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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25.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7)

제헌절과 함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국내외에서 대형사건사고가 발생하였다.

옆나라 중국에서는 모택동(마오쩌둥) 사망으로 모택동의 추종자인 문화혁명 4인방이 숙청되었다. 작년 1월 주은래(저우언라이)의 서거 이후 문화혁명 4인방에 의해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부주석이자 정치국위원총참모장에서 밀려났던 등소평(덩샤오핑)이 모택동의 후계자인 화국봉(화궈펑)의 동의를 얻어 복직했다. 그러나 등소평과 화국봉은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둘러싼 권력투쟁을 예고하였다.

국내에서는 충북옥천 지탄역 열차충돌사고로 160여 명이 사망한 참사가 있었다. 백건우와 윤정희의 피랍미수사건이 발생했고, 홍수와 가뭄에 폭염으로 힘겨운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지 2주지나, 문승협남매는 데리러 온 작은 외삼촌 이우철을 따라 외갓집으로 갔다.

외갓집 가는 길 여름풍경이 겨울방학에 왔을 때와 또 다르게 아름다웠다. 넓은 들녘에 노란 벼들이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높이 치솟은 초록 미루나무들은 신작로 양쪽에 적당한 간격으로 도열해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들이 보디가드처럼 정중동 은밀히 따라다녔다.

외갓집울타리 주변에 앙상했던 갈색나무들이 풍성한 잎으로 만든 녹색옷으로 갈아입었고, 겨울철 땔감나무가 쌓였던 곳엔 황소와 송아지가 드러누워 파리를 쫓았다. 화단에 쪼그라들어 볼품없던 꽃들은 생기 넘치는 울긋불긋한 화장을 하고 나비와 벌을 유혹하였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더라도 외할머니 윤주순의 손주사랑은 변할리 만무했다. 외삼촌들과 행랑아범부부도 문승협남매를 여전히 예뻐하였다. 광주에 양장점을 차린 막내이모 이항경만 없을 뿐, 문승협남매를 반겨주는 어른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문승협은 외할머니향기를 맡으며 모처럼 평안히 잠들었다. 평소 자주 꾸던 악몽도 없이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외할머니가 긴 머리를 참빗으로 곱게 빗어 쪽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었다. 항상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단아한 한복을 입은 외할머니였지만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상징과도 같았다. 만약 신사임당이 살아있었다면 외할머니와 비슷한 모습일 것이라고 상상했다.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외갓집을 둘러보았다. 토끼와 닭이 지난겨울방학 때보다 마릿수가 줄어 보였다. 뒷동산 감나무에 6월이면 져서 없을 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어 신기하였다. 기후이상은 상상조차도 못했다.

문승협남매는 외할머니손맛이 담긴 시원한 콩국수로 점심을 먹었다.

문승협이 뒷동산그늘에 앉아 문현아에게 주려고 떨어진 감꽃을 실로 꿰어 목걸이와 팔찌를 만드는 중이었다.

뒷동산 담장옆길을 지나가던 동네아이들이 담장틈새로 문승협을 발견하였다. 자기들끼리 구시렁거리더니 ‘야, 낭만보이’라고 불렀다. 응답이 없자 다시 ‘야, 감꽃보이’라고 자극했다. 잠깐 쳐다볼 뿐 아무 대꾸 없는 문승협에게 한층 큰 목소리로 ‘마마보이’라고 불러댔다. 동네아이들은 지난겨울 방학 때 썰매를 타다 엄마에게 울며 달려간 문승협을 기억하고 있었다. 별칭까지 붙여 부르며 호기심을 보였으나, 반응 없는 태도에 무시받았다고 생각했는지, 합창하듯 ‘감꽃보이, 마마보이’라고 놀렸다. 행랑아범이 듣다못해 큰소리로 야단쳐 쫓아 보냈다. 동네아이들이 도망가면서도 ‘서울 놈은 낭만보이, 감꽃보이, 마마보이’라며 운율에 맞춰 놀림 삼아 반복하였다. 문승협은 웃음으로 넘겼으나, 문현아가 단단히 골이 나서 뛰어가더니 큰외삼촌 이우대에게 일렀다.

“이 노무 시끼들 어디 있냐, 어서 내 조카를 놀려?”

“괜찮아요 외삼촌, 아저씨가 야단쳤더니 다 도망갔어요. 하하, 현아야 화났어?”

“우리 현아를 화나게 하믄, 이 큰외삼촌이 가만 안 둘라니까.”

이우대가 뛰어와 큰소리로 외치고 문승협에게 윙크하며 문현아를 달랬다.

