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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Love and

우리들 속의 난민

by 안종현

얼마 전, 우연히 길을 가다 스웨덴 (여자인) 친구를 만났다. 내가 사는 동네가 꽤나 구석진 곳이라 이런 곳에서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운지라, 그 친구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그녀는 히잡을 쓰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라고 반가운 표정을 지어야 하는데 놀라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친구는 말했다.

"그러게, 나 지금 소피네 집에 저녁 먹으러 가는 길인데 길을 못 찾겠네."

근처엔 또 다른 친구가 살고 있는데, 처음 온 곳이라 길을 잃어 헤매다 나와 마주친 듯 보였다. 그래서 그녀를 소피네 집으로 데려다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놀랐니? 나 무슬림으로 전향했어."

"솔직히, 조금 놀랐어. 남자 친구랑 결혼하려고 그러는 거야?"

"응, 이번에 남자 친구가 이탈리아 법원에 난민 자격 신청을 했는데, 결혼 서류랑 같이 제출해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야."

이 스웨덴 친구는 약 일 년 전에 이라크에서 온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 청년은 스웨덴에서 난민신청을 하고 받아들여지길 기다리는 "asylum seeker"였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아기를 가졌고, 아기를 가진 것과는 상관없이 난민 남자 친구는 난민신청이 불허가되어 이탈리아로 다시 난민자격을 얻기 위해 스웨덴을 떠났다. 내 친구는 남자 친구와 미래를 약속할 수가 없어 일단 아기를 지웠다. 그런 일들이 있은 후 우리는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그리고 내 친구는 무슬림이 되었다. 히잡을 써 머리카락을 가리고 있었다.

사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에 그녀는 여느 스웨덴 사람들처럼 섹스를 즐기고 자유로운 옷차림에 여성인권에 관심도 많은 그런 사람이었다. 옷차림에 대해서 조금 덧붙이자면, 스웨덴 여자들은 짧은 치마를 입고도 속옷이 보이는 걸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녀는 짧은 치마를 입고도 잔디에 대자로 누워 같이 대화를 하던 그런 여자였다. 자유분방한 그런 여자였다.

소피네 집에 도착해서 그녀와 헤어질 인사를 하려고 포용(스웨덴은 헤어질 때 포옹을 한다)을 하려던 순간, 내 친구가 말했다.

"나 이제 포옹을 못해. 미안해."

나는 당황해 손을 흔들면 잘 지내다 다음에 또 보자고 했다.


무슬림이 되는 건, 개인의 자유이니 내가 왈가왈부할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복잡했고 당혹스러웠다. 무슬림 남자는 비무슬림 여자와 결혼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반면에 무슬림 여자는 비무슬림 남자와 결혼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내 친구는 결혼과는 상관없이 무슬림이 된 것이다. 물론 무슬림이 되는 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이렇다. 그렇게 종교적 가치가 중요한 커플이 과연 종교적 가치를 지켰느냐는 것이다. 그 남자 친구와 이미 결혼 전에 섹스를 했고, 아기까지 지웠다. 그리고 이제는 무슬림 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스웨덴의 일반적 포용도 외간 남자와는 안 한다는 것이다. 이건 조금 이율배반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그리고 자기 스스로 남자 친구 때문에 여성의 인권을 제한한다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론 무슬림 여성들은 히잡을 쓰는 게 여성의 인권을 제한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히잡을 씀으로써 보호를 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은 그 위대한 알라의 뜻을 당체 알 길이 없다고 무시한다. 이 무슨 말인가? 그래서 난 종교가 싫다. 당체 말이 안 되는 논리를 사람들이 믿기 때문이다.

나는 물었다.

"행복해?"

그녀는 말했다.

"응, 행복해."

