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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24.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2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6)

한국을 침략하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지미카터 미국대통령의 언명이 있은 지 보름쯤 지났다. 국내최초 원자력발전소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기가 가동에 들어간다는 뉴스가 있었다.

“아야, 우리도 인자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드라잉?”

“뭔 자다가 봉창 때리는 소리대?”

“무식한 시끼, 공부 좀 해라.”

“아따 저시끼, 성적 좀 올랐다고 날뛴 거 보소. 아야 깡다구, 너는 백날 애써봤자 내 밑인께, 내 앞에서는 찌그러져있어라잉.”

“옴마, 요노무 시끼 봐라. 세모야 지둘려, 내가 6월 월말고사 때는 너를 확 밟아 줄라니까.”

“진짜 어이가 없그만잉, 백 원 걸고 내기하끄나?”

강덕구가 점심을 먹으면서 같은 분단이지만 앙숙인 강모세에게 갑자기 핵무기이야기를 꺼냈다. 중간정도 성적인 강모세가 비웃자, 공부와는 담쌓아 꼴찌에 가깝던 강덕구가 도발하였다. 강덕구가 5월 월말고사에서 4월 성적보다 17등이나 올랐고, 엄정한선생에게 난생처음 공개적으로 칭찬받아 고무된 상태였다. 본인도 나름 공부에 자신감이 붙어 열심히 하려고 했다. 중하위성적인 강덕구가 중위성적인 강모세를 따라 잡기는 상식선에서 봐도 어려웠으나, 강덕구도발을 맞받은 강모세가 내기를 걸었다.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한다 안 하냐, 원자력이 뭐시여, 핵이여 핵.”

“아야, 핵 하고 핵폭탄 하고 뭔 상관인디?”

“어허이, 무식하믄 용감하다드만, 너 무자게 용감하다잉.”

“입은 삐틀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라잉, 누가 봐도 그런 용기는 니가 나보다 났제.”

“아야, 미국 대빵 카터가 보름쯤 전에 우리가 핵무기 만들까 봐 선수친거잖애.”

“나는 니가 뭔 말 한지 모르겄다.”

“공산당노무 시끼들이 우리나라 쳐들어오믄, 미국 즈그가 핵무기로 조져불란께 걱정마라고 함시롱. 한국 느그는 쓰잘데없이 핵무기는 만들지 말어라잉, 그런 뜻이제.”

둘이서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옥신각신하다 과학시간에 담임에게 물어보기로 합의 보았다.

점심을 먹는 동안 음악만 흘러나오던 학교스피커에서 갑자기 누군가와 대화하는 차여선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더니 김추자가 부르는 ‘거짓말이야’가 흘러나왔다. 노래 1절이 끝나갈 무렵 다급한 오성희선생의 목소리가 나오다 방송이 끊겼다.

교정 군데군데 모여서 방송을 듣거나 운동장에서 점심시간을 보내던 학생들이 손으로 스피커를 향해 가리키며 웅성거렸다. 문승협도 방송을 듣다가 방송사고임을 직감하고 서둘러 방송실로 향했다. 최선경과 이정주가 앞서 뛰어가고 있었다.

방송부는 남녀아나운서학생을 한 팀 2개 조로 나누어 일주일씩 아침방송과 점심방송을 교대로 하였다. 이날은 문승협과 최선경이 아침방송, 김진철과 차여선이 점심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스텝은 추가로 모집한 5학년 학생들이 맡았다. 특별한 방송내용이 없을 경우 점심시간시작 20분간은 식사에 도움 되는 음악을 틀어놓았다. 그 시간에 맞춰 아나운서학생들도 식사를 하거나 교대로 식사했다. 이후 시간은 사연소개와 신청곡을 틀어주고 필요한 정보와 안내사항을 방송하였다.

문승협이 방송실에 다다른 이정주와 최선경을 불러 세웠다. 이정주는 돌아보며 빨리오라고 손짓했으나, 최선경은 그대로 멈춰 서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놀란 문승협이 이정주에게 눈짓으로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일단 들어가자고 하였다. 방송실에는 차여선과 스텝들이 나란히 서서 단단히 화가 난 오성희선생에게 혼나고 있었다. 문승협은 줄 옆에 함께 서서 야단맞으며 자초지종을 알았다.

차여선이 점심시간시작에 맞춰 음악을 틀어놓고 자랑삼아 5학년 여자후배스태프들을 스튜디오 안으로 불러들였다. 사적인 대화를 나누던 중에 스텝이 방송기기를 잘못 건드려 음악이 끊겼고, 차여선과 여자후배들이 최선경을 험담하는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그대로 방송되었다. 당황한 차여선이 얼른 교체하여 튼 테이프가 하필 정부의 금지곡이었다.