이후에도 동네아이들이 뒷동산 담장을 지나갈 적마다 ‘서울 놈은 낭만보이, 감꽃 보이, 마마보이’를 노래처럼 불렀다. 문승협은 그때마다 발끈하는 동생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며칠째 태양이 강렬했다. 지속되는 폭염과 가뭄으로 마을에 있는 작은 저수지가 말라갔다. 이우대와 이우철이 그물을 챙기며 행랑아범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남매가 이를 듣고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집에서만 무료하게 뒹굴던 차였다.

“행랑아범은 양동이 하나 챙기쑈.”

“그물도 하나 더 챙기까, 그것이 낫겄는디.”

“그라쑈 그라믄.”

문승협남매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부지런히 외삼촌들을 따라갔다. 작은 저수지에 물이 없어서 저수기능을 상실해 보였다. 깊은 곳이 겨우 어른배꼽높이였고, 한가운데는 문현아무릎 높이였다. 어른들이 한쪽에서 물고기를 몰고 반대쪽에서 그물을 받쳐 떠서 물고기를 잡았다.

문승협이 저수지 가운데쯤에서 양동이를 들고 있는데, 문현아가 돕겠다며 들어오다 넘어져 허우적거렸다. 문승협이 도와주려다 양동이를 엎어버리는 바람에 잡아 논 물고기 몇 마리가 도망쳐버렸다. 문승협남매는 흙탕물에 온몸이 젖었고, 얼굴에 튄 물을 닦으려다 진흙으로 얼굴이 범벅되었다. 서로 몰골을 쳐다보며 깔깔거렸다. 문승협이 진흙 묻은 손을 물에 헹군 뒤 문현아얼굴에 묻은 진흙을 닦아주자, 문현아도 따라서 문승협 얼굴을 정성껏 닦아줬다. 한 시간여 동안 잡은 물고기가 제법 되었다. 꽤 큰 붕어와 장어가 여러 마리에 미꾸라지 같은 작은 민물고기도 있었다. 저수지 안쪽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음습한 곳에서 물뱀이 나와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물고기로 반쯤 찬 양동이를 챙겨 들고 개선장군처럼 모두 즐겁게 집으로 갔다.

가뭄에 샘물이 풍족하진 않았지만, 큰외삼촌이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 기른 시원한 샘물로 등목을 했다. 그러는 동안 행랑아범이 민물고기를 손질하였다. 저녁식사로 민물매운탕과 장어구이를 곁들여 먹었다.

윤주순은 맛있게 먹는 외손주들 모습에 흡족해하면서도, 행여 눈치 보느라 더 달란 소리를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 밥을 더 주었다. 문현아가 배불러 못 먹겠다며 응석 부렸다. 반면 문승협은 쌀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워 배불렀음에도 미소 지으며 받아 들었다. 외할머니에게 반찬을 놔달라며 보란 듯 또 먹어치웠다. 윤주순은 제비새끼처럼 잘 받아먹는 손자가 사랑스럽고 예쁘기만 했다.

문승협은 부족함 없이 주고픈 외할머니사랑을 알았다. 그렇게 표현하는 외할머니마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찌 보면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는 사람이 외할머니 윤주순이었다. 유일하게 외할머니를 통해 사랑받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하였다. 문승협에게 외할머니 윤주순은 유일한 사랑이었다. 외할머니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배불러 죽어도 한 공기를 더 먹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사랑해서 한 공기 더 준 밥을 비록 꾸역꾸역 먹더라도, 배부른 불편함을 숨기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문승협이 외할머니를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불만을 참는 것이 가식이라며 솔직하게 대해야 한다고 모두가 외치더라도, 불평을 참아내고 원하는 대로 들어주는 것이 사랑이며, 상대가 사랑해서 베푼 것이 설사 강요가 되고 불편할지언정, 무조건 응답해 주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 지금 문승협이 생각하는 사랑이었다.

문승협은 외할머니의 사랑 가득한 밥 한 공기를 더 먹은 대가로 소화불량에 호흡곤란을 겪었다. 밤늦은 시각에 가기 무서워하는 화장실도 두 번이나 다녀와야 했지만 무척 행복하였다. 쌀밥과 음식이 맛있기도 했고, 외할머니사랑을 과식해서였다. 지난겨울 방학 때 외할머니가 떠주는 닭죽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속 받아먹은 경험이 있었기에, 어떤 대가가 따를지 뻔히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이틀 동안 가뭄 끝 단비가 내렸다. 첫날은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쏟아져 무서울 정도였다.

둘째 날은 비가 내리다 멈추기를 반복하고 바람도 잔잔해졌다. 문승협남매는 사분합문이 활짝 열어진 안대청마루에 엎드려 그간 밀린 방학숙제를 했다. 문승협은 숙제하다 지치면 멍하니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관조하였다. 빗줄기가 가늘어지면서 처마에서 물방울이 일정한 시간차로 떨어졌다. 안대청마루에서 사분합문틀을 액자로 바라본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운무가 낀 먼산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다음날 아침 먹구름이 걷혔다. 비 온 뒤 청명한 날씨가 문승협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였다. 동네마실을 나갔더니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고 시냇가에도 물이 찰랑찰랑 넘쳤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물고기 여러 마리가 열심히 헤엄치고 다녔다. 이 사실을 작은 외삼촌에게 쪼르르 달려가 알렸다.

