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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시어머니 생신

음력 6월 17일

시어머니 생신이었다.

결혼한 지 이십 칠년

스물 일곱에 결혼해서 해마다 같은 날 돌아오는 똑같은 대소사를 챙길 때 들었던

부담감이나 공포심같은게 시간이 가면, 오십대가 되면 없어질 줄 알았다.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드리고 넘길 줄 알았는에 전혀 아니었다.


스물 일곱살에 혼자 세웠던 가정(假定)이 틀렸다는 걸 쉰 넷에 알게 되었다.

시댁에 잘하든 아니든 내가 며느리고, 우리 어머니가 시어머니라는게 다른 생에서 우리 엄마 황여사로

만나지 않는 한 며느리가 시댁에 가는 일은, 그것도 35도의 폭염에 다녀 가는 일은 편한 일은 아니라는 걸

이번에 또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어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시어머니를 나타내는 말로

義理の母(ぎりのはは)라는 표현을 쓰는 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의리로 맺어진 어머니가 시어머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리(義理)는 보성이 행님의 으으리와는 조금 먼 의리다.


순수 진심 100퍼 의리


보성이 행님의 주먹 불끈 뜨거운 순수 진심 100퍼 으으리가 아니라


뺄거 뺴고 거를 것은 적당히 걸러낸 의리



소쿠리에 적당히 걸러낸 소쿠으리! 의 의미일 것이다.


의리라는 말이 제대로 쓰인 일본어의 표현중에 기리초코(義理チョコ)가 있다.

기리초코(義理チョコ)는 일본의 여성이 발렌타인 데이인 2월 14일에 연애 감정을 수반하지 않는 

남성에게 평소의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또는 화이트 데이의 답례를 기대해서 주는 초콜릿 또는 그 의식 전반을 함유한 일본 특유의 문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위키백과 인용*




시어머니를 義理の母(ぎりのはは) - 기리노하하"라고 하는 일본어식 표현은 딱 맞는 말같다.

적당히 의리를 지키고, 적당히 거리를 두며 적당한 만큼의 감정을 공유한다면 문제가 될 수 없고 상처받을 일도

없을 관계일텐데, 어느날 갑자기 나에게 새부모로 나타난 남편의 부모에게 내 감정을 강요받거나 스스로

너무 잘하려고 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등을 충분히 겪어가면서 시어머니의 생신을 엊그제

스물 일곱번 째 보내고 왔다.


그동안 열외받았던게 다섯 번 쯤 될까

대구에 살 때 한 번 쯤 면제받았을것이고 (여섯살, 세살, 두살)을 데리고 생신을 치르러 간다는 것은

대구에서 익산까지 가는 우리도 힘들었지만 아이들에게 너무 먼 거리였고 아이들의 움직임을 감당해내기에는

우리의 첫 차 "세피아"가 너무 좁았었다.


분유통부터 기저귀가방까지 한 번 다녀 오는데 피난 보따리 같았던 아이들 짐부터 마음의 부담까지

남자들 군입대 하는 심정이 이런건가 하는 마음으로 시댁의 행사 날짜가 다가올 때 달력을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너희들은 거리도 멀고 애들도 어리니 오지 말어라"라는 자비로운 말씀은

부모님으로부터는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애가 셋이어도 군말없이 다니던 남편이 딱 한 번 대구에 살 때

시아버지 생신을 혼자서 다녀 왔었다.


익산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차안에서 세 아이들이 물 병 엎지르고 토하고 분유먹고 토하고

똥싸고, 울고 깽판을 치는 바람에 질려 버렸던 것이다.


그 덕분에 추석 이주 뒤에 있던 시아버지의 생신은 남편이 자발적으로 자기 혼자 다녀 온 것이

내가 아이들을 앞세워서 시댁의 행사에 면제받은 최초의 생신면제 혜택이었다.


깡패같았던 삼남매의 난리 부루스 덕분으로 시댁 생신 참여 면제권을 1회 받았을 때 내 기분은

집에서 육아 독박을 쓰고 삼남매를 보더라도 시댁에 한 번 가지 않는게 더 편했었다.


두주먹 불끈 의리가 아니고 소쿠으리로 살면서 시어머니를 찐 어머니가 아니라 의리의 어머니로

생각하면서 살았더라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괜찮은 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 생신에는 셋째까지 함께 모여서 시댁에 자식 셋을 데리고 다녀왔다.


어느땐가부터 부모님의 생신에는 손자 손녀들은 가지 않고 자식들만 가서 밥 한끼 얼른 먹고 자기집으로

돌아가는 게 돼버렸는데, 이번 어머니 생신에는 우리 아이들 셋이 가서

시아버지 시어머니 주머니도 털고 함께 앉아서 사진도 찍으면서 생신을 보냈다.




팔십이 넘으셨으니 앞으로 더 사시는 건 여명餘命)일것이고, 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두분의 생신도

몇 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내가 함께 가자고 해서 된 일이었다.


우리들끼리만 가자던 남편도 생신을 치르고 올라오면서는 잘한 일같다고 했고

큰 애는 셋이 함께 있으니 작은 아버지, 작은 엄마들 모두 우리 가족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것

같다는 말도 했다.




간 김에 들른 군산 집까지 1일 2 할머니를 만나고 돌아오니

양쪽 집에서 받아 온 먹을거리를 정리해서 넣는데도 시간이 걸렸지만

손 끝 야무진 우리시어머니의 청국장은 여전히 냄새도 안나고 맛있고, 우리 엄마의 열무김치는

여름 반찬으로 딱이다.


생신 당일인 오늘 "어머니, 이렇게 더운 날 태어나느라 고생하셨어요. 좋은 하루되세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물리치료 받는 중이시라며 웃으셨다.


살아온 날이 어디 한여름 태어난 생일 뿐이겠는가

시어머니 한평생이 힘이 드셨을것이다.


그걸 이제야 알겠는데, 어머니는 팔십이 넘으셨고 나도 나이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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