오성희선생은 방송 중에 후배스태프들을 스튜디오 안에 불러들이고, 최선경을 뒷담화 한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금지곡을 방송으로 내보낸 일에 무엇보다 크게 화냈다. 더구나 방송실에 왜 금지곡태이프가 있는지 물었으나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차여선이 얼떨결에 튼 ‘거짓말이야’는 대표적인 정부의 금지곡이었다. 이번이 마지막대통령이라는 박정희대통령주장을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로 불신과 장기집권을 연상시켜 국민반감을 선동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송창식의 왜 불러’는 공권력조롱과 정부불신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한대수의 물 좀 주소’는 물고문연상과 창법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이외에도 수많은 곡이 정부의 ‘가요정화운동’으로 금지된 상태였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왜색창법이라 하여 금지했으나, 나중에 박정희대통령의 애창곡이라는 이유로 해제하자, 취향에 따라 금지와 해제를 한다며 국민들에게 조롱받았다. 국민들은 금지된 이유를 정부와 다르게 해석하였을 뿐 아니라, 금지된 222곡이 모임과 집회에서 시대적 저항가요로 애창되고 구전되면서 오히려 더 유명해졌다.

이외에도 사회미풍양속단속이라며 침 뱉기와 노상방뇨 등을 경범죄로 처벌하였다. 퇴폐풍조를 단속한다며 연예인대마초사건이 터졌다. 두발에 미니스커트 단속, 고고와 블루스 금지로 춤추는 카바레를 단속하는 등, 거의 모든 일상이 정부의 통제아래에 있었다. 이런 세태이다 보니 방송부원들도 오성희선생이 불같이 화낸 이유를 충분히 이해했다.

오성희선생은 다시 발생되지 않도록 반면교사사례로 남기겠다며 경고하고, 방송실운영규칙과 방송부원행동규칙을 보완해 시스템상의 문제점을 개선하도록 지시하였다. 정작 피해를 입은 사람은 교내방송을 통해 공개적으로 저격받은 최선경이었다.

차여선이 최선경험담을 고의로 방송에 내보내지 않았더라도 학생들 사이에 문제로 부각되기 충분했다.

최선경은 그동안 차여선과 잦은 충돌로 못마땅하였으나 그때그때 잘 견뎌냈다. 그러나 참기 힘든 큰 사건만도 네 번째였다. 엊그제도 점심방송 교대문제와 누가 Main아나운서냐는 문제로 신경전을 치렀다. 이번에는 후배들까지 연루되어 무척 힘들었다.

오성희선생이 훈계를 마치고 나가자, 방송부장 이정주가 방과 후에 모이라고 하였다. 최근 방송부 내에서 반복되는 방송실수와 펑크까지 이런저런 갈등이 많았기에, 어찌 보면 쌓인 문제를 해소할 계기가 필요했다.

방과 후 방송부회의는 침묵으로 시작되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 사람은 평소 여성스러운 행동에 착하기로 소문난 김진철이었다. 김진철이 발언권을 얻어 차여선을 맹폭하면서 소용돌이에 빠졌다. 마치 기록해 놓은 노트를 읽는 마냥 과거 일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세세한 잘잘못까지 따졌다. 나름 정신세계가 강한 차여선이 한참 듣다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흥분한 김진철이 차여선의 눈물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결국 이정주가 나서 김진철을 제지하고 차여선을 달랬다. 어찌 된 일인지 몇몇 일들에 대해서는 차여선을 편들고 대변하기까지 했다. 문승협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하려는데, 최선경이 문승협 팔을 잡으며 그냥 있으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차여선은 서럽게 울면서도 자기편을 들어주는 이정주가 달리 보였다.

“으째, 내가 여선이 편든께 이상하냐? 다들 여선이한테 손가락질 한디, 우리까지 그라믄 쓰겄냐. 방송부장인 나라도 편을 들어줘야 숨통이 좀 트이제.”

“야 이정주, 그렇게 해서 여선이 숨통이 트이면, 선경이는?”

“진철아, 그런 뜻이 아니잖애, 선경이 문제는 여선이가 사과하겄제.”

“여선이는 선경이에게 사과할 마음은 있고?”

“…….”

“우자지간에 방송부 일은 방송부장인 내 책임이 큰께, 내가 사과하께. 미안하다, 진심으로.”

“나도 선경이한테 사과하께, 선경아 정말 미안하다, 진심이어.”

차여선의 사과에 아이들 시선이 최선경에게 갔다. 최선경은 팔짱 끼고 고개 숙인 채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문승협이 최선경심정을 말하려는 순간, 박진숙과 방송부5학년여자후배들이 노크하고 들어왔다.

“내가 웬만하믄 안 나설라고 했는디, 수업시간에 하도 괴로워하는 선경이를 보고 참다못해 쪼께 나섰어. 너 이리나와, 니가 정주제? 너도, 너는 승협이고?”

“…….”

“선배는 말로 한디, 어디서 건방지게 고개를 까딱이냐, 말로 하지 마까?”

“예, 맞아라우.”

“그라고, 나머지 아그들은 함께 있었던 증인, 맞냐?”

