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은경 Oct 28. 2022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필요했어요

강물이와 마이산은 올해(2022년) 15살이다. 사춘기의 정점을 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키우며 또래 엄마들을 만나면 자연스레 갱년기 이야기로 화제는 넘어간다. 여러 갱년기 증상들을 들으며 나는 엄마가 겪고 있는 증상이 이해되었다.

     

언제부턴가 엄마는 잠을 잘 오지 않는다고 했다. 언제든지 자려고 누우면 쿨쿨 잘 자는 나는 이해를 못 했다. 엄마의 불면증은 점점 심해졌고 며칠씩 이어지기도 했다. 나는 수면제를 처방받아 너무 힘들 때 먹어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엄마가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속에 있는 화 때문이었다. 예전에 할머니와 살면서 겪었던 시집살이가 문득문득 떠오른다고 했다. 원망하기 위해 일부러 떠올리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엄마도 모르게 생각난다고. 그러면 그날은 잠이 들 수 없다고.

     

그때 나는 막 글쓰기를 배우고 있었다. 글을 쓸 때는 좋은 일을 기록하기도 하지만 힘든 일 상처가 되었던 일을 쓰면 힘이 되고 치유가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엄마에게 그런 일들이 생각나면 적어보라고 했다. 엄마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었고 나는 어떻게든 엄마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곰곰이 며칠을 생각하다가 나는 엄마에게 권유했다. 할머니와 터놓고 예전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할머니가 진심으로 “미안하다”, “나도 그때는 시어머니 노릇이 처음이었다.”라는 말을 해주면 엄마의 상처받은 마음이 조금은 풀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엄마는 아주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내 말을 받아들였다. 짐작건대 할머니를 만나는 상황을 생각하고 할 말을 정하는 과정은 엄마에게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 일요일 엄마와 아빠를 할머니 댁에 모셔다 드리고 나와 남편은 강물이와 마이산을 데리고 근처 공원에서 2시간 조금 넘게 기다렸다. 엄마를 다시 태우러 갔을 때 엄마는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나는 바로 질문하지 않고 기다렸다. 며칠 뒤 들은 대답은 실망이었다. 할머니는 청문회에 참석한 정치인도 아닌데 연달아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다.”로 일관했고 끝내는 “그래, 인제 와서 어쩌란 말이냐. 내가 잘못했다고 빌어야 하냐?”로 역정을 냈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가 “그래, 나도 자세히는 생각이 안 나도 내가 그랬다면 미안하다. 이제 너도 잊어라.”라고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엄마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벼워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이번 일을 기획했다.

     

그 후 몇 년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눈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와 살갑게 지내지도 않았지만 철이 들 무렵부터 엄마의 삶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할머니가 수의 입은 모습을 봤을 때 할머니에게 속으로 말했다.

     

“왜 그러셨어요? 조금만 더 이해하고 보듬어 주셨으면 할머니도 엄마도 모두 가벼워졌을 텐데요.”

     

나는 책 모임과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내 미래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내 꿈 중 하나는 현명하고 자애로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심이 많아야 하고 내가 잘못한 일은 상대가 누구든 내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꼭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전 10화 훨훨 나는 새처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