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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26.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4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18)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뜸뿍 뜸뿍 뜸북새 논에서 울고~,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오성희선생이 개학을 알리는 시그널송으로 ‘금강산, 메아리, 과수원길, 옹달샘, 태극기, 달맞이, 오빠 생각, 얼굴’을 순서대로 틀었다. 동요가 교정을 울리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했다.

학생들이 방학 동안 있었던 일들로 수다 떠느라 여기저기서 웅성거렸다. 봉선화 물들인 문승협의 새끼손가락은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사내 시끼가 사삭스럽게, 뭔 봉숭화물을 들였냐.”

“아야, 이쁘기만 하그만 그라냐, 승협이는 손도 작은 것이 귀엽기만 하다야.”

“염불 하네, 사내 시끼가 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지, 나는 보기 숭하다.”

“언제까지 머시마 가시나 찾을래, 그냥 하고 시프믄 하는 것이제.”

“근디, 첫눈 올 때까정 남아있으믄 첫사랑이 이뤄진다드만, 승협이 니 첫사랑은 누구냐?”

봉선화물들인 손가락이 간지럽다는 김철종의 놀림에 제갈민주가 두둔하자, 현기정이 첫사랑을 물었다. 문승협이 친구들 시선에 머뭇머뭇 최선경을 바라보았다. 이를 본 이정주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아야 느그 소식 들었냐, 엘비스프레슬리가 지난주에 죽었다든디?”

“잉, 무자게 잘생긴 롹큰롤제왕인디 안타깝드라.”

“집 목욕탕서 심장마비로 죽었다메?”

“모르제, 마약 했다는 말도 있고, 외계인이란 소문도 있드만.”

“하여튼 미국 양키 코쟁이들은 총도 막 쏴 불고 어마무시해 그냥.”

“그래도 대단한 나라여, 엊그제는 무인우주선 보이저 2호를 쐈다드란께.”

“아, 그라고야, 토요일에 MBC방송에서 대학가요제 한다드라.”

“그것이 뭔 디야?”

“나도 잘 모른디, 대학생들이 나와서 하는 노래자랑인가 기드라고.”

문승협은 답하지 않은 첫사랑에 최선경눈치를 살피느라 친구들의 이런저런 화제에 끼어들지 못했다. 최선경도 문승협을 주시하며 첫사랑이 누군지 눈으로 물어보느라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교실로 흩어져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미국은 소련과 우주개발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다. 목성과 토성을 경유하며 탐사하는 무인우주선 보이저 2호 발사에 이어 보이저 1호도 발사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한민국 육군∙해군∙공군의 방첩부대를 통합한 국군보안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창작극을 발전시켜 민족극토대를 튼튼히 하려는 제1회 대한민국연극제가 열렸고, 제1회 MBC대학가요제에서 ‘김만수의 영아, 산울림의 아니 벌써, 샌드페블즈의 나 어떡해, 서울대트리오의 젊은 연인들’이 수상하였다.


문승협은 MBC대학가요제를 보며 이자연을 생각했다. 광주에서 음악대학을 다니면서 가수를 꿈꾸는 이자연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하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출연자에 없어 무척 아쉬웠다. 내년에는 꼭 나오길 빌었다.

코리아게이트로 박동선이 기소된 날, 도장학사가 6학년 3반 수업을 참관하기로 결정되었다.

참관수업을 준비하는 동안, 고상돈이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해 우리나라가 세계 8번째 등정국가에 올랐다. 빵급식에서 대규모 식중독발병사태가 발생하여 전국의 학교가 들썩였다. 소비자보호기본법도 제정되었다.

참관수업은 일본항공 JAL472편이 일본적군파에 하이재킹된 추석연휴 다 다음날 진행했다.

자연스러운 참관수업을 위해 별도로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엄정한선생과 6학년 3반 학생들이 더욱 긴장하였다. 다행히 참관수업은 성공리에 잘 끝났다. 참관한 장학사로부터 큰 격려와 더불어 정부에 표창을 상신하겠다는 언질도 받았다.

참관수업 이후, 중학교추첨제 무시험입학으로 6학년졸업여행이 논의됐으나, 준비시간 부족 등의 이유로 다음 학년부터 시행키로 결정되었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함께 여행 간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다가 무산되자 실망을 금치 못했다.

KBS‘전설의 고향, 마니산 효녀’가 방영된 날, 엄정한선생과 6학년 3반 참관수업이 장학사표창에 이어 문교부장관표창까지 받았다. 지역과 학교에 경사로운 날로 플래카드가 여기저기 붙어 축제분위기였다.