“예.”

박진숙이 차여선과 험담방송을 한 5학년여자후배들을 찾아가 잡도리하여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함께 왔다. 여자후배들을 한 명씩 지명하고 확인시킨 뒤, 사건을 재구성하듯 하나하나 설명했다.

“야는 이정주를 좋아한디, 이정주는 최선경을 좋아한다고 하고. 차여선과 야는 문승협을 좋아한디, 자꾸 최선경이 거슬린다고 해쌌고. 그래서 셋이 꿍짝이 맞아갖고, 공공의 적이 되어 분 최선경을 뒷다마 까부렀어. 근디, 여선이는 욕은 안 하고 그냥 듣기만 했다드라. 그래도 선배가 돼갖고, 후배들 사대나 맞추고 있으믄 쓰냐?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안 그냐 차여선?”

“…….”

“느그 뭐더냐, 얼른 사과 안 하고?”

“선배님, 죄송해요.”

“선배님, 잘못했어라우.”

“차여선, 니는 사과 안 할 거여?”

“여선이는 아까 사과했어야.”

“아야, 정주 니가 여선이 변호사여?”

“진숙아 됐어, 이제 그만하자, 그만하면 됐다.”

“잉 선경아, 인자 기분 풀어라잉. 안 그라믄, 오늘 이것들 머리끄댕이 싹 다 뽑아불란께.”

“알았어, 그럴게. 진숙아, 이제 후배들 돌려보내자.”

“느그들 가도 좋은디, 내가 한 말 명심해라잉. 안 그라믄 나 또 팔 걷어분다잉, 알겄냐?”

박진숙이 5학년여자후배들에게 명심하라는 말은 어떻게 해서든 최선경의 평판을 회복시키라는 명령이었다.

후배들이 돌아가자, 차여선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최선경에게 사과했다. 최선경이 차여선을 안아줬다.

화해의 장이 끝나고 모두 방송실을 나왔다. 문승협이 최선경에게 바래다주겠다고 했으나 거절하였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갈민주와 걸어가는 최선경뒷모습만 그냥 지켜보았다.

사실 문승협은 방송된 최선경험담을 정확히 듣지 못했다. 다음날 박진숙에게 물어보고서야 알았다.

“인자서 뭐 할라고 알라 하냐, 못 들었으믄 그냥 모른 체끼해.”

“아니, 선경이가 충격받은 것 같아서 그러지.”

“선경이가 실실 눈웃음침서 남자한테 꼬리 친다고.”

“남자?”

“너 말이어, 너.”

“아. 또 다른 말도 있어?”

“거그다가 선경이한테 이년 저년 욕도 하믄서, 너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고 씨부렁댔단다.”

“뭐야? 그런 말을 했다고?”

“잉, 째깐한 것들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제.”

“그래서 아이들이 자꾸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봤구나, 나는 단순히 그냥 흉본 줄 알았어.”

“염병, 흉이믄 다 흉이제, 단순한 것이 있고 심각한 것이 있대? 단순한 흉이믄 괜찮다고 누가 그라디?”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선경이한테는 니가 못들었는갑다고 할란께, 너도 그렇게 알고 처신해.”

“그 그래, 고마워.”

문승협은 험담내용을 알고 나니 최선경에게 많이 미안했다. 박진숙조언처럼 정말 모른척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되었다. 한편으로는 사건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모르고 조용히 넘어간 것과 방송실에 금지곡테이프가 있었던 것은 의문이었다.

최선경과 차여선이 화해를 하였지만, 피해자 최선경은 상처가 아무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반면 가해자 차여선은 금세 회복되었고, 뜻밖에 자신의 편을 들어준 이정주에게 호감이 생겼다.

박진숙에게 겁먹은 방송부5학년여자후배들이 각 반을 돌며 뒷담화 한 행동을 사과하면서 부정적이던 최선경소문도 점차 회복되었다. 최선경험담방송사건이 확대되지 않은 것은 오성희선생책임으로 조기수습되어 학교에서 문제 삼지 않아서였다. 금지곡테이프는 이정주아버지가 집에서 즐겨 듣던 것이었다. 이정주가 방송할 음악을 고르려고 방송실로 가져온 카세트테이프들 속에 들어있었다.


6월 월말고사가 끝난 토요일, 오성희선생이 방송부원들에게 영화를 본 뒤 맛있는 중화요리를 먹자고 하였다. 화해와 단합을 통하여 앞으로 더욱 잘해보자는 의미였다. 방송부원들은 선생님의 한턱내기에 환호했다.

문승협은 영화‘엄마 없는 하늘 아래’를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 흘렸다. 엄마가 없는 영화주인공의 삶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기 일처럼 빙의되었다. 남들에게 들킬까 봐 숨죽여 울었다.

