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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가만히 있었던 나를 반성한다.

내가 본 최초의 학폭은 6학년때였다.

시골의 국민학교에서 6년을 다니다, 6학년이 되자마자 중학교는 도시에서 다녀야 된다는 아버지의 바짓바람으로, 엄마는 급히 군산에 집을 사서 이사를 나오게 되었다.

전학가는 나를 배웅해주러 여자 아이들이 울면서 학교 후문까지 따라나오던 광경이 생각난다.

나도 울었고 친구들도 울었지만 호기심이 많고 새로운 것에 두려움이 없던 나는 친구들과 헤어지는 서운함보다

새로운 학교는 어떨까 잔뜩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 아니라, 호기심과 산만함, 두려움없는 마음이었을것이다.



동아전과를 베껴서 겨우 숙제만 해놓고 정신없이 노느라 바빴던 시골 학교에서의 평화로운 삶은

군산으로 이사와서 끝장이 났다.

학교 끝나면 노는 게 당연했던 일상이 전학으로 박살이 난 것이다.

피아노 집을 간다는 애들, 주산 학원을 가는 애들, 그도저도 아니면 교문 앞에서 연탄불구덩이 하나 놓고

달고나를 만들어서 파는 아줌마에게 들르는 애들까지 전학와서 내가 본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에 들러서

무언가를 하고 가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전학와서 사귄 옥이라는 친구를 따라서 그 애가 다니는 피아노 집에 한 번 가봤는데 피아노가 있는 방에

여자 아이들이 좁게 앉아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방바닥을 건반처럼 누르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내가 살던 시골 동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었으니, 그게 바로

도시에서의 삶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쓰는 말도 달랐는데 어느날 학교에 어떤 아이 엄마가 오셨는데 반아이들이 "빽쓰러 왔다"면서

수근거리길래 태어나서 처음 들어본 "빽쓰러 왔다"는 말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선생님한테 돈주러 온거라고

친구가 알려줬다.


내가 살던 시골에서는 엄마들이 학교에 오는 일도 거의 없었고, 가방이나 핸드백을 매고 학교에 오는 엄마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때문에 '빽쓰러왔다'는 말은 어감이나 뜻이 충격적이어서 잊혀지지 않는 말이 됐다.


엄마들이 학교에 핸드백을 매고 와서 돈을 쓰고 간다는 말을 아이들은 '빽쓰러 왔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니

그시절 얼마나 많은 촌지들이 학교에서 오고 갔으면 6학년 아이들이 그런 말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들이 학교에 와서 돈을 주면 받고, 그 아이들에게는 잘해주고, 엄마들이 학교에 오지 않으면 구박을 받던 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우리 엄마도 전학을 시켰으면 학교에 와서 담임에게 봉투를 줬어야 하는데 학교에 찾아오지도 않았기때문에 6학년 때 담임은 점점 나에게 눈치를 줬었나 싶다.



담임 이름도 생각이 난다.

안경을 끼고 마른 체격이었던 남자 선생님은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대놓고 무시하는 선생님이었다.

60명이 넘는 아이들은 1등부터 30등까지 오른쪽에 앉히고 31등부터 60등까지 왼쪽 줄에 앉힌 담임은

오른쪽에 앉아있는 아이들에게는 공부잘하는 줄, 왼쪽에 앉아 있는 애들은 똥기계줄이라면서 자기 말을

따라하게 했었다.


시골에서는 잘하는 아이였으나 전학와서 수준차이를 알게 되어 어정쩡한 실력이 되었지만

다행이 담임이 말하는 똥기계줄은 아니었기 때문에 담임이 시키는대로 '나는 똥기계입니다' 라는 말을

따라하는 줄은 아니었지만 6학년 여자아이 정도면 수치심이 무엇인지 자존감이 무엇인지는 알 나이였을텐데

전학와서 만난 6학년 담임은 아이들에게 그런 말을 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랬으니 우리반에 그렇게 뺵쓰러 오는 엄마들이 많았었나보다.



