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11)
정부가 고교평준화정책으로 1980년 고교입학대상자부터 고입연합고사에서 고교선발고사로 변경하였다. 고교선발고사에 합격한 중3학생들은 추첨배정방식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여름방학식 날 종례가 끝나고, 보이스카우트대원들이 하계캠핑 최종점검을 위해 보이스카우트대장 민영보선생교실로 하나 둘 모여들었다. 문승협은 아직도 캠핑동행사실을 말하지 않은 서수연선생에게 삐쳐있었다.
서수연선생이 양명기선생과 뒷문으로 들어와 살금살금 문승협 뒤로 걸어갔다.
“워!”
“어쩐 일이세요?”
“뭐야, 너 안 놀래?”
“왜 놀라요?”
“너 놀래주려고 나 여기 온 거 비밀로 했거든.”
“그래요? 아이쿠 깜짝이야, 엄청 놀랐네요.”
“뭐야 시시하게. 너 나한테 삐쳤어?”
“제가 왜요?”
문승협은 놀라게 해 주려고 비밀로 했다는 서수연선생말에 삐친 마음이 풀릴뻔했으나, 뒤에서 웃고 있는 양명기선생을 보고는 다시 언짢았다. 여전히 앙금이 엉켜있었다.
서수연선생은 평소와 다른 문승협태도에 왜 그러는지 궁금하였다.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그럴만한 일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무시했다. 그럼에도 문승협을 의지해서 가는 캠핑이라 자꾸 신경 쓰였다.
작년까지 3학년은 고입연합고사시험으로 참가하지 않았지만, 고교선발고사로 바뀌면서 보이스카우트도반장을 맡은 3학년 남강을 포함해 세 명이 참가하였다. 고교선발고사에 합격할 자신이 있는 3학년 선배들이었다.
일주일 지난 목포역대합실은 휴가와 방학을 맞이한 여행객과 도서 벽지를 오가는 사람들로 아침 일찍부터 붐볐다. 보이스카우트단복을 입은 덕일중대원들이 배낭을 메고 집합했다. 배낭에는 항고나 코펠, 버너와 텐트 등 3박 4일 동안 먹을 쌀과 부식이 들어있었다.
문승협은 대합실로 함께 들어오는 서수연선생과 양명기선생에게 시큰둥한 표정으로 목례하였다. 양명기선생이 잘 부탁한다며 살갑게 했으나, 문승협은 덤덤히 대하였다. 서수연선생은 반갑게 맞아주지 않은 문승협에게 서운했다.
“승협아, 나랑 같이 가는 거 싫어?”
“네? 선생님이 저 때문에 가는 게 아니잖아요.”
“야, 너 때문에 가는 거야. 그리고, 너 때문이 아니라도 그렇지, 말이 좀 섭하다야.”
“에이 무슨 저 때문이에요, 양명기선생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려고 가는 거면서.”
“뭐야?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나 너 믿고 가는 거라고.”
“네네 알겠습니다, 알아서 잘 모시겠습니다, 됐죠?”
문승협은 무심코 비꼬듯 반응하였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서수연선생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며 합리화했다. 서수연선생은 문승협 행동에 점점 속상하였다.
문승협이 서먹하게 서수연선생을 외면하는 사이, 걸스카우트단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대합실로 들어왔다. 낯익은 인혜여중걸스카우트대원들이었다. 민영보대장이 반갑게 인혜여중걸스카우트대장과 인사하고, 덕일중보이스카우트에게 걸스카우트대장 강지영선생을 소개했다. 이번 여름캠핑은 인혜여중걸스카우트와 전 일정을 함께 한다면서 서로 협력하는 즐거운 캠핑을 당부하였다. 예고 없는 일이라 덕일중보이스카우트들이 웅성거렸다. 이미 알고 온 인혜여중걸스카우트들은 덕일중보이스카우트를 향해 잘 부탁한다며 웃었다. 그때 뒤늦게 도착한 걸스카우트 한 명이 허겁지겁 대합실로 들어오면서 문승협에게 찡긋 윙크했다.
