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버텨가는 버거움
어려서부터 말하기를 좋아해서일까.
아이의 말은 4살 무렵부터
그야말로 폭풍 성장의 속도로 늘었고,
그 때부터였던 거 같다.
아이의 말에서 버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내공이 바닥이 보일 정도로 부족함을
매일 매일 느끼며 버티고 버티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4살인데 이 정도면...
아이가 사춘기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내 안의 힘이 필요했다.
아이의 변화무쌍한 성장 앞에서도,
아이의 예측할 수 없는 무수한 말들 앞에서도 담담할 수 있는
엄마의 내공이 필요했다.
아이의 폭풍 성장 때마다 마주할 이 버거움을
견디고 버티고 감내해 낼 수 있는
엄마의 내공이 필요했다.
엄마가 처음인 엄마는...
아이의 그런 말들도 버거웠지만,
아이의 그런 말들을 마주하며 마주치는 엄마 자신의 모습과 태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버거웠다.
뭐 하나 틀린 것 없는 아이의 말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아이의 말 앞에서
엄마의 태도를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엄마의 말을
그렇게 밖에 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비겁함을
자책하기 일쑤였다.
‘내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고?’
‘이런 상황에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아이의 모습에,
자신의 감정대로 표현할 수 있는 아이의 언행에
엄마는 부끄럽고 부끄럽다.
어른이라는 이유로, 아이라는 이유로
내 뜻대로 아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긴
비겁한 엄마 자신의 언행에
엄마는 또다시 부끄럽고 부끄럽다.
그렇게 종종 엄마의 역량을 의심하곤 한다.
그렇게 힘이 빠져 있을 때면,
그런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건
다름 아닌 아이임을 알아간다.
아이와의 한바탕의 실랑이를 끝내고 나면,
엄마는 종종 그렇게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러운 역량 부족의 엄마임에 자책하곤 한다.
아이는 그렇게 상황이 끝나면
뒤 끝없이 아무렇지 않게 평소모습으로 돌아가지만,
엄마는 상황이 끝났음에도
그 상황 속에서의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그 감정의 나락 속에서 질척대곤 한다.
설거지를 하며, 빨래를 개며,
그렇게 집안일을 하면서 불편한 감정의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곤 한다.
그런 엄마지만
그런 엄마에게 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말을 건넨다.
“엄마, 아직 화났어?”, “엄마, 괜찮아?”,
“엄마, 미안해.”, “엄마, 사랑해.”
그 상황 속에서
아이도 엄마만큼 아팠음이 분명하다.
아팠던 아이는 그 상황이 끝나자
그 아픔을 스스로 잘 정리하고
다시 사랑을 보여준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아팠던 엄마는
그 상황이 끝나도
스스로가 이만큼 아팠음을, 속상했음을,
그래서 지금도 기분이 좋지 않음을
여전히 티내고 있다.
때로는 화가 많이 났음을 감추지 못한 채,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그렇게 무조건적인 사랑의 말을 건네더라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못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아이의 모습을 통해,
아이의 사랑을 받으며,
아이에게서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런 것임을 배워간다.
엄마가 그렇게 화가 났음에도, 화를 냈음에도,
화를 품고 있음에도
아이는 “엄마!”를 불러준다.
스스로가 부족하고 부끄럽다 생각하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 이렇게 부족하고 부끄러운 엄마를
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이렇게 무조건 사랑해주는구나.’
엄마에게서 배워야 할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던가.
아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이를 통해 배워가는 것임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 세상 그 누가,
나를 이렇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까.
엄마는 아이와 함께 하며,
엄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아이 앞에 드러내곤 하기에
아이는 정말
엄마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
엄마의 모습 그 자체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아이가 아닐까.
어쩌면 엄마 자신보다도
엄마를 더 잘 알고 있는 존재.
그런 아이는
엄마의 치부와 단점을 모두 알고 있지만
아이에게는 그런 것 따위는 중요치 않다.
아이에게 엄마는 그냥 엄마인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어떤 모습이든
엄마를 무조건 사랑해준다.
스스로가 부족하고 부끄럽다 생각하며
엄마의 역량을 운운하다가
그렇게 누군가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음에
정신이 번쩍 든다.
더 이상 비겁한 엄마의 언행으로
아이를 통제하지 않기 위해,
아이처럼 감정에 솔직하고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기르기 위해,
그렇게 엄마에게 필요한
지혜와 현명함의 내공을 기르기 위해
찾은 방법이 바로 글쓰기였다.
그렇게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며 멈추어 가고,
글을 쓰며 그 감정을 만나고,
글을 쓰며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글을 쓰며 그렇게 나를 만나면서
엄마는 비로소 엄마 안의 힘을 키워가고 있다.
어느새 초등학교 중학년이 된 3학년 10살 딸.
우리는 요즘 또다시
질풍노도의 실갱이를 이어가고 있다.
이제는 알고 있다.
아이의 질풍노도의 그 시기는
아이가 성장하는 계단 곡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아이는 질풍노도의 그 시기를 지나며
한 계단, 때로는 몇 계단
더 성장한다는 사실을.
아이의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해질수록
사실 그 질풍노도의 여파는 더 크고 깊고 진하다.
그 말은 곧,
크고 깊고 진한 아이의 성장을 의미하므로,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아이의 질풍노도의 시기들 속에서
담담함을 유지하기 위해 쓰고 또 써본다.
그리고 변함없이 이번에도 이 버거움을
아이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버텨낼 수 있음을 알아간다.
아이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이
참으로 소중하고 감사하다.
아이의 질풍노도 속에서
엄마의 역량을 의심하곤 하는 버거움을 만날 때면,
아이가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사하며,
그 사랑을 힘 삼아
그렇게 버텨내고, 견뎌나아가며
아이의 성장에 발맞춰 엄마도 함께 성장하고 있음을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