오성희선생과 최선경은 문승협마음을 알기에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문승협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영화가 끝난 후, 문승협은 화장실에 들러 거울에 비친 충혈된 눈을 비비며 수습했다. 혹시라도 최선경이 눈치챘을까 봐 신경 쓰였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화장실에서 나오자, 최선경이 입구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아?”

“화장실에 사람들이 많네. 다들 어디 갔어?”

“응, 먼저 식당으로 갔어. 괜찮은 거지?”

“뭐가?”

“아 아니다. 어서 가자, 밥 먹으러.”

문승협은 묻는 뜻을 알지만 인정하기 부끄러워 회피했다. 최선경도 심정을 알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중국식당에 들어가니 오성희선생과 방송부원들이 손들어 반겼다. 옆테이블에 남자어른들이 요리가 나오기 전인지 단무지와 양파를 안주삼아 배갈을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염병하네 참말로, 뭔 세금을 시도 때도 없이 걷어?”

“월급 타믄 귀신 같이 알고 뺏어 간단께.”

“돈이 내 손을 거쳤다가 싹 사라져 불고 남는 것이 없어, 참말로 환장하겄다.”

“그란께, 우리 돈은 임자가 없어 부러.”

“물건값은 또 으짜고, 물가가 하루 멀게 올라갖고, 인자는 못살겄어.”

TV에서 부가가치세와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한다는 정부발표가 나왔다. 당장 월급에서 나가는 지출 때문에 어른들 비판이 들끓었다. 체감하는 생활물가도 덩달아 눈에 띄게 올라 서민들 불만이 팽배했다.

국민학교6학년방송부원들은 세상물정과 상관없이 짜장면과 군만두에 탕수육까지 맛있게 먹어치웠다. 오성희선생이 낸 한턱에 턱이 빠질정도였다. 오성희선생바람처럼 화해와 단합은 대성공이었다.

6월 월말고사도 6학년 3반이 연속 1등을 하면서 엄정한선생 주가도 연속상한가였다. 방송부내분도 최선경과 차여선이 친해지는 속도만큼 급속도로 회복하여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금요일오후 특별활동시간에 방송부와 연극부가 합동 홈룸을 하였다. 모두 6학년 8반 최선경교실에 모였다. 문승협은 모른척하며 최선경 옆자리에 앉았다. 문승협이 최선경책상서랍을 슬쩍 살펴보다 묘한 떨림을 느꼈다.

“왜?”

“아 아냐.”

“어허, 훔쳐보다 들킨 사람처럼 얼굴까지 빨개지고. 아무것도 없어, 봐봐.”

“아냐, 너의 향기가 나는 거 같아서.”

“뭐야, 이런 변태.”

연극부가 교단을 무대 삼아 로미오와 줄리엣 명장면을 시범 보였다. 연극부선생이 방송부실력도 한번 보자며 대본을 주었다. 오성희선생이 문승협과 최선경을 지명하며 대본을 건넸다. 문승협과 최선경이 쑥스러워하며 마지못해 교단으로 나갔다. 연극부선생이 간략히 연출상황을 설명했다.

‘줄리엣이 다른 남자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를 피해 약을 먹고 가사상태에 빠진다. 마침 그리워하며 돌아온 로미오가 줄리엣이 죽은 줄 알고 자살한다. 깨어난 줄리엣은 로미오를 품에 안고 울다 따라 죽는다’

연극부와 방송부 아이들이 조용히 지켜보았다. 망설임 끝에 최선경이 문승협을 껴안고 흐느끼며 줄리엣이 로미오를 가슴에 품고 우는 장면을 연기하자, 아이들 모두 책상을 치며 야단법석이었다. 아이들은 최선경가슴에 문승협 얼굴이 닿은 순간에 집중하였다. 최선경과 문승협보다 아이들이 더 부끄러워했다. 따라 웃으면서 조용히 하라는 지도선생들의 제지에도 계속 술렁였다. 질투심을 느낀 이정주가 차여선손을 덥석 잡으며 자기들도 해보겠다고 나섰다. 차여선은 멈칫하다 이정주의 넘치는 박력에 못 이기는 척 무대로 따라갔다. 아이들이 이번에도 차여선 가슴에 이정주얼굴이 닿는 장면에서 또 호들갑 떨었다. 이정주가 부끄러워하는 차여선에게 훌륭한 연기였다고 박수로 치켜세우며 어색함을 감췄다. 이어서 연극부장 김주동이 팬터마임을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문승협도 방송부대표로 김주동동작을 따라 흉내 냈다. 연극부선생이 문승협에게 소질 있다고 칭찬하며 연극부스카우트를 제의하자, 오성희선생이 절대 안 된다고 정색하듯 하며 즐겁게 마무리되었다.

“이러다 너 배우바람 드는 거 아냐?”

“하하, 그 정도 아니라는 거 내가 잘 알아.”

“내일 토요일인데 뭐 해?”

“특별한 일은 없는데?”

“그럼, 내일 수업 끝나고 우리 집에서 놀자.”