“승협아, 안녕.”
“홍지아, 너도 가니?”
“뭔 인사가 그러냐, 너는 내가 안 반갑냐?”
“아니 그게 아니라, 뜻밖이라서.”
“그라믄 더 좋아해야제, 그 놀란 표정은 뭐시대?”
“음마, 승협이는 각시도 같이 간지 몰랐냐? 하하하.”
“에이 각시는 무슨, 놀리지 마세요.”
“남강선배님이시지라, 시아주버니 잘 부탁하요. 여러분 잘 부탁하요잉, 호호호.”
“지아야, 장난 좀 그만해.”
“너는 꼭 내 진심을 장난으로 덮어불드라잉.”
“호호호, 홍지아는 여전히 솔직 당당하구나.”
“오메, 승협이 담임선상님. 안녕하셨소, 선상님도 같이 가시요?”
“응, 우리 재미있게 다녀오자.”
“선상님, 저번에 지한테 승협이를 부탁한다는 말, 변함없지라우?”
홍지아는 성격답게 문승협에게 직진하였다. 장난 삼아 한마디 거든 남강에게 질세라 대꾸하더니 주위를 돌아보며 인사했다. 문승협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서수연선생에게까지 꾸밈없었다. 서수연선생은 마지막 홍지아질문에 즉답 없이 웃음으로 넘겼다.
인혜여중걸스카우트대장은 여자선생이었다. 처음 걸스카우트를 맡은 데다 캠핑경험이 없어 덕일중보이스카우트대장에게 동반캠핑을 부탁했다. 학교와 재단의 승낙을 받아 이뤄졌다.
스카우트들은 대전까지 가는 기차표를 하나씩 받아 들고 줄지어 탔다. 보이스카우트들은 통로 좌측에, 걸스카우트들은 통로 우측에 앉았다. 문승협의 옆통로 건너편에 서수연선생과 강지영대장이 앉았다. 남녀스카우트들이 기차 반 칸을 차지하였다.
민영보대장과 함께 앉은 양명기선생이 기차가 출발하고 20분쯤 지나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스카우트들은 통기타반주에 맞춰 노래 부르며 지루하지 않게 완행열차를 탔다.
‘가방을 둘러멘 그 어깨가 아름다워, 옆모습 보면서 정신없이 걷는데, 활짝 핀 웃음이 내발 걸음 가벼웁게~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 랄라라 랄라라 랄랄 라라라라라~’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둥글게,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춥시다,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랄라랄라 즐거웁게 춤추자, 링가링가 링가 링가링가 링~’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내 사랑하는 그대여 정말 가려나, 내 가슴속에 외로움 남겨둔 채로, 내 사랑하는 그대여 정말 가려나, 내 가슴속에 서글픔 남겨둔 채로~’
‘김세환의 길가에 앉아서’로 시작해 ‘둥글게 둥글게’를 불렀고, ‘송창식의 고래사냥’처럼 신나는 유행가에 이어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등 해변가요제와 대학가요제 노래들로 즐겁게 합창하였다.
한바탕 노래를 부른 뒤, 도반장 남강의 사회로 오락시간을 갖었다. 장기자랑은 필수였고, 손뼉 치기와 휴지 돌리기 같은 게임을 했다. 인디언밥이나 엉덩이로 이름 쓰기 등 다양한 벌칙으로 다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전역에 도착하기 10분 전, 민영보대장이 캠핑일정을 다시 알려줬다.
첫날은 동학사에 캠프를 차리는 무난한 계획이었지만, 둘째 날은 오전에 환경보호운동이 있는 데다, 오후에는 남매탑과 관음봉에 은선폭포를 경유하여 동학사로 돌아오는 등산으로 힘겨운 일과였다. 셋째 날은 오전에 갑사로 이동해 캠프를 다시 설치한 뒤 둘러보고, 마지막 날은 신원사를 들려 목포로 가는 여정이었다.