사흘 뒤 가을운동회도 평소보다 많은 각계각층의 축하와 격려로 치러졌다. 처음 시도한 5학년의 매스게임이 극찬을 받았다. 6학년은 축구와 배구 종목만 참가하였다. 문승협은 축구와 배구 선수로 다 뛰었다. 축구경기 중 열심히 응원하는 최선경과 수시로 눈을 맞췄다. 불현듯 작년에 아팠던 최선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배구시합 때 안 보여 걱정했지만 곧 돌아와 끝까지 자리를 지켜서 안심되었다. 그렇게 문승협의 국민학교 마지막 가을운동회가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곧장 집으로 갔다.

씻고 쉬고 싶었으나, 큰고모 문희숙에게 끌려가다시피 서예학원에 갔다. 서예학원원장이 신입원생을 인사시켰다. 정신집중을 요하는 서예라 문승협은 수업하면서 피곤함을 잊었다. 수업이 끝난 후, 문희숙은 친구와 약속이 있다며 갔다. 신입원생이 혼자 집으로 향하는 문승협을 불러 세웠다.

“느그 집 유선동이제?”

“응.”

“같이 가자, 우리 집도 유선동이어.”

“나는 고모 때문에 서예를 배우는데, 너는?”

“호호, 나도. 할아부지 등쌀에 어제 등록했는디, 우리 고모께서는 첫날부터 땡땡이셔.”

“어른들은 이상해, 다니고 싶으면 자기들만 다니면 될 텐데, 왜 우릴 끌어들이는지.”

“다니믄 좋은께 그러겄제.”

“와, 너 상당히 긍정적이다.”

“호호, 긍정적이란 말 상당히 듣기 좋다잉. 이름이 문승협이든가?”

“응. 넌 홍진아?”

“아니, 홍지아.”

“아, 미안. 나 유선동 사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잉, 느그 고모랑 우리 고모랑 친구여.”

“그럼 학교는 어디야?”

“난 중앙국민학교에 다녀, 넌 유선국민학교제?”

문승협은 홍지아와 이야기하며 별 거리낌 없이 항동시장 근처를 지나갔다. 때마침 이정주와 함께 있던 차여선이 문승협을 발견하고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야 정주야, 저그 승협이 아니어?”

“잉 맞어, 옆에 가시나는 누구대?”

“저 가시나는 동양어망 손녀딸 홍지아 인디.”

“아는 가시나냐?”

“잉, 우리 아부지가 선박회사선주라서 잘 알제.”

“동양어망이 뭔디?”

“아따, 그 어구나 어망 같은 거 만드는 회사 안 있냐.”


꿀 같은 휴일이 지나갔다. 아이들이 평일수업을 마치고 과외수업을 받으러 하나 둘 모였다. 먼저와 있던 차여선과 이정주가 숙덕이다 문승협이 들어서자 떨어져 앉았다. 곧이어 최선경과 김용남이 들어왔다. 이정주가 최선경을 반기며 자기 옆자리에 앉도록 유도했다. 유난히 최선경에게 친절히 대하면서도 문승협을 의식하였다. 문승협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짜증 났다. 김철종과 과외선생이 들어와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정주가 수업 중에도 시선을 집중시키며 최선경팔을 잡는 등 의식적으로 문승협을 자극하는 행동을 계속했다. 문승협표정이 굳어지더니 급기야 얼굴이 빨개졌다. 중간 쉬는 시간에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화를 삭이러 밖으로 나갔다. 차여선은 최선경에게 귀엣말을 하고, 이정주는 김용남과 김철종을 불러 모아 소곤거렸다.

과외수업이 끝나고, 문승협이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며 책가방을 싸자마자 먼저 나갔다. 최선경도 김철종도 아무도 잡지 않았고, 남자아이들이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하였다.

문승협은 혼자 집으로 가면서 이성을 잃어가는 자신을 보았다. 이유를 찾아보았으나 답을 알 수 없었다.

차여선이 문승협과 홍지아가 지나가는 모습을 본 날, 이를 빌미로 문승협과 최선경의 마음을 알아보자며 이정주와 함께 작전을 짜고 이를 실행 중이었다.

차여선은 최선경에게 문승협과 홍지아가 같이 가는 걸 봤다며, 한 수 더 떠 사귄다는 소문도 있다고 말했다. 최선경은 단단히 화났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정주는 김용남과 김철종에게 작전을 설명하며 협조를 부탁하였다. 김용남과 김철종이 적극 동조했고, 질투심에 흔들리는 문승협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재미있어하였다.

최선경은 홍지아와의 소문에 화가 나 문승협에게 냉랭했다. 문승협 또한 과도한 이정주태도에 아랑곳없는 최선경에게 서운해 있었다. 서로 감정이 그러니 학교에서 만나도 어색하고 서먹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병수와 과외받는 다른 학교 남자아이가 최선경을 좋아했다. 과외가 끝날 때를 기다리는 등 스토킹에 가까운 행동을 하였다. 문승협과 최선경은 학교뿐 아니라 과외수업에 와서도 본체만체 외면해 점입가경이었다.

