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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9.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17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9)

상실과 슬픔을 치유해 가는 문승협에게 기분전환이라도 하라는 듯 학교보이스카우트에서 산행을 갔다.

보이스카우트단복을 입은 단출한 차림으로 시외버스터미널에 집결하였다. 간단한 인원파악 후 대흥사행 버스에 올랐다. 굽이굽이 거쳐가는 시골풍경들이 무척 정겨웠다. 완연한 봄날씨에 빨강노랑파랑 형형색색 봄꽃들이 만발하여 온 세상이 활기차보였다. 버스에서 내린 덕일중학교 보이스카우트대원들이 대흥사로 들어갔다. 대흥사 대웅보전마당에는 얼마 전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한 연등들이 아직 걸려있었다. 절에서 피운 향냄새가 마음을 경건하게 해 주었다. 대웅보전처마에 달린 풍경이 바람 부는 데로 몸을 맡겨 청량한 소리를 냈다.

문승협은 걸음마다 따라 울리는 풍경소리에 문득 ‘최선경이 온 건가?’라는 착각을 했다. 그리움이 풍경소리와 섞여 마음을 울렸다.

보이스카우트대원들이 웅보전을 둘러본 뒤 계단에 앉아 단체기념사진을 찍고, 삼삼오오 발길 가는 대로 구경하였다. 문승협과 서너 명이 응진전 앞 높이 430Cm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문승협어깨를 덥석 잡았다. 문경준이었다.

“아빠.”

“하하, 놀랐냐?”

“네, 여기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보이스카우트들이 있기에 어디 학교냐고 물었더니 너희 학교더라, 그래서 널 찾았지.”

“언제 오셨어요?”

“아침 일찍 등산 왔다가, 이제 돌아가는 길이야.”

“어디로 가요, 집으로 가세요?”

“아니, 휴일이어서 온 거라 도안광산으로 가야 해.”

문승협은 갑작스레 만난 아버지가 반가웠지만 긴 대화를 해보지 않아 금세 어색해졌다.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행동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문경준이 삼층석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자며 근처에 있는 남강에게 부탁하였다. 문승협은 아버지와 사진 찍은 기억이 없어 어떻게 포즈를 취할지 망설였다. 무표정한 목석처럼 차려자세를 취하자, 남강이 웃으라며 채근하고는 셔터를 눌렀다. 문경준은 카메라를 다시 건네주는 남강과 몇 마디 나눈 뒤, 문승협에게 구경 잘하고 가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느그 아부지냐?”

“예.”

“아따 멋지다잉.”

“그래요?”

“등산복에다 등산화 쫙 신고, 라이방에 모자 딱 쓰고, 멋지잖애.”

“아, 예.”

문승협은 남강과 달리 아버지가 그렇게 멋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가 오랜 시간 떨어져 살면서 알게 모르게 생긴 아버지와의 거리이며 벽 때문인 줄은 몰랐다. 단지 익숙하지 않아서 오는 서먹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문승협은 두륜산대흥사로 산행을 다녀오면서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러나 최선경을 떠나보낸 슬픔에서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아버지 문경준과 뜬금없는 조우가 기억에 남았다.


산행을 다녀온 며칠 뒤, 재작년 9월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했던 고상돈이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매킨리등정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하산도중 조난당하여 이일교, 박훈규와 함께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6월이 되면서 하복으로 바꿔 입었다. 국민학교동창회가 연말로 변경되었다고 김용남에게서 연락 왔다.

문승협은 동창회회장단사전모임을 알았으나, 최선경이야기가 나올 거라 예상해 참석하지 않았었다.

서수연선생이 토요일 아침조회를 마치고 문승협을 불렀다. 방과 후 못난이형제들과 남으라고 하였다. 지난번 부득이한 사정으로 못했으니 오늘 자기 집에 가서 놀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그 부득이한 사정이 본인 때문이어서 머쓱했다.

못난이5형제가 서수연선생집에 도착하였다. 대문을 열어준 사람은 한동은행 목포지점행장인 서수연선생의 아버지였다. 사랑하는 딸내미의 제자라며 다정하게 반겨주었다. 부녀가 무척 화목해 보였다.

서수연선생아버지가 즐겁게 놀다 가라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못난이형제들이 거실에 앉아 옷 갈아입으러 간 서수연선생을 기다리는 동안 웬 아주머니가 음료수를 내왔다. 공손하게 감사하다고 인사했지만 서수연선생의 어머니라기엔 많이 젊었다.