민영보대장이 일정설명을 마치고, 기차에서 내릴 때 물품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지하였다. 기차정차시간이 한정되어 대전역에 도착하면 서둘러 내려야 했다. 모두 소지품과 장비들을 미리 챙기기 시작하였다. 보이스카우트들은 걸스카우트짐을 거들었다. 서수연선생이 배낭을 메면서 문승협에게 홍지아를 도와주라고 눈짓했다. 홍지아가 도움받아 배낭을 메고 나서 사슴 같은 눈망울로 문승협을 바라봤다. 문승협이 얼결에 서수연선생이 도와주라고 했다고 하자, 홍지아가 눈을 흘기며 혀를 날름하였다.
민영보대장이 기차에서 내린 대원들에게 다시 한번 물품을 점검하라고 하였다. 전부 이상 없음을 확인하고 대전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대전버스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여 달려 동학사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멀리 보이는 계룡산이 양팔 벌려 스카우트들을 환영했다. 정류소와 동학사 중간에 있는 캠프예정지까지 20분쯤 걸었다. 스카우트들은 캠프를 설치할 계곡에 도착하여 늦은 점심으로 라면을 먼저 끓여 먹었다.
식사 후 설거지조와 캠프설치조로 나누었다. 설거지조가 라면 끓여 먹은 식기를 냇가로 가져갔다.
캠프설치조는 다시 주거시설설치조와 구조물설치조로 나눴다 주거시설설치조는 텐트 배치와 설치를 맡았다. 구조물설치조는 조리대와 식탁, 임시화장실 등을 전담하였다.
캠프설치는 숙련된 보이스카우트들이 시범을 보여주며 주도했고, 나머지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가 옆에서 보조하였다. 문승협은 작년에 배운 경험이 있어 능숙한 편이었다
주거시설설치조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외부자침범을 고려하여 캠프바깥쪽에 보이스카우트텐트를, 안쪽에 걸스카우트텐트를 배치했고, 대장텐트 2개는 뒤쪽 가운데에 두었다. 텐트는 2,3인용부터 4,5인용까지 여러 형태였다. 땅바닥에 마른 덤불을 깔고 폴대를 세워 텐트를 친 뒤, 비가 올경우를 대비해 텐트옆에 도랑을 파 배수로를 만들었다. 뱀이나 벌레들이 접근 못하도록 텐트와 캠프 주변 군데군데 백반을 뿌렸다.
문승협이 서수연선생과 홍지아의 텐트를 쳐주었다. 두 사람은 문승협을 보조하면서 경쟁하듯 장비와 용품을 챙겨주었다. 갈증 나 보이면 물을 주고 땀이 흐르면 수건을 건넸다.
구조물설치조가 주위에서 적당한 나무를 구해왔고, 구명승을 이용한 매듭법으로 조리대와 식탁 등을 설치하였다. 임시화장실을 만드려고 텐트와 멀지 않은 엄폐된 곳을 물색했다. 야전삽으로 알맞게 구덩이를 판 뒤 줄로 엮어 만든 나무발판을 놓았고, 나무기둥을 박아 가림막으로 마댓자루를 묶었다. 구역표시와 안내판을 세워 캠프설치를 마무리하였다.
한여름뙤약볕에서 작업이라 다들 땀을 줄줄 흘렸다. 몸도 씻을 겸해서 계곡으로 향했다. 보이스카우트들이 더위를 식히려 앞다퉈 계곡물에 몸을 던졌다. 문승협도 반바지를 입은 채 뛰어들었다. 얼음장 같았던 작년 무주구천동보다는 덜 차가웠으나, 물이 닿는 순간 닭살이 돋을 정도로 시원하였다. 서수연선생과 걸스카우트들은 반바지차림으로 개울가를 걷거나, 치마를 허벅지께 올려 잡고 발을 물에 담갔다. 서수연선생과 홍지아가 헤엄치다 물가 쪽으로 걸어 나오는 문승협을 향해 손으로 물을 뿌렸다. 문승협이 대적하여 손바닥으로 물을 튕겨 날리자, 주위에 있던 스카우트들이 참전하면서 여자와 남자 대결로 번졌다. 서수연선생과 홍지아가 물싸움에 밀려 개울밖으로 도망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물기를 털며 수건으로 닦아내기 바빴다. 물속에 있던 걸스카우트와 보이스카우트들이 합심해 두 스카우트대장과 양명기선생을 공격하여 모두 흠뻑 젖었다. 스카우트들은 그렇게 한바탕 물싸움을 하며 시원한 물놀이로 망중한을 누렸다. 한 시간쯤 지나 캠프로 돌아갔다. 저녁식사시간까지 개인정비를 하면서 자유시간을 보냈다.
