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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9.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18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10)

일요일정오뉴스를 전하는 아나운서가 평상시와 많이 달랐다. 심각한 표정과 목소리로 2차 석유파동을 우려하였다. 간단한 멘트를 마치고 패널로 나온 대학교수이자 경제전문가에게 현재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질문했다.

이란혁명으로 석유수출국이 유가를 66% 인상하면서, 지난 3월 국제유가가 9.5% 인상되어 2차 오일쇼크가 발생하였다고 분석했다. 1973년 발생한 1차 오일쇼크에 이은 이번 2차 오일쇼크로 전 세계물가상승과 심각한 실업문제를 꼽으며 스태그플레이션을 진단하였다. 또한 미국 FRB가 급작스럽게 불어난 달러회수를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한 점을 지적했다. 미국외채를 끌어다 산업화를 진행 중인 대한민국이나 폴란드 같은 비산유개발도상국은 졸지에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경제가 크게 휘청거릴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고금리정책은 오일쇼크가 끝난 뒤에도 상당기간 지속되어, 중남미와 동유럽 외채위기를 초래할 것이며, 공산권붕괴에도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친다고 부언했다.

한국증권거래소가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하여 여의도증권가시대개막을 알렸다. 워크맨카세트가 국내에 출시된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문승협은 2년 전 최선경에게 선물로 받은 워크맨카세트가 생각났다. 최선경이 일본에 출장 가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문승협의 진외가증조할머니에게 인사하고 받은 돈으로 샀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일주일 뒤에 진외가증조할머니가 9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사람들은 나이와 병세로 판단해 호상이라고 했지만, 진외가증조할머니가 1년 전부터 해수에 시달려 앉아서 잠자기 일쑤였다. 진외가증조할머니와 추억이 많은 문승협에게는 최선경죽음으로 인한 슬픔이 아물어가는 와중에 또 다른 큰 슬픔이었다.

박동후회장 저택에 마련된 빈소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와 경제계를 포함한 문화예술계까지 각계각층에서 보낸 근조화환과 조문객들로 넘쳐났다. 기업인 박동후회장과 정치인 박동일의원을 비롯한 자녀들을 훌륭히 키웠고, 일생을 바르게 살아온 인덕으로 많은 사람들이 애도하였다. 전라도에 있는 국화꽃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일가친척과 고향사람들이 일손을 돕느라 분주하였다. 문재환과 박옥춘은 사위와 딸로서, 문경준과 이항리는 외손자와 외손자며느리로서, 모든 문승협가족이 상주입장에서 물심양면으로 움직였다. 문승협도 증손주들 사이에서 큰형 격이라 아이들을 돌보는데 힘을 보탰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늘 사건이 있었으나, 고인이 일생을 자애자비한 삶으로 명망이 높아 작은 소란조차 없었다. 거지들까지도 초상을 치르는데 방해된다며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렇게 장례일정에 따라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박옥춘이 일가친척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사사로운 일상을 이야기하다, 며느리 이항리와의 갈등과 남편 문재환에 이은 아들 문경준의 험담까지 늘어놓았다. 공교롭게 이를 목격한 문경준이 창피하게 왜 그러냐며 언성을 높였다. 문승협귀에 들어가는데 1분도채 걸리지 않았다.

문승협이 심란한 마음에 의기소침해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데, 진외가증조할머니를 시중들던 순영이 찾아왔다. 응접실로 빨리오라는 임집사말을 전하였다.

문승협이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응접실문을 열었다. 진외가큰할아버지 박동후회장 맞은편에 앉은 낯선 어른들 사이로 홍지아가 보였다. 문승협 뒤를 이어 홍지아엄마가 들어왔다.

“오, 승협아, 오랜만이구나.”

“안녕하셨어요?”

“응. 아버님, 얘가 승협이에요, 지아가 말한 친구.”

“니가 내 손녀 지아친구냐?”

“네? 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얼굴만 매끄럽제, 풍채도 작고 볼품없어 보인디?”

“홍회장님, 그래도 내 손자인디 말이 쪼깐 심하요.”

“하하, 아따 농담이요. 우리 손녀가 좋아서 목멘단께는, 심술 나서 그래봤소.”

“우리 승협이가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팔방미남 인디, 지아가 잘 봤그만.”

“하하, 박회장님의 손주믄 당연지사제, 뭔 그런 것을 자랑하요?”

“허허, 똑똑한 건 날 닮았는디, 생김새 하고 재주는 즈그 할애비제.”

“할애비가 누구요?”

“내 처남 문재환이사, 그 집 장손이요.”

“아, 그 백구두 신고 백색양복 입는다는, 그 멋쟁이 양반이요? 문재환이사님?”

“가끔 입기는 하제만, 늘 작업복차림이지라.”

“아무쪼록 박회장님이 잘 키워주쑈, 내가 쭈욱 지켜볼란께.”

“허허, 걱정 꽉 붙어 매쑈, 내가 잘 키울란께.”

“지아는 더 있다가 온다고?”

“예, 조금만 있다가 가께요.”

이미 조문을 마친 동양어망 홍회장은 며느리 홍지아엄마와 먼저 일어났다. 문승협이 대문까지 배웅했다. 다시 돌아온 응접실에는 홍지아만 앉아있었다.

“미안. 어른들 따라 문상 왔다가, 너 있나 해서 그냥 물어 본건디, 일이 커져부렀다야.”

“지아야.”

“응?”

“아니다.”

“말해, 뭔 말이든 내가 들을 란께.”

“아니야, 와줘서 고마워.”

홍지아는 한동안 못 본 문승협을 볼 수 있을까 해서, 조문을 핑계로 따라왔기에 떳떳한 마음은 아니었다.