담임이 그런 사람이어서 그랬는지 우리 반에도 못된 여자애가 있었다.

이름이 장미였다. 68년생 치고는 흔하지 않던 이름이었는데 얼굴도 예쁘기가 정말 장미같긴했다.

그런데 그 애가 얼마나 한 아이를 괴롭히는지 못되기가 만화영화 캔디에 나오던 이라이자같다고 생각했었다.

 그 시절 나의 최애 만화였던 들장미 소녀 캔디에서 캔디를 괴롭히던 이라이자는 나뿐만 아니라 68년생 여자 아이들이 기억하는 최고로 못된 만화 캐릭터일것이다.

언제나 웃고 착하기만 하던 우리의 캔디 언니를 대놓고 구박하고 못된 짓으로 골탕을 먹이던 이라이자때문에 만화 보면서 속이 터졌었는데 실제로 살아있는 이라이자를 전학 온 새학교의 6학년 5반에서 만난거다.


내가 만난 이라이자는 만화보다 더 지독하게 우리반의 여자 아이에게 못되게 굴었다.

특히 집이 가난하고 옷차림이 허름했던 순한 여자 아이를 괴롭혔다.

혜영이라는 아이였다. 성이 특이해서 성까지 기억하고 있지만 여기다 다 올렸다가는 누가 찾아내도 찾아 낼 것 같은 이름이라 참는다.

장미도 그런 이름이긴 하지만 지금은 못되게 굴었던 철없던 어린 시절은 지났으니 지금은 어딘가에서 괜찮은

어른으로 살고 있길 바랄뿐이지만 그때 장미는 못됐었고, 혜영이는 안됐었고 담임은 못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비겁했었다.


담임도 장미가 그렇게 못되게 혜영이를 괴롭히는걸 모르지 않았을것같다.

다만 장미의 엄마는 빽을 쓰러 학교에 자주 오던 사람이었고 혜영이는 가난한 집 딸이었다.

돈이 없어서 5,000원을 내고 온양온천으로 가는 수학여행을 못갔던 혜영이었는데 장미에게 매일 괴롭힘을 당했으니 그애가 겪어냈을 1981년의 한 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학폭이 문제가 되는 남의 집 자식들의 기사를 보면서 우리가 방관했던 혜영이에게 미안하다.

적어도 그냥 보고있지는 않았어야했다. 장미가 혜영이를 울릴 때 60명이 넘는 한 반의 여자애들은 왜 누구하나

장미에게 하지 말라고 못했나 모르겠다.

그래도 아이들이 장미 이름을 두고 '썩은 장미'라고 몰래 놀리던 게 그나마 아이들이 할 수 있었던 소심한 복수였을 것이다.


혜영이는 못갔던 온양온천 수학여행에서 장미는 백화점에서 샀다는 잠옷을 입고 여관의 복도를 걸어다니면서 패션쑈를 했기때문에 수학여행비는 오천원이었는데 장미가 수학여행을 위해서 사입고 왔다는 잠옷 가격은 수학여행비보다 비쌌다고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로 장미는 미스 코리아는 못되고 지역 선발 미인대회에서 작은 상 정도는 탄 걸로 소문이 났다.


내가 들은 장미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므로 그 애가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는지 개과천선해서 전혀 다른 성격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학폭기사가 나오면 우리 모두 방관했던 6학년 때 5반 교실이 생각난다.

착했던 혜영이는 어딘가에서 부잣집 사모님으로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


자녀의 학폭문제로 낙마하게 되고, 잘 나가던 연예인들이 사과하고 하차하는 것을 볼 때 저게 맞는 거지, 그래 그래야 되는거지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건 아마 6학년 때 한마디도 못하고 눌러놨던 감정의 연장일지 모른다.

그때의 비겁했던 나와 우리반 아이들이 혜영이에게 하는 사과를 사회가 대신 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감정이입이겠지만 선이 악을 이기고 어둠은 빛을 몰아내는 사회가 제발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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