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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은경 Oct 20. 2023

필수영양소 충전불가

40대 직장맘의 자가충전

강물이와 마이산은 TV에서 맥주 광고가 나올 때마다 "한 번 먹어보고 싶다."를 연발했다. 나는 쿨한 엄마니까 무알코올 맥주를 바로 사주었다. 시원한 맥주를 cf처럼 마신 강물이와 마이산의 표정은 실망이 가득했다.


"뭐야, 엄청 시원할 거 같았는데."

"탄산이 강력한 음료수 같았는데. 써. 맛없어."


강물이와 마이산의 맥주 시음은 이렇게 끝났다. 눈으로 보는 것과 마셔보는 것의 큰 차이를 실제로 경험한 아이들을 보며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막내 고모가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따라갈 기회가 있었다. 나는 그때 커피 반 잔을 내 몫으로 받았다. 커피를 실제로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내 몫으로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커피는 진한 검은색이었다. 내가 그동안 봐왔던 커피는 분명 갈색이었는데....라고 생각하며 고모를 따라 설탕을 2스푼 넣었다. 열심히 저어 설탕을 녹였지만 커피색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있겠다는 다짐을 받고 내 몫의 커피를 얻었기 때문에 고모와 친구의 대화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내 딴에는 설탕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하고 몇 스푼 더 넣었지만 커피색은 여전했다. 나중에 알았다 설탕이 아닌 프리마를 넣어야 커피색이 변한다는 것을.


중학생이 되자 학교에 매점이 있고 매점 안에는 자동판매기가 있었다. 부모님이 없는 학교에서 나는 친구들과 커피를 마시며 어른 행세를 자주 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자판기 밀크커피는 어른의 맛이었다. 일찍 등교한 아침이나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학교에서 마시는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그때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학교 교실을 개방해 주어 독서실처럼 공부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된 나는 자판기 커피를 마시기보다 커피숍에 더 자주 갔다. 블루마운틴과 헤이즐넛이 커피의 향으로 분류된다는 것도 모르고 다른 종류의 커피인 줄 알던 시절이었다. 소개팅할 때는 카페라테를 마시기도 했다. 그때는 커피 맛보다는 그 시간과 장소의 분위기를 마셨는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어 일을 하면서 더 이상 커피는 분위기, 여유와 다른 말이 되었다. 커피는 카페인이었다. 눈 뜨면 마셔야 하고 식사 후에 당연히 마셔야 하는 필수 영양소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건강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고 느껴 블랙커피와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육아하면서 아기들을 재우고 먹는 바삭바삭한 봉지 과자와 찰떡궁합인 음료도 나에게는 커피였다.


커피에 프리마를 넣어야 한다는 걸 몰랐던 초등학생, 자판기 밀크커피를 마셨던 학창 시절, 카페인이 필수 영양소라고 여기며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현재까지 커피의 변천사만큼 나도 자랐고 찬란한 청년 시절을 넘기고 노화가 진행되고 있다. 예전에 어른들이 20대에는 시속 20km, 30대에는 시속 30km, 40대에는 시속 40km로 나이가 든다고 이야기했을 때 코웃음 치던 나를 반성한다. 그때 그 말을 귀담아들었다면 지금의 내 신체 나이가 조금은 달라졌을 테니까.


20대까지는 아주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지만 감기에 걸려도 2~3일 앓으면 훌훌 털고 일어났었고 체중이 2~3kg 늘었을 때는 약간의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제 몸무게를 찾았었다. 아이 낳기 전에는 그랬었다. 벌써 15년이 넘게 써먹는 변명이지만 쌍둥이 출산이 그 이유이다. 배 속에 있는 아기들을 지키려고 내 몸무게 따위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원래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기에 육아하면서 운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이젠 감기에 걸려도 회복하는 기간이 꽤 길다. 이번 감기는 최장 투병 기간을 초래했다. 현존하는 감기 증상은 모두 내 몸을 거쳐갔고, 감기 바이러스가 눈병까지 동반한다는 걸 40년 넘게 살면서 처음 알았고 겪었다. 제일 큰 문제는 입맛이 없어져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는데 몸무게는 며칠째 그대로이고 두 번째 문제는 입에서 24시간 쓴 맛이 느껴져 커피를 마실 수 없었다. 숨을 쉬면 공기에서도 쓴 맛이 느껴졌다.


그동안 커피를 너무 물처럼 자주 마셔서 그 양을 조절하라고 벌을 받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카페인 충전을 한다고 커피를 마시지만 여유 있게 마신 적이 점점 그 횟수가 적어졌다. 나는 나를 충전시키려고 커피를 마셨는데 가짜 충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휴대전화를 쓸 때 알았다. 배터리의 수명이 다해지면 충전시간이 짧아지고 그만큼 방전되는 시간도 짧아졌다. 내 몸이 수명이 거의 다한 배터리처럼 느껴졌다. 서비스센터에 가서 "새 걸로 교체해 주세요."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아직 그만큼의 기술이 발전되지 않았기에 스스로 교체를 해야만  한다.


뭘 빼내고 뭘 집어넣어야 할까. 얼마 전 봉지 과자 대신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진짜 충전을 하는 거라고 느끼고 그 체험을 길게 해 볼 틈도 없이 감기에 걸려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 답은 정해졌다. 이 감기에서 회복하면 꼭 반드시 스트레칭을 비롯해 틈틈이 운동을 해야겠다. 내 체력으로 새로운 운동을 할 순 없으니 유튜브에 나와 있는 스트레칭을 따라 하고 초보자용 근력운동을 따라 하다 보면 내 몸속의 배터리도 서서히 진짜 충전을 하지 않을까.


나는 미래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도서관에서 카페에서 커피 마시면서 책 읽고, 글 쓰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노안이 가장 큰 복병이라고 느꼈는데 커피를 마실 수 없게 되자 넘어야 할 산을 만난 것 같다. 큰 산이 아니라 작은 동산이었으면 좋겠다. 고소하고 쓰고 조금은 시큼한 커피 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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