저녁시간이 다가오자, 식사당번들이 조리도구와 식품을 꺼냈다. 일부는 식재료와 쌀을 코펠에 담아 씻으러 갔고, 몇몇은 석유버너를 가열해 불을 지폈다. 씻어온 쌀을 제일 큰 코펠 네 개와 중간 코펠 두 개에 담아 불붙은 버너에 올렸다. 잘 익은 김치에 꽁치통조림과 대파 등을 썰어 넣은 꽁치김치찌개를 주요리로 했다. 밥이 조금 설익어 다시 뜸 들이느라 시간을 소비하였지만, 각자 집에서 싸 온 반찬을 곁들여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와 식사자리 정리정돈을 마치고, 모두 캠프공터풀밭에 모여 앉았다. 교실에서만 배웠던 별자리를 실제로 찾아보았다. 별자리로 방향을 분간하여 야간산행에서 조난당했을 때 응용법을 교육받았다. 민영보대장이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별을 보며 북두칠성과 북극성,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찾아 동서남북을 가르쳤다. 별이 계속 위치를 바꾸기 때문에 한 번 익힌 별자리도 놓칠 수 있으니, 길잡이 별인 북극성을 잘 기억하라고 하였다. 모두 드러누워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을 보는 시간을 갖었다.
문승협은 저기 어디쯤 지구와 똑같은 별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저 많은 별 어딘가에 있을 진외가증조할머니와 최선경을 생각하였다. 우주에 떠있는 별들이 셀 수 없이 많음을 새삼 통감했다.
민영보대장이 내일 힘든 등산일정이 있으니 일찍 쉬라며 교육을 끝냈다. 스카우트들은 한동안 별을 더 관찰하고 하나 둘 자기 텐트로 갔다. 서수연선생도 한동안 말없이 별을 바라보다 문승협에게 잘 자라며 강지영대장과 텐트로 향하였다. 홍지아가 문승협 옆에 다가가 앉았다.
“너는 안 잘 거여?”
“이제 자야지.”
“오늘까지는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디, 내일은 으짤란가 모르겄다.”
“내일 조금 힘들긴 해도 괜찮을 거야.”
“참, 최선경네 집 말이어, 팔린 거 같드라.”
“뭐?”
“먼 친척이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온 단디, 알고 본께 최선경네 집이 드라고.”
“…….”
“아따 괜히 말했나 싶다, 모른체끼할 것을.”
“아니야, 알려줘서 고마워.”
“나 자러 들어간다, 잘 자라잉.”
“응, 잘 자.”
문승협은 진외가증조할머니 장례식 때 인기척도 없는 최선경집을 가보았다. 집을 내놓은 줄도 모르고 최선경엄마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믿었었다. 최선경과 마지막 남은 연줄마저 끊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적하였다. 유난히 밝게 빛나는 샛별을 향해 ‘잘 자, 내일 또 보자’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침 일찍 일어난 식사당번들이 식재료를 찾느라 부스럭거렸다. 문승협은 2,3인용 텐트에서 남강과 불편함 없이 잤다. 잠에서 깨어 텐트 밖으로 나오니 산바람에 서늘한 아침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강지영대장이 어디를 다녀오는지 허겁지겁 뛰어왔다. 잠에서 덜 깨 어슬렁거리는 식사당번들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하며 아침을 진두지휘하였다. 문승협도 식재료를 씻으러 가는 아침당번을 도우러 뒤따라갔다. 막 큰길로 나서는데, 서수연선생이 양명기선생과 캠프 쪽으로 걸어오면서 문승협에게 생기 있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일찍 일어났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승협이가 쳐준 텐트 덕분에 잘 잤어.”