서수연선생이 갈아입은 상의를 추스르며 나왔다. 등 쪽 옷이 말려있어 브래지어끈이 보였다. 문승협이 얼른 일어나 등에 걸린 옷을 내려주었다. 고모들과 할머니에 여동생까지 여자들과 생활을 많이 하였기에 무심코 한 행동이었으나, 사춘기 못난이형제들은 민망해하며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서수연선생이 살짝 부끄러워하며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고개 돌린 못난이형제들에게는 앙큼한 놈들이라며 게슴츠레 눈을 흘겼다. 무안함을 떨치려고 큰소리로 아주머니를 불렀다.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오는 아주머니에게 준비됐는지 물었다. 아주머니가 채소만 씻으면 된다고 했다. 서수연선생이 못난이형제들에게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라며 소개하였다. 못난이5형제가 합창하듯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아주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웃었다.

서수연선생이 갑자기 ‘만화방으로 출동’이라고 외쳤다. 못난이형제들이 우르르 신발을 신으로 갔다. 이정훈이 선생님의 어머니는 어디 계시냐며 여쭸다. 못난이형제들도 궁금하던 차에 서수연선생을 바라봤다. 서수연선생은 잠시도 거리낌 없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나 중2 때’라 말하고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이정훈은 못난이형제들에게 눈총 받아 겸연쩍어하였다.

문승협은 최선경을 하늘나라로 보낸 다음날 운동장벤치에 앉아서 위로해 준 서수연선생말이 떠올랐다. ‘죽음이 갈라놓은 강제이별은 더 슬프고, 더 아픈 거야’라는 말은 서수연선생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수연선생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서수연선생 옆으로 가 둘만 아는 공감과 비밀처럼 속삭였다.

“선생님도 당시의 감정에 충실했었나요?”

“그래.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 우리 엄마가 나타나서, 이제 그만하라고 하시더라.”

“선생님, 미안하고 고마워요, 존경하고 사랑해요.”

“풉, 닭살 돋는다, 앞으로 그런 말 금지.”

“치, 남자의 순정을 이렇게 짓밟다니, 너무해요.”

서수연선생이 웃으며 문승협의 까까머리를 비비고는 어깨동무했다. 이 모습을 본 못난이형제들이 둘 사이를 연인사이로 몰아가며 시기하는 척 과장해서 장난쳤다.

모두 만화방에 들어가 왔다 갔다 하며 각자 보고픈 만화를 심기일전해 골랐다.

서수연선생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장 통에서 파는 순대와 간을 샀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간만큼은 허락받고 먹으라며 경고하였다.

문승협은 순대보다 특별히 간을 좋아했던 최선경이 떠올랐다. 이전에 비하여 슬프지 않았고, 서수연선생의 위로효과로 여겼다. 고개 들어 올려보니 맑은 하늘에 최선경이 활짝 웃고 있었다.

다들 한번 가봤다고 서수연선생집으로 거침없이 돌진하였다. 거실에 김밥재료가 펼쳐져있었다. 떡볶이가 그릇에 담겨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서수연선생이 못난이형제들에게 김밥재료 앞으로 모이라고 했다. 각자 방식으로 한 개씩 김밥을 싸라면서, 가장 맛있게 싼 못난이에게 상금 천 원을 걸었다. 심사위원은 서수연선생의 아버지와 아주머니였다.

상금에 눈먼 못난이형제들이 열심히 김밥을 쌌다. 비록 김밥을 말다 어려움을 겪고 칼로 썰다 옆구리가 터졌지만, 서수연선생과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완성하였다. 심사결과 안광호가 당첨되었다. 문승협은 밥에 식초를 넣어 버무리는 할머니비법을 썼으나, 조금 많이 넣는 바람에 2등으로 밀렸다. 아차상으로 5백 원을 받았다.

아주머니가 끓여준 오뎅과 떡볶이를 곁들여 각자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서수연선생이 시장 통에서 사 온 순대와 간을 풀어놓았다. 못난이형제들 손이 순대로만 향하자, 서수연선생아버지가 보다 못해 사정하듯 허락을 구했다.

“저기 욕심쟁이 서수연선생님. 아빠도 그렇고 제자들도 간이 먹고 싶은데, 먹어도 될까요?”

“안돼, 내 제자들 핑계로 먹으려나 본데, 어림없지.”

“그럼 아빠는 안 먹을 테니, 따님 제자들이나 먹게 해 주시오. 아빠가 살신성인할게.”

“너희들도 먹고 싶어?”

“네.”

“허허허, 제자들이 오직 먹고 싶으면, 저렇게 이구동성으로 대답할까.”

“호호호, 진짜?”

“네.”

서수연선생이 장난이었다며 먹으라고 하였다. 그제야 다들 간에 손이 갔다. 문승협이 간조각을 집어 들고 최선경을 생각하며 무심결에 혼잣말했다. 서수연선생아버지가 듣고 쿵짝을 맞추었다.

“간을 좋아하는 여자는 성격이 좋고 예쁜데, 왜 저러시나 몰라?”

“허허허, 그러게. 간을 좋아하는 여자는 다 예쁘고 성격이 좋지, 수연이 엄마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왜 남자 친구가 없을까요?”

“글쎄다, 나도 그게 의문이다. 수연이 엄마는 나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났는데, 수연이는 아직이니 불가사의지.”