토요일방과 후, 문승협과 최선경이 교문을 나섰다. 김철종과 제갈민주가 따라붙었다.

“어이 문승협씨, 어딜 그리 급히 가시까?”

“아, 어디 좀 가야 해서?”

“어디?”

“이 있어.”

“아야 재잘아, 승협씨가 장모님 댁에 가는가 본디, 우리는 빠지자?”

“장모님이라니?”

“어허이, 이 양반이 누굴 합바지로 아나.”

“흐흐흐, 선경이 집서 느그 둘이 뭐 할라고 그라냐?”

“뭘 뭐 해, 그 그냥 노는 거지.”

“야 됐다, 같이 가자. 얼굴은 금세 홍당무돼서, 거짓말도 참 못해.”

문승협이 적당히 둘러대고 김철종과 제갈민주의 심문을 빠져나가려 했으나, 얼굴이 빨개져 말까지 더듬는 바람에 들켜버렸다. 최선경이 지켜보다 체념하고 같이 집에 가서 놀자고 하였다. 김철종이 처갓집 운운하며 눈치 없이 계속 놀렸다. 문승협은 최선경눈치를 보며 걸었다. 그때 박동후회장의 저택관리인 임집사가 지나가는 문승협을 알아봤다.

“아야, 승협이 아니냐?”

“안녕하세요 아저씨.”

“오랜만이다잉, 어디 가냐?”

“승협이 처갓집에 간다요 아자씨.”

“처갓집?”

“아 아니에요, 친구 집에 놀러 가요.”

“허허허, 승협이 친군가 본디 재밌다잉. 그래, 처갓집은 어딘디?”

“하하, 이 근처예요. 얘들아 인사해, 저기 큰집을 관리하시는 아저씨 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신게라우. 왔다메, 집이 허벌나게 크다잉. 아자씨, 우리 구경 좀 시켜주쑈.”

“그래라, 들어가까?”

“아저씨, 친구 집에 들렀다가 이따 갈게요.”

“그럴래? 그라믄, 이따 승협이 니 각시랑 다 대꼬 와, 허허허.”

“야가, 승협이 각시여라우.”

“아따 참하게 생겼네, 키도 크고 이쁘다잉.”

“안녕하세요.”

“그려, 이따 보자잉.”

임집사가 웃으면서 가자, 조신하게 인사하던 최선경이 돌변해 김철종머리를 쥐어박았다.

“너는 진짜 못 말린다 내가.”

“아, 오메 아픈 거. 그래도 아니라고는 안 하드라잉, 히히히.”

“너 진짜 죽을래?”

“으째 너는 철종이만 드잡냐. 아니라고 하믄 될 것인디, 지가 가만히 있었음시롱, 흐흐흐.”

“민주 너까지 그럴래?”

“어른들은 다 장난인 줄 안디, 찔린 사람이 이상한 거 아니어?”

“긍께 말이어, 무담시 나한테만 뭐라 한단께.”

“금방 요로코롬 두 손 모으고, 안녕하세요 하드만. 조신히 인사할땐 언제고, 갑자기 돌변해서 난리네.”

“아따 아픈 거, 재잘아 여그 멍들었지.”

“으짜까잉, 우리 쫑이 안 그래도 나쁜 머린디 더 멍청해지겄네, 호호호.”

“아쒸, 너는 잘 나가다가 말을 고따구로 하냐, 반에서 8등 하는 멍청이 봤어?”

“야, 그러고 보니까, 너희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승협아 그치?”

“응, 진짜 잘 어울린다.”

“알았어, 그라믄, 우리 천년 언약하께.”

“그러자 쫑아, 천년 뒤에 꼭 보자잉.”

최선경이 씩씩거리며 화를 내봤지만 김철종과 제갈민주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문승협도 동태를 살피며 합동공격을 시도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최선경과 문승협이 웃으며 앞장서 집으로 갔고, 뒤따라가는 제갈민주와 김철종도 마냥 즐거워하였다.

“와따메, 사위 왔다고 장모님이 무리한 거 아니어?”

“철종아, 그만 좀 하지.”

“간짜장에다 탕수육에 군만두 서비스까지, 오늘 배 터지겄는디.”

“쫑아, 탕수육 묵어봐, 달달하니 여간 맛나다.”

최선경엄마가 약국에서 전화로 시켜준 중화요리를 맛있게 먹은 후, 최선경안내로 이사한 집을 둘러보았다. 복도와 거실 바닥에 다다미가 깔린 2층목조가옥이었다. 아담한정원에 작은 연못도 있었다. 최선경의 2층방에서 길 쪽과 정원 쪽이 다 보였다. 최선경과 친구들은 2층과 아래층 거실을 오가며 신나게 놀았다.

김철종이 집안에만 있어 답답하다며 박동후회장의 저택을 구경 가자고 하였다.

