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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대첩

엄마는 김장을 한 해의 마무리를 짓는 행사라고 했고

나는 김장대첩이라고 부른다.


어느 해였던가

군산 친정 동네 아줌마들이 저녁 12시부터 모여서 엄마 집김장을 담궈주고 

새벽 네시쯤 해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 군산 친정의 김장은

상상만해도 무서움이 오싹한 일이었다.

밤잠이 없는 슬픈 나이라서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는 엄마의 설명이 있었지만,


상상해보시라.

할머니들이 새벽에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모여서 시뻘건 양념을 배추에 처발처발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충분히 무서운 그림이다.

곡성에 지지않을 군산

영화 한 편이다.


물론 엄마도 그때 담궜던 새벽 김장이후로 아무리 할머니들이라고 해도

그시간에 하는 건 너무 힘들었다며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우리 시댁도 마찬가지여서 김장을 마치고 나서야 시부모님의 일 년은 마침표를

찍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된다.

물론 해가 곧 바뀌고 설이라는 명절이 돌아오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바쁘겠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근처에 사는 작은 며느리가 행사를 주관하니 움직임이 불편하신 시어머니께서

크게 하시는 일은 없지만 김장만큼은 아직 주도권을 꽉 잡고 계신다.

넘겨주고 싶어도 넘겨줄 수 없는게 시어머니의 김장은 뭐랄까

맛이 다르다.

두툼한 손모양부터 요리 잘하게 생긴 손이고, 결혼해서 어머니가 끓여주신 국이나 찌개가

맛있어서 남아있는 찌개를 냄비째 덜어간 적도 있었다.


여든이 넘으시니 시어른들은 걸음걸이가 달라지셨다.

그나마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보다는 잘 걸으시지만 시어머니는 보는 사람이 

불안한 걸음걸이로 걸으신다.

그러면서도 김장은 꼭 해야 된다고 하니 어쩔수없이 남편이 내려가서 절이고 헹구고

담는 3일의 과정을 행사처럼 마치고 돌아오는 게 벌써 몇 년된 일같다.

나는 동행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예전과 달라진 점은

그런 선택을 이젠 누구 눈치도 안보고 스스로 한다는 점이다.


시어머니 젊으셨을 때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게 김장을 많이 담그셨다.

내가 한숨을 쉬면서 우리 시댁은 김장을 삼백포기 넘게 해요 그랬더니

김치공장하세요 했던 아줌마가 생각난다.

삼백포기가 뭐야 더 됐을거다.

밭에 심은 배추를 다 뽑아서 하는 김장은 포기를 셀 수 없다.

아예 몇포기라는 계산을 포기해야 해탈한 심정으로 김장을 할 수있고

그때만 해도 남의 집 김장 울력을 다닐 수 있을 만큼 건강하셔서

어머니가 가서 김장을 도왔던 동네 아줌마들은 다시 시댁 김장에 모여서 점심까지 드시고 

갔기 때문에 며느리들은 김장도 문제였지만 점심 준비해서 상 차리는 게 신경쓰이는 일이었다.


말로는 김장했는데 뭘 이렇게 많이 차렸냐고, 겉절이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동태찌개는 기본, 잡채도 했었고, 수육은 삶아내놓지 않으면 뒤돌아서

욕했을 메뉴고, 나물도 빠지면 섭섭하다할 반찬이었다.


집집마다 김장 울력을 단체로 다니시는 분들이니 

어떤집은 뭘 했더라, 어느집은 뭐가 맛있더라 미식탐험대 아줌마 부대가

품평회를 하셨을테니 어머니 입장에서는 뭐도 해야 되고 뭐도 해야 되는

김장 맛집뿐만 아니라 점심 맛집이 되어야 했던 게 시댁 김장이었다.


그리고 시골 아줌마들은 김치 맛만 평가한게 아니라 며느리들 얼굴평까지

자기들 마음대로 했기 때문에 가끔 나는 둘째 동서와 비교가 돼서

아줌마들 평가 대상이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무례한 일인가!

그것도 다 들리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귀가 있어서 들리는 이야기를 모르는 척하고

일을 하는 게 고역이었다.