상황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자, 차여선은 문승협을, 이정주는 최선경을 만나 최종 서로의 마음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두 사람이 각자 만나본 문승협과 최선경은 자기 마음을 토로하거나 상대를 비난하지 않았다.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 상대를 걱정하고 이해하려 애썼다. 그런 모습은 두 사람에게 문승협과 최선경이 서로 좋아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홍지아가 과외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문승협을 기다렸다. 최선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승협과 홍지아가 함께 갔다.

차여선과 이정주는 위기감에 빨리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복잡한 상황을 어디서부터 수습할지 난감하였다. 일단 문승협과 최선경에게 자초지종을 알려야 했다. 다음날 문승협을 찾아갔다.

“승협아,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건 맞는디, 우리도 확인해야 했어야.”

“왜?”

“여선이나 나나 말하긴 좀 그래, 그냥 말 못 할 이유가 있어.”

“아니어, 내가 말하께. 나 너 좋아했어야, 근디 너는 선경이를 좋아하는 거 같고. 그라믄 확인해야 제, 맥없이 너를 계속 좋아할 순 없잖애?”

“나도 선경이를 좋아했는디, 선경이 생일에 피아노 치고 너 노래한께, 선경이가 무자게 좋아하드라고. 느그들 보고 속상하믄서도, 선경이 마음을 확인하고 잡드라.”

“그랬구나, 너희들 마음을 전혀 몰랐어. 쉽지 않은 이야긴데 말해줘서 고맙다. 너희를 그렇게 만들어 미안해.”

“그라믄, 정주 니가 브람스냐? 슈만을 사랑한 클라라를 사랑 해분 브람스 말이여, 호호.”

이후 이정주부탁을 받은 김용남과 가병수가 최선경의 스토커를 만났고, 차여선이 연적이자 라이벌 홍지아를 찾아갔다. 김용남과 가병수는 최선경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설득 반 겁박 반으로 해결했고, 차여선은 홍지아에게 문승협에 대한 마음을 접으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홍지아가 문승협에게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예학원에 같이 다니는 친구라며 신경 쓰지 마라고 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차여선이 최선경을 만나 그간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며 사과하였다. 최선경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수습이 복잡할듯했으나 막상 당사자가 나서니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친구들 사이에 첫 공식커플이 탄생했다. 이정주가 차여선에게 사귀자며 고백하였다. 차여선은 연극부와 합동 홈룸에서 박력을 느낀 데다, 방송부 사건 때 대변해 준 이정주에게 호감을 가졌던 차에 받아들였다.

문승협과 이정주뿐 아니라, 최선경과 차여선의 오해와 갈등은 이일을 계기로 완전히 해소되었다. 다만 문승협이 김철종에게 복수하려고 별렀다. 누구보다 믿었건만 이정주와 짜고 놀리고 속인 괘씸죄였다.

문승협과 최선경은 소문에 부화뇌동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질투한 마음이 창피했다. 그래도 서로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확인한 계기였다. 후회와 반성을 더해 이해를 배웠다. 서로 감정이 풀릴 즈음, 문승협이 최선경에게 만나자고 하였다.

“선경아, 많이 힘들었지?”

“너도 많이 속상했지?”

“응, 그리고 반성했어. 하지만, 다음에도 누군가가 너의 허락 없이 널 만진다면, 그때도 화날 것 같아.”

“알았어, 주의할게.”

“중요한 사실도 하나 알았어, 우리가 귀 기울일 소리는 우리 마음의 소리라는 것.”

“그래, 우리가 만든 시간에 우리가 얽매이지 말자, 나도 후회했어.”

“내 감정만 보듬고 있어서 너무 부끄러웠어.”

“호호, 나도 내 감정만 돋보이더라.”

“궁금한 게 있어.”

“응?”

“나 많이 미웠지?”

“응, 쪼끔 많이. 나도 궁금한 게 있어.”

“뭔데?”

“그 새끼손가락, 봉선화 물들인 거 말이야, 누구야?”

“너.”

최선경은 진짜 궁금하기도 했지만, 대화를 환기시키려고 던진 말에 문승협이 망설임 없이 대답해서 쑥스러웠다. 자신이 문승협에게 첫사랑이고 싶은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문승협은 첫사랑이 뭔지 몰라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새끼손가락에 봉선화는 최선경이었다. 마음속으로 최선경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어렵지 않아, 그다음이 더 어렵지’라고 속삭였다. 질투는 사랑의 짐이지만, 반드시 져야 할 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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