친구들이 박동후회장저택에 다가갈수록 위압감에 압도되었다. 육중한 대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 엄숙한 기류에 휩싸였다. 문승협도 저택에 올 적마다 느낀 감정이었다. 임집사가 마중 나와 컹컹거리는 셰퍼드를 진정시키며 안내하겠다고 했다. 문승협이 알아서 하겠다며 친구들을 이끌고 앞장섰다.

현관 앞 입구정원에 일본화산폭발 때 그 씨가 목포까지 날아와 싹텄을 것이라고 전해지는 암수한 쌍의 자생향나무와 종려나무·얼룩식나무·다매화·은테사철나무·모과나무·배롱나무·사스끼철쭉 등이 심어져 있었다. 입구정원 좌측을 돌아서 오래된 야자수와 거목들이 둘러진 산책로를 지나가면 안뜰정원이었다. 안뜰정원은 잔디 깔린 마당에 후박나무∙후파향나무·종가시나무 등이 옹기종기 자리하였다. 높낮이에 따라 잘 다듬어진 고송과 조경수목을 배경으로 석탑과 석등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줄 섰다. 둥그스름 편평한 돌이 징검다리처럼 안뜰정원을 가로질렀다. 잔디가 끝나는 곳에 크고 작은 바위들로 조성한 폭 1미터 정도 긴 수로가 넓은 연못과 연결되었다. 유달산에서 내려온 물이 긴 수로를 통해 연못을 거쳐 흘러갔으며, 수로 위로 나무다리가 놓여있었다. 나무다리를 건너 조금 경사가 있는 언덕을 올라가니 동서양이 조화된 화원이 나타났다. 괴석과 잘 어우러진 벚나무와 동백나무, 난대성 상록수목이 울창한 임천정원이었다. 히말라야시이다·주목·삼나무·편백나무·종가시·위성류·다매화 등으로 빈틈이 없었고, 수풀 속으로 좁다란 시냇물이 흘렀다. 풀과 이끼 내음이 은은하게 나는 임천정원에서 동산언덕 후원까지 이어진 숲은 옛날로 시간여행을 하는 착각마저 일으켰다. 후원은 언덕 위 평편한 잔디마당을 중심으로 그 위쪽과 아래쪽에 갖가지 나무들이 터를 잡았다. 나무종류도 113여 종으로 한국야생종 37종, 일본원산종 39종, 중국원산종 25종, 기타 12종이었고, 5층석탑과 7층석탑이 자태를 뽐냈다.

문승협은 친구들을 인솔해 오디와 살구, 조금은 덜 읽은 산딸기를 따먹으며 동산언덕에 모양 좋게 자리 잡은 후원으로 향하였다. 후원입구를 지키는 해태돌상에 올라타고 잔디밭을 뒹굴며 놀다가 파라솔로 햇볕을 가린 썬베드에 누워 잠시 더위를 피했다.

“여기 정원이 1930년대에 지어졌고, 호남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일본식 정원이래.”

“승협아, 너는 여그를 으째 잘 아냐?”

“자주 오기도 했지만, 한동안 여기서 살았거든.”

“아따, 여그 동산에서 내려다 본께는, 크기도 크지만 진짜 무자게 널다잉.”

“승협아, 이제 그만 내려가자.”

“그래, 이쪽으로 내려가자, 여기가 절벽 같지만 지그재그 계단이 있어.”

동산후원에서 입구정원으로 바로 내려가는 길이지만 조금 가팔랐다. 문승협이 내려가다 겁먹은 최선경손을 잡으며 김철종에게 제갈민주를 살피라고 하였다. 최선경이 긴장감에 내려와서인지 이마에 땀이 맺혔다. 문승협이 이를 보고 신비한 비밀장소를 보여주겠다며, 후원 쪽 별채 뒤로 가 동그란 철문을 열었다. 한여름에도 이가 떨릴 정도로 추운 캄캄한 동굴이었다. 최선경이 문승협에게 떠밀려 몇 걸음 안으로 들어가더니 오싹한 기운에 몸을 움츠리며 나가자고 했다. 문승협이 갑자기 정색한 표정으로 돌변하였다.

“최선경, 너를 여기에 가둘 거야.”

“뭔 소리야, 장난치지 마.”

“철종아, 민주 데리고 빨리 나가.”

“잉, 재잘아 얼른 나가자.”

“악, 왜 그래. 진짜 왜 그래, 무섭단 말이야.”

김철종이 제갈민주를 밀치며 데려나가고, 문승협이 얼른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려 하자, 최선경이 까무러치듯 소리 지르며 주저앉았다. 문승협은 예상치 못한 최선경반응에 당황했다. 재빨리 최선경에게 다가가 장난쳐서 미안하다고 사과하였다. 재미있다며 깔깔대던 김철종도 심각한 분위기에 걱정스러워했다. 최선경이 문승협의 부축을 받고 일어서 눈물 없는 눈을 닦으며 서러워하였다. 문승협의 재차 사과에도 대꾸 없이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문승협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랐다. 최선경이 굴을 빠져나온 순간 문승협등짝을 세게 때렸다. 깜짝 놀란 문승협모습을 보고 깔깔 웃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양손을 들어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그제야 문승협과 김철종은 자신들이 역으로 속은 걸 깨닫고 허탈해하였다.

