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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Sep 28.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6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풋사랑인가? - (20)

다음날 최선경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문승협은 아침방송 때문에 일찍 등교하여 아파서 결석한다는 최선경소식을 오성희선생에게 전해 들었다. 심장병이 도진 것은 아닌지 덜컥 근심이 앞섰다.

아침방송을 마치고 제갈민주를 찾아갔다. 다행히 몸살이라고 하여 안도했다.

방과 후에 무작정 최선경집으로 향하였다.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어찌할지 한참을 망설였다. 최선경엄마가 시장을 다녀오다 집 앞에서 서성이는 문승협을 보았다.

“어? 승협아, 왜 안 들어가고 그러고 있어.”

“여자들은 남자 병문안을 꺼린다고 해서요, 아프면 자기 모습이 흉하다고.”

“호호호, 그래? 그래, 넌 남자고 선경인 여자였지. 그런 생각을 다하다니, 너는 참 배려심이 많구나.”

“선경이도 싫어하겠죠?”

“그럴 리 있겠냐만, 네 생각이 그러니 물어볼까?”

“네, 그래 주실래요?”

“상관없을 것 같은데, 혹시 모르니 물어보고 올게.”

“네, 감사합니다.”

문승협은 잠시 잠깐 기다리는 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최선경엄마가 멋쩍어하며 나왔다. 어색한 표정에 이미 답이 있었다.

“어쩌면 좋지? 선경이가 약에 취해서 비몽사몽인데, 그냥 자겠다는구나.”

“네 알겠습니다. 내일은 학교에 나올 수 있을까요?”

“글쎄다, 내일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고, 아마 모래는 괜찮을 거야.”

“네,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아무튼 와줘서 고맙다, 조심히 가.”

문승협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놈의 배려심 때문에 또 원하는 걸 놓쳤어. 그냥 모른 체하고 들어가 만났으면, 지금 이런저런 고민도 없을 거 아냐. 바보, 병신’

최선경은 꾀죄죄한 몰골은 상관없었으나, 자꾸 걱정하는 문승협에게 아픈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창문 커튼 뒤에 숨어 어깨가 축 처져 걸어가는 문승협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왔는데 그냥 들어오라고 할 걸 그랬나’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최선경엄마가 문승협을 돌려보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몰래 창밖을 내다보는 딸의 뒷모습이 왠지 염려스러웠다.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물어보려다 참았다. 문승협 말대로 남자친구의 병문안을 꺼려서라고 생각하였다.

저녁시간이 되어 쟁반에 식사와 약을 챙겨갔다.

“선경아, 밥 먹고 약 먹자.”

“엄마, 이번 생일에는 승협이만 초대할래.”

“왜?”

“그냥.”

“이유를 말해줘야지, 다짜고짜 그러면 어떡해.”

최선경엄마는 재차 물어도 묵묵부답인 딸을 두고 내려갔다. 남편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선경이가 아파서 그랬겠죠.”

“아이참, 좀 이상하다니까요.”

“아니면, 사춘기가 벌써 왔나?”

“여보, 선경이가 어제도 그랬어요.”

“어제도?”

“네, 어제 고하도에 다녀오자마자 허겁지겁하더라고요, 평소답지 않게.”

“화장실이 급했던가 그랬겠지.”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상한 느낌에 따라 올라가 봤더니.”

“따라올라가 봤더니, 왜요?”

“글쎄, 오늘처럼 불도 켜지 않은 채, 커튼 뒤에 숨어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더라고요.”

“왜, 어디를?”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밖에 나가보니까, 승협이가 길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래요? 둘이 싸웠나?”

“싸웠으면, 요번 생일에 승협이만 초대하겠다고 하겠어요?”

“그건 그러네, 진짜 무슨 일 있나? 내가 이따 올라가서 한번 물어볼게요.”

“너무 다그치지는 마세요.”

“선경인 생각이 깊은 아이니, 우리 딸을 믿읍시다.”

최선경아버지가 저녁식사 후에 2층으로 조심스레 올라갔다. 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무슨 일 있는지 물었다. 최선경은 특별한 일은 없다면서도 갑자기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고 하였다.


