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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의 추억

김장의 계절이 드디어 돌아오고야 말았다.

이제는 시댁의 행사에 강제 동원되는 일도 없고, 설령 뭔가 동원될 일이 생기더라도

"이제 나는 안 갈 거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라고 말할 수 있는 미움받을 용기가 생겼기 때문에,

다음 주로 잡힌 시댁의 김장 행사가 목을 죄는 건 아니지만 경험해봤던 김장에 대한 기억은

산뜻한 게 쥐어짜서 생각해봐도,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보려고 해도 하나도 없다.




딸이 넷이었지만 엄마가 마늘 한 개 까라고 시킨 적이 없었던 것은 내가 싸가지가 없었던지

우리 엄마가 알아서 다 한 거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어찌 되었든 결혼 전까지 친정 집 김장은

학교에 다녀오고 나면 만들어졌지, 엄마는 우리들이 보는데서 일을 벌여놓지 않으셨기 때문에

나는 김장의 진행 순서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결혼을 했다.


자식이 다섯이었으니 엄마도 김장을 원 없이 했을 텐데도 김장에 필요한 자잘 자잘한 일들을 시키지 않으셨다.

마늘이랑 생강도 다듬어서 찧어 놓아야 되고, 쪽파도 다듬어야 되고, 미나리도 씻어 놓아야 되고

김장에 이렇게 많은 일들이 여성의 노동이 녹아들어 가야 맛이 난다는 걸 내가 알게 된 건

스물일곱 봄에 결혼하고 나서 같은 해 시댁의 무서운 양의 김장을 돕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며느리를 들인 건지, 일할 사람을 하나 들인 건지

김장의 과정을 나하고 함께 하시기를 원했고, 그때만 해도 미움받을 용기가 없었던 나는

11월 찬바람 속에서 쪽파를 다듬으면서 김장에 쪽파가 들어가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동시에, 우리 엄마가 김장할 때는 쪽파 한 번 다듬어 주질 않았다는 걸 느꼈고 마음이 아팠었다.


시댁의 김장은 텃밭에서 죽지 않고 살아있는 배추들을 모조리 뽑아서 하기 때문에

배추를 사서 김장을 하는 도시 사람들의 양과는 크라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배추를 사서 하는 거라면 백 포기 이백 포기 범위가 정해지겠지만

밭에 있는 배추를 모두 뽑아서 하는 양이란 기본이 삼백 포기였고, 그 이상도 많았을 것이다.


전주 집에서 김장 전 날 큰 애를 데리고 시댁에 가서 하루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절여진 배추를

씻어야 했을 때는 쪽파 다듬기는 장난이었다는 걸 손 발이 얼어가면서 알게 됐다.


시댁에는 아들이 셋, 남편 위로 누나가 한 분

시댁도 김치를 많이 드시는 편이지만, 모든 김장을 자식들에게 나눠 주는 것이 시어른들의 자랑이었고

"우리 애들은 김치를 좋아한다"는 시어머니의 주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해가 갈수록 김장은

무서운 양을 자랑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우리 애들" 속에 물론 나는 없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우리 애들은 파김치도 잘 먹는데 나는 파김치도 안먹으니 어머니의 우리 애들 범위에

나는 없는게 분명하다. 그리고 내가 파김치 안먹는 것도 지금까지 모르실테고

김치가 있으면 먹고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시댁 김장에 들였던 노동력은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우리 애들"을 위한 거였기 때문에, 친정에서 마늘 하나 안 까고 엄마 김장하는 날짜도 모르고

살았던 화려한 과거를 떠올리면 저절로 친정을 향해서 고개 숙이고 한 번 울 수밖에 없었던 시댁의 김장이었다.




김치 씻어야 되니까 새벽 네 시쯤 일어나서 옷 두툼하게 입고 밖으로 나오라고 했을 때

초겨울 시골의 새벽 네다섯 시가 그렇게 춥다는 걸, 마음은 더 춥다는 걸

손과 발은 다 얼게 된다는 걸 1995년 겨울에 알게 되었다.


남편과 함께 간 시댁이었지만, 남편은 돌 전이었던 큰 애를 안고 집안에 있으라 했고

나만 데리고 밖에 나간 시어른들과 절여진 배추를 씻어서 차곡차곡 소쿠리 위로 쌓아놓았었다.