“호호호, 놀란 표정이라니. 민주야 봤니, 애들 완전 겁먹어서 울라 그랬어.”

“흐흐, 웃겨갖고는 진짜, 어서 고따구 장난질이여.”

“오메오메, 선경씨 배우하쑈. 연기가 아조 기가 막혀 불구만, 완전 속았단께.”

“우리한테는 안 통해, 너희는 우리 손바닥 안에 있으니까 까불지 마.”

“와, 나 진짜 놀랐어. 선경이가 기겁해서 쓰러지는 줄 알고, 진짜 내가 식겁했다.”

최선경이 문승협에게 혀를 날름하며 놀렸다. 문승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택본채로 걸었다.

별채만도 5칸에 본체가 12칸, 마루는 나무에 방바닥은 전부 다다미였다. 응접실과 손님대기 방에는 호랑이 박제와 매머드급 상아, 어른 크기만 한 자수정원석이 진열되었다. 각방마다 고가의 그림이 벽에 걸렸고 각양각색의 골동품 같은 많은 유물들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문승협은 친구들과 다 둘러본 후, 집안일을 하는 해남댁이 가져다준 딸기와 참외를 먹었다. 친구들이 임집사에게 문승협의 어린 시절이야기를 듣는 중에, 진외가증조할머니를 보필하는 순영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증조할머니 일어나셨는디, 인사드려야제?”

“네.”

문승협이 진외가증조할머니방에 들어가 인사드렸다. 따라 들어온 임집사가 농담 삼아 한마디 했다.

“어르신, 승협이 각시도 왔는디, 와서 인사하라고 하까라우?”

“각시? 니가 언제 장가갔냐, 늙어서 기억이 없은께. 각시랑 같이 왔으믄, 당연히 와서 인사해야제.”

“아녜요 할머니, 친구예요. 아저씨, 할머니께 장난치면 어떡해요, 진짠 줄 아시잖아요.”

“허허허, 괜찬해야. 어르신한테 요즘 즐거운 일이 없은께, 재밌자고 그런 것이어.”

임집사 말을 알아들은 순영누나가 최선경과 친구들을 불러왔다. 얼떨결에 불려 온 친구들은 큰절로 인사하고 문승협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라믄, 누가 니 각시냐?”

“여그 참하게 생긴, 이 색시여라우.”

“증조할머니, 각시가 아니고 친구예요 친구.”

“아따 참하다잉, 근디 언제 식을 올렸다냐?”

“할머니, 식은 안 올렸고요, 나중에 커서 할 거예요.”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많은 연세로 기억을 잘 못하고 잘 알아듣지 못했다. 최선경이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포기한 듯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라믄 혼약은 했다냐?”

“아녜요 할머니, 커서 할 거예요, 좀 더 커서요.”

“시방 뭔 말이대, 각시라믄서?”

“나중에요, 커서, 어른이 돼서 결혼할 거예요.”

“그라믄 어찌 될란가 아직 모르그만?”

“네 할머니.”

“근디 임집사는 각시라 하냐, 늙은이 놀리믄 못써.”

“어르신이 나서서 낼이라도 식 올려주쑈, 그라믄 되지라우. 어저께도 죽을 때 죽더라도 승협이 장가보내고 죽는다고 말씀하셨잖애요. ”

“증조할머니, 저 20년 있다 장가갈 거예요.”

“그라믄, 나가 백 하고도 열 살이 넘는디, 그때까지 살겄냐?”

“그럼요, 그때까지 건강하게 사셔야 해요, 아셨죠?”

“어르신은 아직 정정하셔라우, 나이계산도 잘하시고, 허허허.”

“그라믄 연애 질 말고 이 할미만 믿고 있어, 내가 부잣집 이쁜 색시 묶어줄란께.”

“네, 증조할머니만 믿을게요.”

“아야 아가, 너도 내 맘에는 든다만, 내손주 승협이한테 잘해야 써. 이놈이 얼마나 듬직하고 진국인지 아냐?”

“네 알아요 할머니. 그리고 제 이름은 선경이에요, 최선경.”

“잉, 선경이. 남자는 잘 골랐다, 남자 보는 눈이 있그만. 근디, 어디 아프냐?”

“네? 아 아니요, 이제 다 나았어요.”

“늘 건강해야 써, 안 그라믄 내 손주는 택도 없다잉.”

“네.”

“근디, 느그 둘은 뭐시냐?”

“증조할머니, 둘 다 제 친구예요.”

“느그 둘도 연애하냐? 잘 어울린다, 식 올려 부러. ”

“허허허, 예 할무니, 제 각시 재잘이어라우.”

“쫑아, 앞서 가지 마라잉.”