개인이 행복하다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조금 멍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무슬림인 난민이 유럽으로 정당한 조건을 갖추고 오는 것에 대해선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보아온 스웨덴의 난민들은 대부분이 전쟁을 경험한 적이 없는 부자들이다. 그들은 그저 다른 사람보다 금전적 여유가 있어 브로커에게 거금을 지불하고 유럽으로 향하는 티켓을 산 것일 뿐이다. 즉, 유럽 국가의 정부들은 난민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허점을 들어냈다는 점이다. 사실 미디어에서 알려진 보트로 유럽을 건너온 이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단 나는 그들이 진정한 난민이냐? 는 것에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유럽으로 왔으면 유럽의 가치를 존중했으면 좋겠다. 자신을 난민으로 받아준 국가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말이다. 그러나 많은 무슬림들은 현지 문화와 잘 섞이질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가치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다. 그게 남의 나라에서 할 말인가?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자, 여기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난민은 무조건 도움을 줘야 할 대상으로 인식을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난민에게 도움을 줄 방법을 찾되, 난민에게 동시에 비판적 시각도 유지해야 한다. 남의 나라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이다. 이들이 유럽으로 건너와 현지의 가치를 해친다면 안 될 일이다. 무조건적인 선행은 어리석다. 가장 좋은 문제는 난민이 발생하는 그 지역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요즘 유럽 국가들은 직접적으로 난민을 받는 것보다 현지에서 내전을 겪는 나라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펀딩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무조건적인 반대도 어리석다. 얼마 전에 한국에서도 중동 난민이 제주도로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것을 가지고 한국에서도 시끄러웠다. 참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난민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해서는 안된다. 공부의 신인 강성태는 "내가 죽어가는 데 난민은 무슨 난민?"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분은 공부만 했지, 인성 공부는 '기울어지게 한 사람'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도 돈 없이 가난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때 많은 나라들이 우리를 도왔다. 그때 강성태와 같은 논리로 우리를 돕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경제발전을 못 이루고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세계에서 많은 물건을 팔고 있는 한국은 더 이상 고립된 나라가 아니다. 많은 선진국들이 저개발국가의 문제들을 돕는 건 상대적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계 경제에서 어느 한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글로벌 마켓은 연달아 무너지기 때문에 미리 방지하는 차원도 있다. 한국도 경제적 발전을 이룬 만큼 어려움에 처한 국가들을 돕는 건 어쩌면 세계 무대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국가로써 당연한 의무이다.

난민 문제는 어렵다. 정확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난민을 잠재적으로 강간범으로 모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대할 필요가 있을까? 이게 과연 국제사회에 보여줄 한국의 민낯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무조건 찬성하는 것도 문제다. 그동안 많은 난민을 수용해온 유럽들이 사회적 갈등을 겪어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돈 많은 유럽들도 감당이 안되어 이제는 배척하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는 중이다. 스웨덴의 최근 선거에서 보수우익 정당이 많은 표를 가져갔다. 그러나 이를 두고 유럽도 반대하고 있는데, 우리 같은 약소국가가 어떻게 하겠냐며 덩달아 배척하겠다고 한다면 이것도 말이 안 된다. 왜냐면 유럽은 최소한 그동안 노력을 했다. 많은 난민을 이미 받았고, 이젠 난민을 전처럼 많이 안 받아 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 비해 훨씬 많은 수를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현재 자기네 나라에 더 이상 수용이 어려운 것을 직시하고, 난민이 많이 발생하는 미얀마나 시리아 등지에 어마어마한 펀드를 지원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상황과 유럽의 상황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난민을 지원할 수 있고, 우리 사회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나도 딱히 답은 없다. 어려운 문제다. 다만 유럽이 펼쳐왔던 난민 문제를 공부해서 실패했던 사례와 성공했던 사례를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혹은 지금의 트렌드처럼 난민을 직접 수용하는 것보다는 난민 문제 해결을 위해 펀드를 마련해 해당 국가에 지원하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하다.



*마지막 문장에 대한 오해가 있어, 다시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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