최선경은 다음날도 결석하였다. 여자아이들이 병문안 갔으나 고열에 혼수상태여서 얼굴도 못 보고 돌아왔다.

최선경은 하루를 더 결석하고 그다음 날 등교했다. 나흘 만에 등교한 최선경은 여전히 아파 보였다. 그럼에도 발랄해 보이려고 노력하는 기색이 역력하였다. 염전에서 제갈민주가 찍어준 사진 중에 잘 나온 게 한 장밖에 없다고 문승협에게 푸념하면서도 환하게 웃었다.

“아쉬우면, 다음에 가서 또 찍자.”

“다음에? 아니야, 괜찮아. 그 한 장이 인생사진이야, 멋지게 잘 나왔으니까 그걸로 만족해.”

“만족한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민주에게 감사해야 하나, 정주에게 감사해야 하나?”

“민주는 그렇고, 정주는 왜?”

“정주네 집이 사진관을 해도, 이렇게 빨리 나올 줄은 몰랐어.”

“우리 고하도에서 나올 때, 필름을 빼서 주고 속성으로 부탁했어.”

“근데, 그 사진은 나한테 안 보여 줄 거야?”

“지금은 싫어, 나중에 한꺼번에 보여줄래.”

“칫, 죽을 때까지 못 볼 수도 있겠네 그럼.”

“나한테는 죽는다는 말 하지 마라면서, 너는 그런 말을 하니?”

“앗, 미안.”

“됐어, 이미 말해놓고서는 무슨.”

“아따 용서해 주쑈 선경씨.”

“좋아, 이번만 용서한다. 앞으로 조심 또 조심하도록, 알았나?”

“넵.”

“모레 토요일이 내 생일이야, 알지?”

“그럼, 당연히 알지.”

“학교 끝나면, 점심 먹지 말고 바로 우리 집으로 와. 그리고, 애들한테는 비밀로 해.”

“모레가 생일인 건 친구들도 다 알 텐데?”

“내가 아파서 이번 생일파티는 안 한다고 할 거야. 절대 비밀, 알았지?”

문승협은 최선경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반대할 수도 없어 따르기로 했다.


최선경은 생일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집으로 갔다. 문승협도 부리나케 교실을 빠져나왔으나, 김철종과 제갈민주가 낌새를 차리고 따라붙었다. 친구들이 최선경생일을 함께 축하하고픈 마음에, 생일을 생략하겠다는 최선경보다 문승협에게 시선을 집중하던 참이었다. 문승협은 눈치 빠른 둘을 따돌리려고 변명하느라 고생하였다.

문승협은 살짝 열어놓은 문으로 최선경집에 들어갔다. 최선경 혼자뿐이어서 조금 놀랬다.

“엄마는 어디 가셨어?”

“앙큼한 생각마, 근처에 있어서 내가 부르면 금방 올 거야.”

“앙큼한 생각이 뭔데?”

“이그, 관두자. 내가 엄마한테 부탁했어, 음식만 준비해 주고 저녁때까지 오지 마라고.”

“왜?”

“엄마 약국일도 있는데, 신경 안 쓰이게 하려고.”

“아, 난 또.”

“난 또 라니?”

“아니, 선경이가 앙큼한 생각을 하나 했지.”

“호호호, 네가 생각하는 나의 앙큼한 생각이 뭔데?”

“글세, 그건 내가 모르지라우.”

“아쭈, 제법 능글해졌어.”

“나 여기 오면서, 민주하고 철종이 따돌리느라 죽는 줄 알았어.”

“호호, 어떻게 따돌렸어?”

“증조할머니집에 들어갔다가 나왔어, 나 들어가는 거 끝까지 지켜보고 있는 거 있지.”

“호호호, 민주가 친구끼리 자리마련할 테니, 몸만 오라고 하더라.”

“그냥 그러지 그랬어, 친구들 마음도 있는데.”

“…….”

“아냐, 아니야.”

“뭐가 아니야?”

“아니, 지금이 좋다고요.”

“눈치 잘 챙기세요 승협씨.”

“넹, 알겠습니당.”

“뭐야, 애교 부리는 거야?”

“하하하, 넹.”

“좋아,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네가 날 챙겨줘.”

