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큰 형님의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전까지 내가 장례식장에서 겪은 죽음은 나이가 들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그것이었다. 큰 형님의 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항상 옆에 있지만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는 공기처럼 부모님의 존재도 나에게는 당연했다. 그동안 부모님의 부재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작년(2022년) 여름, 엄마의 건강검진 결과서를 받았다. 뇌혈관에 꽈리가 생겼다고 2차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엄마는 결과지를 받고 며칠 고민하다가 나에게 가져왔다. 그날 병원에서는 2차 검진을 서두르라는 전화연락이 왔다고 했다. 꽈리는 엄마의 뇌 속에 있는데 내 머릿속이 하얘졌다. 정신을 차리고 병원을 예약했다. 관련 지식이 없어 지인들에게 많은 문의를 했는데 답변과 함께 따듯한 위로와 격려가 따라왔다. 용기를 얻은 나는 태연하게 별일 아니라는 듯 엄마를 위로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조형술 그거 별거 아니래. 약물을 혈관에 넣고 약물이 잘 이동하는지 살피는 거야. 엄마는 한숨 푹 자고 나면 괜찮을 거야."
내가 가진 조형술에 대한 지식은 '슬기로운 의사생활'이란 의학 드라마에서 얻은 지식이 전부였다. 드라마 속의 의사들은 조형술이 별거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었고 나 역시 그런 줄 알았다.
실제는 달랐다. 허벅지 안쪽의 큰 혈관을 통해 약물이 든 기기를 삽입하고 심장 위쪽의 혈관부터 약물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혈관의 출혈이 많아 지혈을 위해 모래주머니를 4시간 동안이나 출혈 부위에 올려 두어야 했고 마취가 풀리면서 통증이 시작된다는 간호사의 설명은 엄마에게는 두려움을 나에게는 걱정을 유발했다.
또 한 가지, 입원실에 있는 엄마의 침대 위에는 이름과 나이가 적혀있었는데 그 숫자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친정이 가까워 일 년 365일 중 거의 300일 이상 엄마를 매일 만났다. 매일 만나면서도 나에게 엄마의 나이는 항상 60세 언저리였다. 엄마가 나이 들었다는 게 너무 낯설어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조형술을 받아야 하는 엄마에 대한 걱정과 나이 든 엄마에 대한 낯섦에 나는 그날 무척 혼란스럽고 슬펐다.
다행히도 꽈리의 위치는 비교적 안전한 곳이었고 크기 또한 그리 크지 않아서 경과를 지켜보면 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때는 엄마가 걱정되고 너무너무 소중했기에 한동안 나는 살가운 딸이 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원래의 딸이 되었다.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시댁에 간다. 아이들이 아장아장보다 조금 더 잘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 다녔으니 꽤 오래 다녔다. 매주 만나는 시부모님도 당연히 시간이 지나면서 나이 듦이 당연하지만 매일 만나는 친정엄마의 경우처럼 체감하기는 어려웠다. 올해(2023년) 늦봄부터 시어머니는 자꾸 아팠다. 그 나이까지 제한 없이 사용한 관절이 아픈 건 당연했다. 문제는 손을 떠는 증세와 어지럼증이었다. 시골 병원에서는 일주일 입원하면서 링거를 맞으면 나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의사는 말했다고 했다. 우리는 그런 줄 알았다.
병원에 입원 중인 시어머니와 같이 식사하기 위해 만났는데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나흘 만에 시어머니는 달라져있었다. 걸음걸이도 방향감각도 말투도 모두 달랐다. 어머니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고 식사를 마치고 병실에 모셔다 드렸다. 뒤돌아 나오면서 나와 남편은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어머님, 이상하지?"
"엄마, 이상하지?"