진외가증조할머니가 한사코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였다. 문승협이 친구들 때문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최선경이 대뜸 맛있는 거 주시면 먹겠다고 하였다. 최선경 덕분에 문승협과 친구들은 진수성찬에 식사를 했다.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본인 식사는 미룬 채, 증손자의 밥을 뜬 수저 위에 반찬을 놔주기 바빴다. 간혹 최선경밥그릇에도 얹어줬다. 문승협은 사랑받아 감사한 마음으로 진외가증조할머니를 받들어 식사하였다. 진외가증조할머니가 식사 후반에서야 수저를 들었다. 이번에는 최선경이 반찬을 집어 수저에 놓아드렸다. 흡족한 웃음으로 곧잘 드셨으나 식사량이 많지 않아 금방 마쳤다.

“증조할머니, 이제 밤이라 집에 가야겠어요.”

“잉, 가야제. 가만있어봐, 용돈을 좀 줘야 안 쓰겄냐.”

“괜찮아요, 저 용돈 아직 있어요.”

“씨잘데없는 소리 말어, 어른이 주믄, 네 감사하요 하고 받는 것이어.”

“네, 감사합니다.”

“우리 증손주며느리도 줘야제, 살림에 보태라잉?”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근데 너무 많아요.”

“넣어둬야, 맛난 것도 사 묵고, 느그 둘 살림에 보태란 말이시.”

“괜찬해, 어르신이 주신건께 받아둬.”

“그래도 너무 많은데.”

“할미가 돈 뒀다 어따 쓰겄냐, 졸 좋게 써. 으나, 느그는 아이스깨끼나 사 묵어.”

“예, 맛나게 묵으께라 할무니.”

진외가증조할머니가 치마를 들춰 속바지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문승협에게 만원을 주었다. 최선경은 2만 원을 받고 놀랐다. 그냥 받아 두라는 임집사말에 받기는 했으나, 너무 큰돈이라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초급공무원 월급이 5만 원 정도니 받은 액수치고는 많았다. 문승협은 용돈보다 진외가증조할머니말씀을 듣는 중에 오락가락하는 기억력이 걱정되었다. 인사하고 나올 때도 아쉬워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속상하였다.

문승협과 친구들은 임집사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최선경집으로 가방을 가지러 갔다. 김철종이 퇴근해 집에 와있는 최선경부모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최선경아버지가 태선화학 박동후회장의 저택구경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문승협의 진외가증조할머니에게 인사하고 식사했던 이야기를 듣고는 김철종과 함께 최선경을 놀리며 재미있어하였다.

“그러니까 철종아, 그 할머님이 선경이에게 증손주며느리라면서 용돈을 줬다고?”

“예, 그랬단께라우. 느그 둘 살림에 보태라믄서, 지폐 두 장을 딱 주시드란께요.”

“살림? 어쩌냐 이제, 승협이가 책임 안 지면 우리 딸 시집 다 갔네, 하하하.”

“어휴, 그만 좀 하셔 들. 엄마, 승협이 증조할머니가 2만 원이나 주셨어, 어떡하지?”

“어르신이 너무 큰돈을 주셨구나, 2만 원이면 선경이 1년 치 용돈도 넘는데.”

“그러니까요. 나오면서 임집사아저씨께 돌려드렸는데, 증조할머니가 돌려받은 걸 아시면 본인이 큰일 난다고 하시면서, 한사코 그냥 가져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냥 받아왔긴 왔는데.”

“나도 재잘이랑 천 원씩 받았어라우.”

최선경엄마가 생각 끝에 문승협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했다. 문승협이 증조할머니뜻이라 그럴 수 없다고 하자, 최선경이 괜한 고집 피우지 마라고 하였다. 결국 문승협이 만원을 받고 최선경에게 나머지 만원을 맡기는 조건으로 합의했다.

“아따, 부부사이가 겁나 좋다잉, 서로 돈도 맡기고 말도 잘 듣고.”

“철종아 그만 까불어라, 그러다 제명까지 못살겠다.”

“승협아 죽일 때 죽이드라도, 아까침에 아롱사태랑 갈비를 다시 한번 묵게 해 주믄 안 되까?”

“그라고 본께, 같은 고긴디 우리 집서 먹은 것이랑 맛이 다르드란께.”

“재잘아 너도 맛이 다르디? 재벌 집이라 그란가, 암튼 맛이 묘하게 땡겨부러.”

“호호, 맛있었나 보구나, 아줌마가 도전해야겠네.”

“이제 늦었으니 집에 가야지.”

“네, 밤늦게까지 죄송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딸내미, 내 사위 잘 배웅하고 와, 하하하.”

“하하, 아저씨, 그만 놀리세요.”

“왜, 증조할머니가 부잣집 예쁜 색시 묶어준다니까, 기다려 보려고?”

“아이참, 선경이 너까지 그러냐.”

최선경이 진외가증조할머니가 문승협에게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와중에도 서운해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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