“그래, 어떻게 챙겨드릴까?”

“요리나 반찬은 다 차려졌으니 다른 건 할거 없고, 미역국하고 밥만 떠주면 돼. 어때, 할 수 있겠어?”

“달랑 그거야? 다른 건 없고?”

“그래? 그럼, 나를 위해서 밥이랑 미역국 좀 다시 만들어줄래?”

“하하, 그건 아직 할 줄 모르는데.”

“그러니까, 미역국하고 밥만 떠달라고요.”

“넵.”

그렇게 둘만의 식사를 하였다. 문승협이 12색 펜을 생일선물로 주었다. 함께 설거지를 하고 2층 최선경방으로 올라갔다. 방안에 둘만 있으니 서먹했다. 문승협이 어색함을 떨치려고 둘러보았다. 책장에 꽂혀있는 작년 생일에 못 보게 하였던 앨범에 손이 갔다. 최선경이 예전처럼 또 막아섰다. 아직 미완성이니 다음에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승협을 피아노 앞으로 데려갔다. 피아노뚜껑을 열며 작년생일 때 한 약속을 지키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빙긋 웃으며 피아노의자에 앉았다. 최선경은 팔짱 낀 채 피아노옆에 기대섰다. 문승협이 오늘을 위해 그동안 갈고닦은 피아노솜씨를 보여주려고 외운 악보를 떠올렸다. 심호흡을 한 후 피아노연주와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 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도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최선경이 다정한 눈빛으로 문승협을 지켜보다 눈물을 흘렸다. 우는 모습을 들킬까 봐 얼른 닦아냈다.

문승협은 옆에서 들리는 최선경의 호흡과 숨소리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였으나, 연주를 틀리지 않으려고 피아노건반에 집중하느라 최선경눈물을 보지 못했다. 피아노연주와 노래를 마치고서야 최선경과 마주하였다. 순간 최선경의 창백한 모습과 우수에 젖은 눈빛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최선경이 고맙다면서 가볍게 박수를 쳤다. 보답이라며 닐세다카의 레코드판 옆에 있는 폴앵카의 레코드판을 전축턴테이블에 올렸다. 둘이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함께 들었다.

‘I'm so young and you'e so old, This my darling I've been told, I don't care just what they say, 'Cause forever I will pray, You and I will be as free, As the birds up in the trees, Oh please stay by me Diana~’

“이 노래 가사 중에 내가 좋아하는 대목이 있어.”

“어떤 내용인데?”

“너와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나무 위의 새들처럼.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니? 나를 꼭 안아주면 스릴을 느껴. 다이아나,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너를 사랑해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다이아나. 오직 너만이 내 마음을 가져갈 수 있어, 네가 나를 홀리면 너의 사랑스러운 품에 안겨서 네가 주는 걸 느낄 수 있어. 나를 꽉 안아줘, 나를 꽉 잡아,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다이아나.”

“노래는 흥겨운 편인데, 가사가 왠지 슬프다.”

“내 나름대로 가사를 해석해서 시처럼 쓴 거야.”

“와, 너 시인해도 되겠다.”

‘Thrills I get when you hold me close, Oh my darling you're the most, I love you but do you love me, Oh Diana can't you see, I love you with all my heart, And I hope we will never part, Oh please stay with me Diana, Oh my darlin' oh my lover, Tell me that there is no other, I love you with my heart,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h, Only you can take my heart, Only you can tear it apart, When you hole me in your loving arms, I can feel you giving all your charms, Hold me darling hole me tight, Squeeze me baby with all your might, Oh please stay by me Diana, Oh please Diana, Oh please Diana.’

음악을 듣다가 방바닥에 집은 최선경과 문승협의 손이 맞닿았다. 둘은 짜릿함을 느낌과 동시에 꼼짝하지 못했다. 닿아있는 손을 의식하지 않은 척 태연하려 애썼다.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봐 조심스레 침만 삼켰다. 머릿속에 몽환적 핑크빛으로 가득 차 레코드에 담긴 곡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이 없었다. 레코드판 긁히는 소리가 전축스피커를 통해 계속되었지만, 둘은 헛도는 먹먹한 무음을 무시한 채 귀먹은 듯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최선경이 마침내 입을 열고 침묵에 잠긴 어색한 공기를 걷어냈다.

