 넋두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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