문승협은 문상객으로 복잡한 상황에서 어른들 이목을 집중받아 불편하였다. 경솔하다고 한마디 하려 했으나, 진외가증조할머니와 일면식 없는 홍지아가 조문 온 자체에 감사해서 그냥 참았다.

홍지아가 발인하는 날 다시 왔다. 고인을 애도하려고 장지이동을 기다리는 시민들 행렬 속에 서있었다. 빈소에서 나와 운구행렬을 따라가는 문승협을 지켜보았다. 장지에 가려고 버스에 탄 문승협에게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문승협도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로 대신하였다.

운구차와 상주를 태운 버스가 생화로 치장되었다. 조문객이 타는 버스 5대는 종이로 만든 조화로 꾸몄다. 경찰 오토바이 5대와 패트롤카 3대가 동행하며 교통을 원활하게 했다. 고향 선영까지 가는 주요 길목에 어김없이 순찰차가 지켰다. 가는 곳곳 노제마다 고인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추모하였다. 알록달록 꾸며진 상여에 옮겨 장지까지 가는 길에도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앞세운 만장깃발이 바람에 휘날려 마지막 가는 길을 재촉하면서도 미련 없이 잘 가라는 듯 나부꼈다. 딸랑딸랑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종소리가 마치 고인이 세상을 떠나는 소식을 천지간의 산천초목과 중생들에게 알리는 것 같았다. 앞 소리꾼이 선창한 만가에 상두꾼들이 뒷소리를 부르면, 상여꾼들이 운율에 호흡과 발걸음을 맞춰 운구행렬을 움직였다. 꽃상여가 조경이 잘 조성된 선영묘에 도착하고 하관식을 거쳐 관을 안장했다. 영결식거행 후 봉분을 만드는 달구질이 이어졌다.

문승협은 진외가증조할머니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기억에는 없지만 진외가증조할아버지와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길 빌었다. 얼마 전 먼저 하늘나라에 가있는 증손주며느리를 많이 예뻐해 달라는 염치 불고한 기도로 최선경도 함께 추모하였다. 자신에게 주기만 했던 소중한 사람 둘을 잃어 허전한 마음 가눌 길 없었다.


학생본분이라는 문승협의 일상이 빠른 회복을 강요하였다. 거부할 힘도 명분도 없었다.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세상이 만든 명언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름방학을 이틀 앞둔 1학기 마지막 체육시간, 양명기선생이 축구수업에 앞서 퀴즈를 냈다.

“지난주에 한국인 최초로 서독프로축구팀에 입단한 선수가 누군지 아는 사람?”

“아따 그것 모른 사람이 어딨다우, 차범근이지라.”

“그라믄 그 팀 이름이 뭔지 아냐?”

“프랑크쏘세지요.”

“하하하.”

“정확히 모르그만?”

“어허, 선상님이 우리를 완전히 핫바지로 알그만잉. 프랑크푸르트구단이라우”

“그래, 서독분데스리가프로축구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구단이어.”

“그라고 보믄, 축구선수로는 차범근이 최고여.”

“자, 우리도 차범근 멩키로 국가대표축구선수 한번 만들어 보까?”

양명기선생이 축구공이 든 망을 풀어놓고 두 명씩 짝을 이루게 했다. 패스연습에 이어 한 사람씩 슈팅을 가르쳤다. 남은 수업시간 30분은 두 팀으로 나눠 축구시합을 하였다. 축구경기에 전원참여시키려고 학생들을 수시로 바꾸었다. 골키퍼를 보던 문승협도 교체되어 당번이 주전자에 떠온 물을 한 컵 마셨다. 흐르는 땀을 식히며 앉아있는데, 양명기선생이 옆으로 와 앉았다.

“힘드냐?”

“아뇨, 더워서요.”

“오늘 덥기는 무자게 덥다잉, 물 좀 마시제.”

“방금 마셨어요.”

“느그 담임선생은 으짜냐?”

“뭐가요?”

문승협은 서수연선생에 대해 묻자 불현듯 경계심이 생겼다. 공손한 평소와 달리 대답도 퉁명스러웠다.

“아니다.”

“네? 뭐가 아니에요, 뭐가 궁금한데요?”

“아니란께. 근디, 니 태도가 으째 껄적지근하다?”

“제가 뭘요, 선생님이 말을 하시다 마니까, 제가 다시 묻는 거죠.”

“허허, 짜식. 참, 느그 보이스카웃 여름방학에 계룡산 간다믄서?”

“네, 왜요?”

“잉, 나도 같이 갈라고. 느그 담임도 간다드라?”

“네?”

문승협은 1학년 때부터 친절히 대해준 양명기선생과 가깝게 지냈다. 남자다운 성격에 남자답게 생긴 데다 많이 친해져서 호감이었다. 양명기선생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던 덕일고 보복사건 이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 서수연선생에게 관심 있는 듯한 언행에 거부감이 들었다. 더군다나 서수연선생의 보이스카우트캠핑에 같이 간다는 소식을 양명기선생에게 처음 들어 시샘이 났다.

문승협은 종례 하러 들어온 서수연선생을 보자 불쑥 배신감이 들었다. 교실에서 무슨 냄새냐며 창문을 열라는 서수연선생말에는 어이없었다. 학생들에게 성교육까지 했으면서 체육복에 배인 땀냄새와 사춘기청소년에게 나는 테스토스테론냄새도 모른다는 반감이 꿈틀거렸다. 설상가상 종례 하는 서수연선생을 보면서 양명기선생이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자, 알 수 없는 화가 나더니 밉기까지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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