“내가 녹음해 준 카세트테이프 있잖아?”

“응.”

“B면에 녹음된 피아노연주곡 있지, 그거 내가 연주하면서 직접 녹음한 거야.”

“그랬구나, 녹음하느라 고생했겠다.”

“대단한 건 아닌데, 내 정성이 들어간 첫 작품이니 소중히 간직해 줘.”

“그래 그럴게, 고마워. 나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들으면, 항상 네가 생각나.”

문승협은 태권도도장에서 처음 들었던, 최선경이 연주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잊을 수 없었다. 아드린느가 곧 최선경 같았다.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으나, 문승협과 최선경은 둘만의 돈독한 시간에 만족하였다.

하지만 문승협을 배웅하는 최선경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힘들어 보였다. 문승협은 처음으로 최선경을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최선경은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다며 한사코 문승협을 먼저 보냈다.

문승협은 집으로 가면서 무심코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수건이 만져졌다. 고하도에 놀러 갔을 때 염전에서 받았던 최선경의 손수건이었다. 오늘 전해주려고 가져왔으나 깜빡했다. 미처 전해주진 못한 자신을 스스로 나무랐다. 마음 한편에 생긴 근심에 더해 불안감까지 불쑥 몰려왔다.


최선경은 또 몸이 아파서 나흘간 결석하였다.

친구들과 함께 문승협생일 일주 전 영화‘록키’를 봤을 때는 관람 중에 힘들어하며 잠깐 잠들 정도였다.

친구들이 마련한 문승협생일파티에도 최선경만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다.

최선경은 부모 없이 생일을 보내야 하는 문승협을 챙기려 하였다. 자기 생일 때처럼 단둘이 보내려고 계획했으나, 아픈 딸을 걱정하는 엄마에 의해 외출을 금지당하였다. 무엇보다 몸이 아파서 어쩔 수 없었다.

최선경의 결석이 길어지면서 두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흐르는 시간만큼 그리움도 쌓여갔다.

최선경건강이 다소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고, 마침 제갈민주부모가 가정사로 집을 비운 것이 기회였다.

문승협생일이 일주일 지나고, 겨울방학이 시작된 토요일에 제갈민주집에서 만났다.

최선경이 절친한 제갈민주와 집에만 있겠다는 조건으로 가게 해 달라며 엄마에게 졸랐다. 최선경엄마는 어쩔 수 없이 승낙해 주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최선경은 비록 문승협생일이 지났지만, 제갈민주도움을 받아 생일선물을 준비했다. 태엽을 감았다 놓으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아리따운 공주가 하트를 안고 도는 오르골이었다.

제갈민주는 최선경부탁으로 시장에서 떡볶이와 오뎅, 김밥을 사 왔다. 제과점에 들려 자그만 생일케이크도 하나 사서 구색을 맞췄다. 아픈 와중에도 이것저것 챙기며 모처럼 화색이 도는 최선경을 보면서 안쓰러웠지만, 절친을 도울 수 있어 즐거웠다.

“먹어봐, 시장에서 사 온 거긴 하지만 맛있을 거야.”

“이걸 다 어떻게 준비한 거야, 몸도 안 좋으면서.”

“민주가 다 준비해 줬어. 제갈민주, 고마워.”

“염병, 너도 승협이 닮아간다잉. 친구사이에 뭔 고맙단 말을 하냐.”

“귀찮을 법도 한데, 내색 없이 흔쾌히 도와주다니, 내가 친구는 잘 뒀어.”

“아따, 쓸데없는 공치사 마란께. 니가 행복해 보여서 나도 좋드라.”

“생일 때 미역국은 먹었지?”

“응? 응, 먹었지.”

최선경이 생일케이크를 꺼내 불을 붙이고 생일축가를 불러줬다. 그리고 생일선물을 건넸다.

문승협이 포장을 벗겨내고 오르골을 틀자, 최선경이 ‘고민 없이 잘 자라’는 짧게 쓴 카드를 건넸다.