괜한 입방정이 될까 봐 우리 둘은 더 이상 머릿속의 생각을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퇴원을 하고도 증세는 나아지지 않고 가족회의 끝에 큰 병원으로 모시기로 했다. 이전 병원에서 촬영한 MRI영상을 가져갔는데 뇌혈관에 꽈리가 있다고 바로 조형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아, 조형술. 나는 작년 여름이 떠오르면서 걱정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머님 증상은 손을 떠시고 자꾸 어지럽고 주무시려고 했다. 항상 TV를 켜두고 요즘 나오는 젊은 트로트가수 보는 걸 좋아했는데 TV도 보시지 않았다. 우리와 이야기하는 것도 자꾸 의도적으로 피하시고 방으로만 들어가려고 하셨다. 묻는 말에 다른 대답을 하시고, 몇십 년 동안 잘하시던 음식의 간도 달라졌다. 속상한 아버님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시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우리 형제들은 모두 걱정하며 속상했다. 나와 남편은 더 했다. 매주 만나면서도 왜 전조 증상을 못 느꼈을까. 걱정과 죄책감이 합해진 마음속은 끝없는 구렁텅이 같았다.
"어머님, 조형술 힘든 거 아니에요. 마취 끝나면 조금 아프긴 할 텐데요. MRI에서 보인 꽈리가 막상 조형술 하면 더 작거나 꽈리가 아닐 때도 있대요. 너무 걱정 마세요."
나는 친정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태연을 가장하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다행히도 조형술 결과는 꽈리가 아니라 기형혈관으로 밝혀졌다. 그날 가족 모두 얼마나 감사하고 안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치매 전 단계여서 약 복용을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동안 나이 탓으로 돌렸던 행동의 변화가 단순한 노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시어머니의 증상은 점점 나아졌다. 지금은 거의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셨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 시가에서는 여자들만 모여 여행을 가곤 했었다. 마지막 여행을 한 지 벌써 4년이 훌쩍 넘었다. 그때에도 시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체력을 제치고 항상 앞장서 걸으셨다. 비록 목적지를 모르셔서 갈림길에서 우리를 돌아보셨지만. 새로운 음식을 접해도 맛있게 드시고 영화, 연극, 뮤지컬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재밌게 즐기던 모습이 생생했다. 영화 <달짝지근해:7510> 포스터를 보고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이런 영화 좋아하셨는데......
일요일마다 시댁에 갔지만 지난주에는 토요일에 갔다. 시아버지와 토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일요일에 영화 <달짝지근해:7510>을 보고 돈가스를 먹고 군산 근대거리를 구경했다.
"졸릴 줄 알았았는데 영화가 재밌어서 하나도 안 졸렸다."
"큰언니(큰 딸) 고등학교 졸업할 때 돈가스 먹어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맛있었다."
"박물관가지 말로 여기(카페)에 더 있자. 시원하고 좋다."
시어머니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도 잘 대답해 주시고 먼저 이야기하시기도 했다. 예전만큼 걷지는 못하셨지만 "앉아있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라고 말씀하시며 카페에서 바닐라 라테를 즐기셨다.
"70 될 때랑 80 될 때는 달랐다. 이제 나는 언제 죽어도 괜찮아. 너희들 다 키웠고 다 결혼시키고 살만큼 살았다."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셔서 나는 당황했다. 남편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나에게만 하신 말씀이다. 어머니는 우리를 키우고 결혼시키려고 태어나신 게 아닐 텐데. 아마도 당신의 병이 우리에게 짐이 될까 우려하셨을까. 나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냐고. 이제부터 더 좋은 거 드시고 보시고 즐기셔야 한다고 말은 했지만 진정 위로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어머님의 치매증상이 의심될 무렵, 나는 마이산에게 물었었다.
"엄마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떡할 거야?"
곰곰이 생각하던 마이산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여러 번 계속해서 이야기해 줄게. 대신 절대로 큰 소리로 말하거나 혼내지 않을게."
내가 앞으로 두 어머니에게 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계속해서 반복해서. 좋아하시는 거 맛있어하시는 거 찾아서 기억하고 같이 하기.
어머님의 약 처방전을 보다가 알았는데 치매약 이름이 '정신부활약'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약을 드시고 어머니의 기운과 즐거움이 부활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