결혼 전에는 화가 나면 하루 종일 입을 내밀고 다녀도 눈치 볼 일도 없었고

오히려 나 화났어, 그런 줄 알어 당당하게 화남을 표시하고 다녔는데

생전처음 보는 시댁 동네 아줌마들이 얼굴 평을 하고, 그 앞에서 웃고 다녀야했던

그런것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시집살이란 거였다.


지금은 돌아가신 분도 계시고 다들 늙으셔서 시골이래도 남의 집 김장 도와주러 가는 게

없어지다보니 남편이 가서 일을 하고 김치 가져 갈 시댁 식구들끼리 김장해서

마무리하는 걸로 가르마가 타진지 꽤 됐다.


어느 해 춘천에 살 때, 10년 전 이야기다.

아직 어렸던 애들 셋만 두고 남편이랑 시댁으로 김장도와드리러 고속도로를 

종류별로 타고 다섯시간 정도 걸려서 갔던 날, 여차저차했던 사건으로 시동생과 전화로

한판싸움이 붙은 후 나는 시댁 김장에 넌덜머리가 났다.


마침 전화로 싸움이 벌어진 날이 시댁 김장날이었고

전화로 싸웠지만 손아래 시동생이랑 형수가 싸웠으니

형수였던 내 속은 김장에 삭혀서 들어가는 젓갈처럼 녹아버렸었다.


말은 양쪽 다 들어봐야되는거라 시동생도 속이 편했을리는 없었겠지만

의사에게 돈을 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그 사건으로 시동생과 아직도 남처럼 지낸다.

남편은 자기 동생인지라 미워도 안고 살지만 내가 시동생을 미워하는 마음을 이해해줬고

아직도 시동생 욕을 하면서 살고 있는 나와 함께 시동생 욕을 함께 해주고 있기 때문에

남편과 나는 아직도 무사히 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


그런 일이 있었어도 이후로도 시댁 김장하는 날 갔지만 달라진게 있다면

김장을 갖다 먹지 않게 된 거다.

굉장히 서운해하셨다.

우리 땡땡이는(남편) 김치를 얼마나 잘 먹는데 너는 안갖고 간다 그러냐

시어머니는 불만이셨지만, 불만에 대한 보답으로 겉절이 조금, 김치 통 한 통정도만 

갖다먹을 뿐이고 내 김치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의사를 몇 번이고 밝힌 후에야 

시어머니는 우리집 김장은 본인들 품에서 덜어내셨다.


마늘 한 톨 안까보고 결혼했는데 시댁에서 새벽에 일어나 절인 배추를 씻어보고

나는 김장의 무서움을 알아버렸고, 시댁과 멀지 않던 곳에 살던 내가 김장에 불려가서 

아줌마들 밥을 차릴 때, 수도권에 살고 있던 둘째 동서가 김장 날에 딱 맞춰 보냈던

돈 오만원에 어머님이 웃으면서 우리 둘째가 돈을 오만원이나 보냈다고 

아줌마들에게 자랑하던 날 돈이 좋다는 걸 알게됐다.

이십년도 지난 옛날 이야기다.


홍어 껍데기를 벗기는 모임까지 있었던 시어머니의 화려한 요리 품앗이는 

이제는 전설의 고향이 됐다.

아들이 사흘씩이나 내려가서 절이고 씻고 담그는 일의 거듬까지 하게 될 줄

짐작이나 하셨을까!

김장도와드리러 가지 않았어도 큰며느리인 나에게 뭐라고 하실 기운도 없겠지만

내가 가서 돕는데 누가 뭐라고 하면 가만두지않겠다며 

남편은 본인 친정으로 갔다.


일본 친구들은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 김장을 외부 체험말고 가정식으로 해보는게

소원인 사람들도 있다.

올 해 김장은 마짜찬방에서 김장담궈 보내주면 입금하는 방식으로 끝냈고

나의 한 해도 마감이다.


내가 하든 남이 해서 주든 김장이 지나가야 일 년이 가는 건 우리 엄마나, 나나, 시어른들이나

같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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