문승협은 ‘브람스자장가’에 맞춰 공주가 하트를 안고 도는 오르골을 보자 갑자기 눈물이 났다. 이를 본 최선경과 제갈민주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셋은 말없이 울었다.

제갈민주가 식은 오뎅을 데워야겠다고 일어나면서 분위기를 바꿨다. 문승협은 김밥을 집어 먹고, 최선경은 포크로 떡볶이를 찍었다. 제갈민주가 끓은 오뎅냄비를 가져왔다. 최선경이 오뎅을 그릇에 떠주며 하나 남은 김밥을 문승협에게 먹으라고 하였다.

“뜨거운 거 잘 먹고 마지막 남은 거 먹으면, 미인 아내 얻는데.”

“우리 외할머니랑 똑같은 말씀 하시네.”

“그래? 미인 아내 얻으려면 어여 드시오.”

“그 말은 하나라도 더 먹이려고 만든 공갈 아닐까?”

“그게 공갈이든 강요든 사랑입니다요, 어서 드셔요.”

문승협이 하나 남은 김밥을 집어 입에 넣었다. 최선경이 문승협의 새끼손가락을 보았다.

“민주야, 올해 첫눈 왔었니?”

“아직 안 왔제, 이번에도 화이트크리스마스가 될란가 모르겄다.”

문승협은 첫눈 내릴 때까지 봉선화물들인 것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뤄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흔적도 없이 지워진 새끼손가락을 최선경이 눈치채지 못하게 오므렸다. 최선경이 감추는 문승협손을 보고 첫눈과 연관된 다른 화제로 돌렸다.

“첫눈에 소원 빌면 진짜 이뤄질까?”

“첫눈 기다리는 사람들 말 아니까? 이뤄지믄 다 빌고 다 이뤄질 건디, 내가 봤을 적엔 거짓갈 같어.”

“승협아, 너는?”

“나는 이뤄진다고 생각해. 다만, 첫눈이 내리는 그 찰나에 소원을 빌어야지 효험이 있을 거야. 그런데 사람들은 첫눈을 보는 순간 감탄하느라, 소원을 빌어야 하는 것을 깜빡하지.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그 순간 그 찰나를 놓친 후 소원을 빌고, 그만큼 소원을 이룬 사람도 많지 않은 걸 거야.”

문승협은 첫눈에 소원을 빌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인간의 간절함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경은 첫눈에 비는 거창한 소원보다, 첫눈이 내릴 때 누군가 생각할 사람이 있는 것이 소원이어서 가슴이 메었다.

최선경이 갑자기 기침과 거친 호흡을 하며 짙은 병색을 보였다. 문승협과 제갈민주는 서둘러 최선경집으로 데려갔다. 문승협은 집 앞에서 발길을 돌렸고, 제갈민주가 최선경과 함께 잤다.


며칠 뒤, 최선경이 곧 서울로 진료받으러 간다고 하였다. 언제 올지 기약 없다며 제갈민주를 통해 알려왔다.

최선경이 서울로 가는 날, 문승협은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TV를 보았다. 우리나라가 드디어 수출백억불을 달성했다는 뉴스가 떠들썩했다. 모두 즐거운 모습으로 표창을 주고받는 경사스러운 소식이었으나, 문승협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크리스마스날에 무성영화시대의 최고희극배우 찰리채플린이 사망하였다. 첫눈이 내리면 절박한 심정으로 하루빨리 최선경을 회복시켜 달라고 소원이라도 빌어보련만 야속하게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최선경을 생각하다,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마음에 하루 종일 전화기주위를 맴돌았다.

새벽녘까지 잠이 오지 않았다. 또다시 오르골태엽을 감으며 이번에는 꼭 꿈속에서 최선경을 만나길 바랐다. 요즘은 엄마도 이렇게까지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을 키워놔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할머니말이 이해되었다.

세상은 송구영신이다 뭐다 해서 아쉬워하고 들떴지만, 문승협은 오로지 최선경생각에 빠져있었다. 1977년 마지막 밤, 오늘도 최선경을 떠올리며 오르골태엽을 감았다. ‘브람스자장가’를 들으며 잠을 청하고, 하트를 안고 찾아오는 최선경을 꿈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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