“나는 결혼 안 하고 아빠랑 살 거야, 아빠사전에서 딸결혼과 사위는 지워줘.”

“허허, 이제 알았다. 아마도, 너희 스승님은 성격에 문제가 있구나.”

“하하하, 맞아요, 성격. 선생님, 선생님은 간이 왜 맛있어요?”

“내가 백 년 묵은 여우라서 그래. 간은 오래 음미해야 고소한 제맛을 느낄 수 있지, 오~우.”

갑작스러운 서수연선생의 포효하는 여우흉내에 모두 한바탕 웃었다.

문승협은 서수연선생아버지와 함께하면서 남다른 기풍을 느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딸과 격의 없이 소통하고 딸의 제자들과 대화도 스스럼없었다. 권위는 낮출수록 높아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재로 책 보러 가는 서수연선생아버지 뒷모습에서 품격을 보았다. 서수연선생도 행복해 보였다.

못난이5형제와 서수연선생이 아주머니를 도와 뒷정리를 한 뒤, 각자 편안한 자세로 만화를 펼쳤다.

다들 만화에 심취하였을 즈음, 서수연선생이 만화를 넘기며 옆에 있는 문승협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선경이도 간을 좋아했니?”

“네, 선경이가 더 예쁘지만, 선생님과 닮은 점이 많아요.”

“너 질투하게 하는 묘한 재주 있다?”

“제가요? 그럴 리가요,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

“요 녀석, 말로는 못 이기니, 폭력을 써야겠다.”

서수연선생이 꿀밤을 주려했다. 문승협이 얼결에 서수연선생손을 잡았다. 두 사람 얼굴이 무척 가까워지면서 둘 사이에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서수연선생이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아 못난이형제들을 의식하며 살펴봤다. 못난이형제들은 경천동지에도 모를 정도로 만화책에 빠져있었다. 서수연선생이 문승협에게 살짝 꿀밤을 주고 만화책을 펼쳤다.

만화를 본 지 한시 간여 흐르고, 안광호뱃속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못난이5형제는 서수연선생이 끓여준 라면을 먹고 다시 만화 보기에 돌입하였다.

서수연선생이 만화 보면서 먹으라며 과자를 꺼내놓고 전축을 틀었다.

최신유행팝송으로 ‘ABBA의 Mamma Mia, Queen의 Bohemian Rhapsody와 Love of My Life, Rainbow의 Temple of the King’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에 나온 곡은 최선경이 듣기 좋아했던 ‘폴앵카의 Diana’였다.

서수연선생이 무심코 고개 돌리다 눈감고 회상에 잠긴 문승협을 보았다.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좋아하는 팝송을 물었다. 문승협은 대학가요제노래를 듣고 싶다며 화제를 돌렸다.

서수연선생이 대학가요제레코드판을 전축에 올려놓고 좋아하는 팝송이 뭔지 재차 물었다. 문승협은 닐세다카노래를 아빠가 좋아한다며 지나치려 하였으나, 서수연선생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닐 세다카면 You mean everything to me가 유명하잖아?”

“네.”

“혹시, 이 노래에 사연 있니?”

“네.”

“어머, 미안.”

서수연선생은 아차 싶었다. 무표정해진 문승협과 둘 사이가 또 서먹해졌다. 못난이형제들은 만화 보느라 둘에게 전혀 관심 없었다. 서수연선생이 어색함을 모면하려고 만화를 펼쳐 뒤적였다.

대학가요제레코드가 끝나자 전축을 끄면서 저녁식사로 짜장면과 탕수육을 제안했다. 못난이형제들이 박수로 동의하였다. 서수연선생이 주문전화를 한 뒤 TV를 틀었다. 못난이5형제는 만화책과 주변을 정리했다.

조금 뒤 짜장면과 탕수육이 배달되었다. 다 먹어갈 즈음, 문교부와 문공부가 내년 1980년부터 TV 교육방송 실시를 결정하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교실마다 TV를 설치해 놓고, 야간자율학습시간에 교육방송을 보게 하면 좋겠다.”

“선상님, 그 비싼 테레비를 뭔 돈으로 산다요?”

“긍께, 100년 뒤에나 가능할지 모르겄네요.”

“오메 배부른 거, 오늘 허벌나게 묵었네.”

“인자 정리하고 가자, 선상님도 좀 쉬어야제.”

“호호, 정훈이가 나를 끔찍이 생각해 주네. 난 괜찮으니까, 더 놀아도 돼.”

“아녜요 선생님, 더 늦기 전에 가야겠어요.”

못난이5형제는 서수연선생부녀와 아주머니의 배웅을 받았다. 알찬 하루를 보낸 만족감을 감사인사로 대신하였다. 만화방에 들려 만화책을 반납한 뒤 각자 집으로 향했다. 문승협은 행복해하는 서수연선생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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