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커가면서 여행에 변화가 생겼다. 아기 시절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별별 물건을 다 챙겨 다녔다. 아기들이 어린이가 되고 청소년이 되면서 여행 가방은 나이에 반비례하며 간소화되었다. 다른 하나의 큰 변화는 여행의 목적이다. 신혼시절에 다니던 여행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우리 부부가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여행의 목적 역시 정해두고 다니진 않는다. 그 순간의 즐거움, 감동, 기분, 날씨, 음식 등이 여행에서 얻는 것들이다. 정해진 일정대로 여행을 다니진 않았지만 아이들이 자라고 특히 중학생이 되면서 학업이 지친 아이들을 위해 여행의 목적은 휴양으로 뚜렷해졌다.
여행 준비는 방문할 도시와 숙소를 정하면 그게 다이다. 고속도로 또는 국도를 달리면서 뭘 먹을지 정하고 숙소에 비치된 안내 책자를 보면서 방문할 장소를 정한다. 그럼 맨 처음 도시를 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족 중 누군가가 "옥정호에 붕어섬이 생겼대. 거기 가보고 싶어." 하면 그다음 여행지는 옥정호가 된다. 또는 "전에 남원에 갔을 때 좋았는데, 한 번 더 가고 싶다."라고 하면 그 다음날 여행지는 남원이다. 이렇게 이번 여름 여행지가 정해졌다.
일상에서 지친 우리 가족은 재충전이 필요했고 하루 이틀로 풀 충전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휴가기간 전부를 여행기간으로 정했다. 우리 가족만 떠나는 여행에는 아무도 정하지 않은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하루에 방문하는 장소는 하나, 가고 싶은 장소가 많을 때에도 하루에 두 곳을 넘지는 않는다. 그럼 남는 시간에는 무엇을 할까? 따로 또 같이 쉰다.
숙소를 정할 때에도 한 곳 이상은 반드시 복층 구조를 가진 곳으로 정한다. 우리 부부는 1층에 아이들은 2층으로 정해져 있다. 이번 숙소를 정하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여행 가면 뭐가 좋아? 우리는 별 특별한 걸 하지는 안잖아."
"차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기분이 좋아."
"아침에 잠에서 깼을 때 집이 아닌 다른 곳이라는 느낌이 좋아."
"숙소에서 보는 창밖 풍경이 좋아."
결국 우리 부부를 비롯해 아이들마저 체험보다는 휴식을 더 좋아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낯선 곳에 방문하면 나도 처음이기에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가야 할 길, 봐야 할 것들을 찾기에 바쁘다. 더 이상 아기가 아닌 청소년들은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다. 누가 남자아이들이 과묵하다고 했나. 양쪽에서 들리는 변성기 목소리에 내 귀는 여행 내내 혹사당한다.
내 귀가 쉴 때도 있다. 숙소에 들어오면 청소년들은 2층 숙소를 올라간다. 간식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둘이서 놀거나 친구들과 통화하면서 논다.
그럼 우리 부부는 나란히 누워서 TV를 본다. 여행 와서 뭔 TV를 보냐고 할 수 도 있지만 여행지에서 보는 TV는 유난히 재밌다. 요즘 TV는 유선채널에서 현재 방송 중인 프로그램과 예전에 했던 프로그램이 섞여서 나온다. 우리는 취향대로 골라 볼 수 있다. 나와 남편이 과자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TV에 나오는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깔깔 웃고 있는데 화장실 가던 강물이가 이렇게 말한다.
"그거, 일 년 전에 했던 거야."
일 년 전이면 어떻고 십 년 전이면 어떤가. 우리는 즐겁게 푹 쉬고 있다.
남원에서 김병종미술관에 방문했다. 5년 전 어린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에는 임시개관 중이었던 박물관은 어린이가 청소년이 된 우리 집 아이들의 변화만큼 성숙해져 있었다. 미술관에 막 들어섰을 때 큐레이터 설명이 10분 후에 시작한다는 알림을 들었다. 나는 설명을 들으며 관람하는 걸 좋아하지만 우리 집 남자들은 모두 싫어한다.
아이들이 어린이였을 때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남편도 참고 같이 설명을 들었다. 청소년이 된 아이들은 자신들의 주관을 뚜렷하게 표현하기 시작했고 남편도 덩달아 같이 표현한다. 나는 혼자서 큐레이터를 따라다니기로 하고 남자들은 자유 관람을 하기로 했다. 옆에서 딴짓하던 아이들을 관리하지 않아도 되니 나는 큐레이터의 목소리에 편안하게 집중할 수 있었다. 자유 관람을 마친 남자들과 미술관 카페에서 다시 만났는데 역시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가족 여행이라고 꼭 단체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각자 감명 깊었던 그림을 얘기했는데 놀랍게도 모두 같은 그림이었다.
광한루에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도령과 성춘향은 청소년의 관심을 얻지 못했다. 한낮에는 햇볕이 너무 뜨겁고 사람이 북적대는 걸 싫어하는 우리 가족은 광한루가 폐장한 시간에 방문했고 산책을 하려 방문한 곳에서 의외의 선물을 받았다.
연못에 잉어가 정말 많이 있었다. 많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잉어들 중 독보적으로 컸다. 어떤 청년이 잉어 먹이를 손에 쥐고 오리에게 먹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오리는 강아지가 주인 손에 있는 간식을 먹는 모양새로 모이를 먹고 있었다. 비둘기나 참새만 보면 만지고 싶어서 뒤따라 다니는 마이산은 그 모습이 감명 깊었었나 보다. 잠들기 전에 다음날 광한루에 다시 가자고 했다.
다음날 마찬가지로 광한루가 폐장한 저녁시간에 잉어 먹이를 사서 오리를 유인했다. 오리들은 먹이를 먹으며 따라왔지만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들의 안전거리가 정해있는 것 같았지만 마이산은 속이 탔다. 검지손가락으로 머리만 살살 만져보려던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제의 오리는 어디로 갔는지 여러 마리의 오리에게 먹이를 주었지만 모두 먹이만 먹고 떠나갔다. 상심하는 마이산에게 강물이가 한 마디 했다.
“강물이도 배가 고파. 강물이한테 밥을 줘.”
여행 중에는 화도 잘 나지 않는다. 먹고 싶었던 메뉴를 찾아간 식당이 문 닫았을 때는 옆집으로 들어간다. 육사시미를 사면서 받은 양념장을 마트 카트에 두고 왔을 때에도 참기름과 소금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면서 맛있게 먹는다. 해야만 하는 일이 없는 하루하루는 정말 나른하고 즐겁다. 여행 중 우리가 분주할 때는 체크아웃해야 하는 날 아침 10시 30분부터 11시까지이다.
어떤 일을 하던지 다시 또 하고 싶어지면 그 일을 만족스러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항상 다음 여행을 이야기한다. 끝나가는 여행이 아쉽기도 하지만 만족스럽기에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 따로 또 같이 한 이번 여행은 나와 우리 가족 모두가 더운 여름을 이겨낼 시원함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