오후에 작은 외삼촌과 소몰이하여 마을 건너편 산에 갔다. 바구니를 든 한 무리 동네아이들이 먼저 와있었다. 문현아가 오빠를 놀렸던 동네아이들이라며 경계했다. 동네아이들 중에 까무잡잡한 문현아 또래 여자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아야, 느그 어서 왔냐, 서울서 왔냐?”

“목포에서 왔는데.”

“근디 으째 서울말 쓴대?”

“서울에서 살았으니까.”

“여그는 뭐더러 왔냐?”

“외할머니집에 놀러 왔는데.”

“아니, 여그 산에 말이어.”

“무슨 상관이야, 너희 산이야?”

“아따, 친하자고 물어본 건디 그라냐.”

“무슨 친하려는 애들이 우리 오빠를 놀리냐?”

“나는 느그 놀린 적 없는디야.”

“저기 저 애들이랑 놀렸잖아, 내가 다 기억한다고.”

문현아가 시종일관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동네여자아이가 뛰어가더니 언니로 보이는 더 까무잡잡한 아이를 데려왔다.

“니 이름이 뭐시냐?”

“…….”

“산딸기 따러 갈라냐? 갈라믄 따라와.”

문현아는 산딸기에 현혹되어 경계심을 잊었다. 문승협에게 묻지도 않고 따라갔다. 한참 지나서 반지와 팔찌에 목걸이와 왕관까지, 토끼풀로 만든 액세서리로 치장하고 왔다.

“우와, 오빠 몰래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공주님이 돼서 돌아왔네. 그 양손에 든 건 뭐야?”

“산딸기, 저 언니가 따줬어. 이것도 토끼풀로 다 만들어줬어.”

문현아가 산딸기를 오빠손에 놓고, 호주머니에서 풀잎을 꺼내 풀피리를 불었다. 씩 웃으며 뽐내더니 동네아이들을 향해 홀연히 뛰어갔다. 집에 돌아갈 즈음 문현아가 다시 왔을 때는 치마폭에 산딸기가 가득했다. 동네아이들과 헤어지며 주고받는 인사에서 많이 친해졌음을 느꼈다.

“현아야, 담에 또 보자잉.”

“그래 언니, 잘 가.”

“담엔 봉숭화 물들여 주께.”

“알았어.”

문승협은 문현아치마에서 산딸기를 한 움큼 집어 호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도착해 외할머니에게 선물이라며 몽땅 건넸다. 문현아는 산딸기를 따고 토끼풀로 치장한 일과 봉선화물들이기로 한 약속까지 외할머니에게 자랑삼아 한참 떠들었다. 윤주순은 찬찬히 이야기를 다 들어주었다. 치마에 산딸기물이 들었으니 빨자며 반바지를 꺼내 갈아입혔다.

해 질 녘에 이우철이 문승협남매를 대동해 다시 집을 나섰다. 논두렁사이로 흐르는 시냇가에 주낙을 놓았다.

“외삼촌, 이렇게 하면 고기가 잡혀요?”

“잉, 밥풀이나 지렁이를 미끼로 해서 놓으믄, 즈그들이 와서 물어.”

“고기가 물었는지는 어떻게 알아요?”

“내일 이맘때쯤 와서 주낙을 걷으믄 알제.”

“신기하다.”

이튿날 점심을 먹고 걷은 주낙에 메기 몇 마리가 걸려있었다. 윤주순이 저녁에 메기매운탕을 끓이고, 지난번 저수지에서 잡은 붕어로 붕어찜을 하였다. 문승협은 또 한 번 외할머니사랑을 과식했다.


어느덧 여름방학이 끝나갔다. 외할머니가 화단꽃밭으로 봉선화를 따러 가자고 하였다. 붉은색과 분홍색 봉선화를 따서 물기를 제거한 뒤 꽃잎과 잎에 명반과 소금을 뿌려 빻았다. 문현아에게는 분홍색으로 열손가락에 붙인 다음 비닐로 감쌌다. 문승협에게는 남자라는 이유로 새끼손가락에만 붉은색으로 해줬다. 하룻밤을 지낸 후 풀었더니 손가락이 곱게 물들었다. 봉선화 물들이기 추억을 끝으로 다음날 목포로 돌아가야 했다.

외갓집을 떠나는 마음은 항상 슬퍼서 심란하였다. 다음을 기약하자는 외할머니말로 아쉬움을 달랬다. 작은 외삼촌 이우철이 지난겨울처럼 목포집까지 데려다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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