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엄마의 일 년

엄마의 일 년이 끝났다. 일 년 행사의 마지막은 아버지 제사로 김장보다 일 이주 뒤에 있으니 엄마에게 중요한 행사는 12월에 몰려 있는 셈이다.

살아계실 때 두 분이 했던 부부싸움의 살벌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제사상을 정성스럽게 차리는 엄마의 마음을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 제사는 올 해로 벌써 9년째다.


이번 제사는 가지 못했다.

대신 제사가 돌아오려 그랬는지 새로 지은 친정집 말고 같은 자리에 있었던 옛날 집으로 손님들이 와서 밥을 먹고 있고 동네 아줌마와 엄마가 장을 본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현관으로 들어 오는 꿈을 꿨다.

나 '엄마, 쌀집 아줌마랑 엄마가 장보따리 들고 옛날 집으로 들어 오는 꿈꿨어.'

엄마 '아부지 제사 돌아오느라 그런 꿈 꿨나보다.'

나 '미안해. 이번 제사는 못 가.'

엄마 '니 아부지는 그런 걸로 서운해 하는 사람 아니니 걱정말어라. 산 사람이 우선이지'

나 '그래도 미안해.'

엄마 '그런 소리말어. 산 사람이 우선이란 말은 부모한테도 살아서 눈깔사탕 하나가 낫지. 죽어서 제사상에 소 앞 다리를 놓은들 알겠냐. 뒷 다리를 놓은들 알겠냐. 산 사람 생활이 더 우선이라는 말이니 신경쓰지 말어라.'


엄마 말은 살아있는 우리 생활도 중요하니 무리해서 올 필요도 없고 죽은 부모 제사상에 좋은 걸 올리려고 하지 말고 살아 계실 때 잘하라는 뼈때리는 충고였으니 결국 엄마에게 잘 하라는 뜻이 깔려 있다.

제사에 가지 못 해 불편한 마음을 성당에 연미사 신청해서 미사에 아버지 제사를 기억하는 걸로 대신했다.

화요일 오전 10시에는 우리 성당 미사에도 들러야 되고 저녁에는 군산 집으로 제사에 가실 아버지는 제삿날이 가장 바쁜 날이 되었을 것이다.


두 달에 걸려 완독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일본어 판은 나에게 돋보기와 명언 한 줄을 남겼다.


다이소의 이천원짜리 돋보기와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없이 활활 피워보라'는 나미야 할아버지의 말씀


책의 내용에 등장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나미야 할아버지의 33주기에 관한 내용이다.

33주기를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것은 일본의 제사 풍습과 관련있다.

몇 대 위의 조상들까지 챙겨서 지내는 우리나라의 제사 풍습과 달리 일본은 한사람에 대한 제사가 33년이 지나면 완전히 끝나는 형태이다. 굉장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제사를 맡게 될 맏며느리로서 이는 일본에서 수입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사에 대한 졸업이 일본에는 있다. 1년, 3년, 7,13,23,27,33주기를 마지막으로 한사람에 대한 제사는 영원히 끝이 나는 것.

그동안 상담 편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조언이 본인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답장은 할아버지의 33주기 밤 12시안에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33주기의 밤 12시가 지나면 영원히 저쪽 세상으로 건너가기 때문이다.


33주기 쯤 되면 돌아가신 분을 붙들고 있을 마음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직 아버지는 잠시 생각도 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알려 드리고 싶고 힘든 일은 푸념하고 싶어진다.

이또한 돌아가셨으니 드는 마음일것이다.

만일 살아계셨다면 '진짜 아버지때문에 짜증난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엄마에게는 없었던 치맛바람이 아버지에게는 굉장히 있어서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보고 들어 온 저녁에 시험 보느라 피곤해서 초저녁 잠을 자던 나를 깨워 수험표 뒷 면에 적어 오게 한 답안지를 가채점하면서  '이래서 고등학교 가겠느냐며' 화를 내신 분이 우리 아버지다.

아직도 기억난다. 체력장 20점 만점 합해서 176점이었던 연합고사 점수는 낮은 점수도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화를 내면서 닥달하는 바람에 열여섯 큰 딸은 네 명의 어린 동생들 앞에서 소리내면서 엉엉 울었었다.

'아버지. 진짜 왜 그러셨어요. 시험보느라 수고했다' 그러셨어야죠.


둘째 여동생에게 아버지가 했던 바짓바람은 밴드부 사건이다.

국민학교 밴드부였던 여동생은 덩치가 큰 편이라 밴드부에서 큰 북을 치게 되었는데 큰 북이 싫다는 여동생의 투정에 아버지는 학교에 쫓아가셨고 동생은 멜로디언으로 악기가 바뀌게 되었다.

둘째 여동생으로서는 '우리 아빠 만만세' 사건이다.


이밖에도 참 많다. 넷째 여동생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던 날, 수학여행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아버지가 크게 이름을 부르자 넷째가 아버지를 보고도 고개를 획 돌렸다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아버지는 엄마도 하지 않던 일들을 많이 하셨다는 거다.


엄마 말씀이 자식한테 하던거랑 엄마한테 하는게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아버지 덕에 우리는 바짓바람의 원조같았던 아버지의 덕을 보기도 했고 손해를 보기도 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 남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그리움 뿐이다.


엄마의 일 년은 갔지만 연말에 남동생네랑 함께 세부에 가기로 했다니 엄마에게는 중요한 행사가 하나 더 남아 있다.

나 '엄마. 인오네랑 필리핀간다며'

엄마 '필리핀 아니라던데. 세부라고 허든디'

나 '네네. 엄마. 필리핀이 세부고 세부가 필리핀입니다.'

살아계실 때 눈깔사탕 하나가 죽은 다음에 소 뒷다리보다 영양가있다는 말씀에 따라서 우리 다섯 형제는 엄마에게 망고 사드시라고 용돈을 보내드렸다.


엄마의 일 년은 그렇게 간다.



작가의 이전글 신부님이 신부님인줄도 모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