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요양보호사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녀는 그곳의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집에 가야 돼." 할머니들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한 밤중에 홑이불을 보자기 삼아 자신의 옷가지와 기저귀 등을 챙긴다고 했다. 지금은 밤이어서 식구들이 다 잠들어 있으니 낮에 가자고 달래면 할머니들은 "집에 가야 돼."라고 반복해서 되뇌면서 잠든다고 했다. 할머니들은 왜 집에 가고 싶어 했을까. 나는 그 이유에 깜짝 놀랐다. 할머니들은 남편과 아이들의 밥걱정에 집에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밥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 길래 할머니들은 현재에도 그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걸까.
나는 18년 차 주부이면서 16년 차 워킹맘이다. 신혼 시절에는 밥이 큰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되어서야 끼니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체감했다. 신생아 시절에는 시간 맞춰 분유를 타주면 되지만 이유식을 시작하고 나는 난생처음 요리의 벽에 부딪혔다. 다행히 친정엄마가 육아의 대부분을 도와주어 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고 아기들도 맘껏 예뻐할 수 있었다. 워킹맘이지만 내가 하는 집안일은 빨래 정도였다. 청소는 남편이 도맡아 하고 아기들 이유식은 친정 엄마가 맡았다. 나는 이유식 먹는 아기들 옆에서 큰소리로 칭찬해 주고 대견해하기만 하면 되었다.
직업이 학원운영이라서 일 년에 4번 시험기간을 가진다. 학교별 일정에 따라 4주에서 6주 정도 걸리는데 이 시기에는 아기들의 식사를 지켜볼 수가 없다. 아기들도 이 시기에는 엄마가 늦으니 투정이 심해졌다. 나는 퇴근해서 더 밀도 높게 아기들을 안아주고 사랑해 주며 이 시기를 견디어냈다. 아기들은 자라면서 자신의 식성을 가지고 표현할 줄도 알았다. 남편과 나는 점점 우리 식성을 잊어갔고 아이들 식성에 맞는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흘러 중학생이 된 아이들과 시험기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나의 요리실력은 일취월장하였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첫 소풍을 가던 날, 나는 김밥 도시락을 고민 중이었는데 나 같은 엄마들이 많다는 걸 알고 위로받은 적이 있다. 그 위로는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김밥틀이라는 게 있었다. 김밥 모양의 플라스틱 틀에 밥을 적당량 넣고 속재료를 넣고 다시 밥을 넣고 뚜껑으로 꾹 누르며 김밥 모양이 되는 신기한 물건이었다. 나는 이 틀로 첫 김밥 도시락을 완성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금 나는 김밥 달인이다. 10줄에서 12줄 정도의 김밥을 싸는데 1시간이면 충분하다. 첫 김밥의 속재료는 햄 하나였지만 지금은 햄, 계란, 단무지, 오이, 깻잎, 당근, 유부, 치즈등 김밥이 두툼하다. 아이들의 취향을 반영해 돈가스 김밥이나 참치마요 김밥도 가능하다.
시험기간이 되면 나의 퇴근시간은 오후 10시이다. 당연히 저녁밥을 먹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간단한 군것질로 때우곤 했었다. 그때는 젊었을 때이니 괜찮았는데 지금은 남편과 나 둘 다 몸이 점점 나빠졌다. 아이들과 시험기간을 공유하면서 아이들 도시락을 준비해야만 했다. 급식 시대에 도시락을 싸다니. 나는 푸념을 하면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편과 내 것까지 준비하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아이들과 학원에서 같이 도시락을 먹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남편과 나는 올빼미 족이다. 우리에게 아침밥은 모닝커피를 뜻한다. 하지만 성장기의 아이들은 그러면 안 되기에 아이들 아침밥은 꼭 챙겨주었다. 쌍둥이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면서 동시에 엄마 아빠가 식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아이들이 어린이였을 때 아이들 먼저 먹이고 우리 부부는 나중에 먹었다. 퇴근시간이 늦어지면 또 따로 먹었다. 주말에 배달 음식을 먹거나 외식할 때, 특별 보양식을 해 먹거나 여행 중에 밥 먹을 때를 제외하고 아이들과 우리 부부는 따로 밥을 먹었다.
더루나 나는 혼자서도 잘 먹는다. 혼자 있다면 끼니를 대충 때우지 않고 먹고 싶은 걸로 잘 챙겨 먹는 편이다. 문제는 먹고 싶은 음식이 매번 건강식이 아니라는 점이지만. 시험기간에 몸이 힘들면 쉬는 날 보양식을 잘 챙겨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혼자 먹는 걸 괜찮아했기에 같이 먹는 밥이 힘이 된다는 걸 몰랐었다. 남편과 아이들과 같이 학원에서 도시락을 먹던 날, 오물 거리며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바쁜 입을 바라보면서 먹는 밥은 특별한 반찬이 아니었지만 보양식 못지않게 내 몸 안에 에너지를 가득 채워주었다.
도시락 메뉴는 한정적이다. 김밥에는 컵라면, 볶음밥에는 계란국이나 갈비탕, 제육볶음에는 미소된장국, 계란말이와 두부부침에는 김치찌개, 강된장에 오이와 고추장. 이런 간단한 음식에 나와 남편의 위 건강도 안정을 찾아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에너지도 급속 충전이 된다. 정말 피곤한 날에는 햄버거나 다른 배달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에너지 충전에는 이상 없다.
이제 시험기간은 중반을 조금 넘어섰다. 여느 시험 기간이었으면 나는 방전 직전이겠지만 이번엔 다르다. 시험 기간에 도시락을 먹는 경험은 가족 모두에게 새로운 경험이다. 같이 밥을 먹어서 식구라고 한다는 말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우리 가족은 진정한 식구가 되었고 이 시간에 나는 급속으로 풀 충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