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집살이는 힘겨웠다. 여느 시집살이처럼 육체적으로 힘들고 감정적으로도 힘들었다. 시집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면 엄마의 시댁 식구들 이야기를 써야 하는 이유로 많이 망설였다. 엄마의 시댁 식구들은 아빠의 부모이고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기 위해 노력했고 내 감정으로 조금 섞었다. 같은 이유로 이 이야기를 써야만 했다. 엄마 인생에서 시집살이 부분은 지분이 꽤 크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시집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30이 넘어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속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특히나 본인이 힘들었던 이야기는 더더구나 하지 않았다. 내가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되고 난 후 같이 육아하면서 엄마의 이야기는 조금씩 시작되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선보고 한 결혼이기에 아직 남편도 낯설었을 텐데 시부모는 그런 새색시에게 괜한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 흔히들 할머니들이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쓰면 책으로 몇 권을 될 거야.”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만큼 대다수 할머니는 말 못 할 사정을 안고 살아왔다. 엄마의 사정도 그 할머니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진 않았다.
“임신했을 때 먹고 싶은 거 못 먹으면 평생 한이 된다.”는 말이 있다. 엄마는 이 임신기간에도 임산부의 특권을 전혀 누리지 못했다. 엄마는 일명 ‘먹덧’이었다. 쌀이 익어 밥이 되는 순간 나는 냄새와 김치 냄새만 싫고 그 외의 모든 것이 다 먹고 싶었다고 했다. 하루는 퇴근하는 아빠와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는데 할머니가 알고 노여워할까 염려해 아빠는 말을 아꼈다고 했다. 할머니는 엄마가 뭐라 이간질했기에 아빠가 할머니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서 화를 버럭 내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고 했다.
또 보신탕이 너무 먹고 싶어 엄마는 혼자서 보신탕집에 가서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임산부가 혼자서 너무 힘겨운 ‘먹덧’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엄마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다. 그때 나는 엄마와 함께 있었다. 엄마 뱃속에. ‘먹덧’의 원인은 나일 수도 있었다.
엄마는 할머니의 등쌀에 먹고 싶은 고기만 못 먹는 게 아니었다. 모든 움직임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시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24시간은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고 임산부인 엄마는 제대로 영양을 섭취할 수 없었고 쓴 위액을 토해내기 일쑤였다. 엄마가 힘겨운 임신기간을 보내고 있는 걸 알고 조금 떨어진 동네에 살던 이모가 엄마에게 분유를 한 통 사다 주었다. 나는 엄마가 분유로 간신히 섭취하는 영양을 받아먹으며 자라고 있었다.
아빠의 작은 어머니가 엄마에게 전해준 이야기가 제일 마음 아팠다. 임신 초기에 할머니가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친정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특별한 일, 예를 들어 친정 부모님 생일이나 병환 등이 없으면 친정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괜히 친정 나들이를 할 수 없어 가지 않았다. 얼마 뒤 아빠의 작은 어머니는 이런 말을 전했다.
“자네가 친정에 가지 않아서 형님이 사골을 끓이지 못했네. 자네 먹는 것이 아까워 자네를 친정에 보내고 사골을 끓여 먹으려고 했다네.”
객식구여도 이런 대우는 받지 않은 것이다. 하물며 자기 핏줄을 품은 며느리에게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게 사람 아닐까. 엄마는 평생의 한이 될 이 이야기들을 자신의 손자들(강물이와 마이산)의 이유식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해주었다. 이 이야기들을 들으며 나는 자연스레 내 임신 기간을 떠올렸다.
내 임신은 양가 부모님 모두가 기다렸다. 나와 남편은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집 평수도 늘리고 학원도 확장하고 안정기에 접어들면 그때 아이를 가지자고 약속했었다.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양가 부모님들은 마냥 기다리기만 하셨다. 나는 그 기다림을 체감하지 못했다. 시부모님은 혹여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까 봐 지나가는 말로도 임신에 대한 이야기는 묻지도 않으셨다.
“나는 몸이 약해 아이를 봐줄 수 없다.”라고 여러 번 말했던 친정엄마가 “내가 봐줄 테니 얼른 낳아라.”라고 말을 바꾸었다. 꼭 그 말 때문에 아이를 가진 건 아니지만 나는 그해에 임산부가 되었다.
2008년 구정 며칠 전 테스트기를 통해 검사했는데 두 줄이었다. 확실해져야 명절에 발표할 수 있으니 산부인과 진료를 받았다. 아직 안정기에 접어들지 못해 그 해 명절에는 결혼 후 처음으로 시댁에 가지 못했다. 그 후 임신 사실을 알아서였을까 나는 입덧을 시작했다. 처음엔 김치 냄새가 싫었고 곧이어 누군가 냉장고를 열면 나는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점점 역해졌다. 입덧은 강도가 점점 세지고 나는 산송장이 되어갔다.
드라마에 나오는 입덧은 가짜였다. 어느 순간에만 역한 게 아니라 24시간 중 잠들어 있을 때만 제외하고 끊임없는 뱃멀미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더 역한 냄새가 느껴지면 나는 화장실로 달렸다. 결국 산부인과에 입원했는데 입원한 날 알았다. 내 자궁 속에는 아기가 2명 있었다. 세포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유별난 입덧이 생길 수 있다고 의사는 말했다.
입덧은 강도만 약해졌고 마지막 달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거리를 걸으면서 누군가의 엄마로 여겨지는 모든 여성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내가 힘든 임신 기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남편, 시부모님, 그리고 우리 엄마였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수발을 들어준 남편은 아이 아빠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고마웠고 물심양면으로 내가 먹고 싶은 걸 챙겨준 시부모님에게도 감사하다.
가장 큰 힘은 엄마였다. 강물이 와 마이산은 세포 시절부터 엄마의 희생으로 자랐다. 나는 그때 엄마가 젊다고 느꼈다. 그랬기에 엄마가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엄마는 우리 집 가까운 곳으로 이사했고 가구를 바꾸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데 필요하고 안전한 물건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한 번은 엄마 집에서 복숭아를 먹는데 벌레가 있는 흔적이 있는 조각이 있었다. 나는 혼잣말로 “여기 벌레가 있을 거 같은데.”라고 했고 주방에 있던 엄마는 그 말을 들었는지 달려와 그 조각을 가져갔다. 벌레 보고 놀라면 안 된다면서.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인데 나의 임신기간 내내 나는 과잉보호를 받았고 나는 엄마와 더 가까운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다시 엄마의 시집살이로 돌아가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신이 엄마에게 줘야 하는 행운을 깜박했고 그게 미안한 신이 딸인 나에게 모두 몰아서 줬다고. 그래서 나는 아주 따스한 시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고 여긴다. 결혼 초기에는 내가 잘 사는 게 부모님을 위한 거리는 어이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위해 줄 때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아 육아하면서 크게 힘들지 않았다. 그저 엄마라는 게 너무 행복하다.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또 엄마가 되고 싶다. 이번 생에서 나는 엄마 노릇을 제법 잘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기에 다음 생에 또 엄마가 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친정엄마를 나의 딸로 낳고 싶다. 나는 또 엄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