삼백 포기라는 미친 양을 시아버지, 나, 시어머니 셋이서 씻어서 거의 다 돼갈 때쯤

손과 발은 감각이 없어졌고, 영혼은 이미 탈출을 해서 염전 노예가 아니라 김장 노예가 되려고

결혼을 한 게 분명하는 생각을 했을 때, 마침 너무 높이 쌓아 올려진 절임 배추들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져서 다시 씻어야 된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때 곧바로 내 집이 있는 군산으로, 아빠 엄마가 계시던 시끄러운 내 동생들이 넷이나 있던

집으로 갔어야 옳았다.


그때 돌아가지 못했던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랬더라면, 우리 승범이까지만 내 자식이었을 테고, 은진이 수민이는 세상 구경도 못했을 테니

참기를 잘한 일이긴 했지만, 김장이 다 끝나갈 무렵 도와주러 오셨던 아줌마들에게 점심까지 차려드리면서

김장은 다 되어 가는데 내가 배추처럼 절여지는 것 같다고 느꼈을 때 어머니가 확인사살을 하셨다.


아이고오, 우리 둘째 메누리가 고춧값이라고 오만 원을 부쳤다네

동네 아줌마들은 당신들이 우리 동서한테 오만 원이라도 받은 것처럼 시끄럽게 동서 칭찬을 하셨고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김치를 받아먹어서 고맙다며 오만 원을 보냈다는 동서의 엽렵함에 대해서

칭찬을 하다가 어머니가 며느리를 잘 봤다는 부러움으로 연결시켜서 이야기는 끝났고


에밀레에 에밀레에

성덕사 신종에서 났다는 아기 울음소리가 내 마음에서는 울렸던 것 같다.

아니다. 씨발 씨발 이렇게 욕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우리 집으로 갔어야 옳았지만

미움받을 용기가 1도 없었던 나는 김장에 대한 트라우마가 그때 생겼다.




쉰네 살이 되었다.

김치를 못 담그는 대한민국의 이상한 아줌마가 된 건 순전히 우리 엄마 황여사 때문이다.


"엄마가 해서 주는 데 왜 네가 쓸데없이 김치를 담그냐, 그런 건 안 해도 된다"

대구에서도 전주에서도 대전에서도 제주도에서도 엄마의 택배는 항상 김치를 싣고 우리집으로 보내졌다.

셋째 가져서 오이소박이가 먹고 싶었을 때 엄마가 보내 준 오이 소박이에 물 말아서 입덧을 다스렸고

오이 소박이만 보내라고 당부를 했음에도 기어이 한 상자 가득 오만가지 먹을거리를 쑤셔넣는 엄마 덕에

그 때 두살이었던 은진이는 택배 상자를 푸르면 "이건 군산 함미꺼" 그걸 아기가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자식들이 예전만큼 김치를 안갖다 먹는게 서운하신 시어른들은 양을 전폭적으로 줄였고

김장을 도와주러 가는 이도 며느리들이 아닌 아들이 되었다.


남편이 가서 배추도 뽑고 함께 절이고 나르고 일을 많이 거들기 때문에 일하기가 수월해졌다.

1995년 시댁 김장 때 당신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서, 시어른들의 악행에 대해서 아느냐고 취조를 하면

"모르고 그랬어, 용서해줘" 내가 나가서 씻어야 된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며 용서를 빌지만

모르고 저지른 죄도 죄는 죄다.


본인이 모르고 저질렀던 죄의 댓가는 꽤 오래전부터

시댁의 행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기가  대신해주고, 내가 해야 되는 일은 함께 해주며 신경 안쓰이게 배려해주며

100% 내 편이 되어 주는 걸로 형기를 치르고 있는 중이다.


남편의 슬기로운 빵생활이다.


엄마도 백살까지 내 김장 해서 줄 거 아니면 이제는 내가 담궈먹을거야.

김장 독립만세 만세 삼창 외친 지가 나도 몇 년 전이다.

김칫속도 절임 배추도 돈만 있으면 되는 세상

남들은 호강에 겨운 소리 한 다지만 어지간한 요리는 대충 흉내라도 내는데 김치는 똥손인 내가

이제는 내 김치는 내가 만들어먹겠다며, 다음 주에 김칫속과 절임배추를 주문해뒀다.


절임배추 20킬로 몇 포기나 된다며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한소리를 들었지만

이젠 엄마가 무서운 나이도 아니고, 시댁에는 김장을 도와드리러 가지 않을

미움받을 용기가 생긴 나이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김치를 내 손으로 담궈 먹기로 했다.


남편의 형기는 씻어놓은 배추가 무너져서 새로 한 번 씻는 일을 해보게 되면 집행유예로 감량해줄 예정이다.


"11월 모일 부디 센 바람이 불어서 씻어놓은 배추 더미가 무너지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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