“어디 다녀오세요?”
“아침산보 삼아 좀 걸었어.”
서수연선생과 아침인사를 나누는 중에 문승협표정이 미묘히 변했다. 양명기선생을 응시하며 지난번 서수연선생에 대해 물어왔던 일을 떠올렸다. 서수연선생에게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삐딱하게 물었다.
“데이트하신 거예요?”
“오메, 들켜 부렀네. 승협아, 이거 비밀이다잉?”
“그럼, 두 분이 사귀시는 건가요?”
“뭐? 호호호.”
문승협은 불쑥 끼어들어 비밀이라는 양명기선생말에 더욱 기분 나빴다. 심사가 뒤틀려 서수연선생에게 직접 확인하려고 재차 질문하였으나, 서수연선생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웃기만 했다. 문승협이 알 수 없는 실망감에 획 돌아서 아침당번을 향해 뛰어갔다. 서수연선생은 잠시 문승협뒷모습을 바라보다 캠프로 들어갔다.
스카우트들이 아침식사 후 오전일정을 소화하였다. 환경보호운동으로 계룡산계곡에서 쓰레기 줍기를 했다.
조금 이른 점심을 해 먹고 오후에 있을 등산준비로 분주하였다. 민영보대장이 등산에 필요한 간단한 소지품만 챙기라고 당부하며, 분실이나 외부침입을 대비한 캠프단속을 지시했다.
스카우트들이 준비를 마치고 집합하였다. 민영보대장이 캠프단속과 개인소지품을 일일이 검사했다. 스카우트들에게 산행 시 주의사항을 재차 강조하고 출발하였다.
스카우트들이 20여분 걸어 탐방로입구에 도착했고,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었다.
1시간 정도 올라가 남매탑에 도착하였다. 남매탑은 좌측에 5층 우측에 7층 석탑이 있고, 지고지순한 오누이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다들 주위경관을 둘러보며 한숨 돌렸다.
“제수씨, 이 탑은 가만 본께, 문홍탑이라고 해야 쓰겄그만.”
“문홍탑?”
“문승협과 홍지아 탑, 문홍탑.”
“호호호, 시아주버니, 마음만 받고 사양하께라. 승협이랑 남매여도 좋긴 한디, 남매라서 이루어질 수 없는 비극적 사랑은 강력히 거부할라요.”
“하하하, 호호호.”
남강과 홍지아가 주고받는 농담에 웃음이 이어졌다. 잠시 휴식을 취한 스카우트들이 다시 출발했다.
돌계단과 경사를 오르락내리락 정신없이 걸었다. 내리쬐는 햇볕에 무수히 땀을 흘렸다.
문승협이 앞서 올라가다 일행들과 간격을 맞추려고 뒤돌아 보았다. 바로 뒤에 따라오던 홍지아가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그보다 10여 미터 아래에 서수연성생이 올라오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서수연선생에게 주려고 수통을 꺼내는 순간, 서수연선생이 양명기선생에게 작은 배낭을 맡기더니 양명기선생이 내민 손을 잡고 올라왔다. 문승협은 수통을 찔러 넣고 홍지아손을 잡아끌어주었다.
30분쯤 지나 해발 775미터 삼불봉에 도착하였다. 문승협이 갈증 난다는 서수연선생말을 듣고 수통을 건넸다. 서수연선생이 퉁명스레 홍지아나 잘 보살피라고 했다. 양명기선생에게 자기 배낭을 달라고 하여 물통을 꺼내 스스로 마셨다. 문승협과 서수연선생 사이에 오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아침에 이어 두 번째였다.
스카우트들은 또 내리락 오르락 마치 닭 볏을 쓴 용모양 같은 능선을 걸었다. 산이름이 왜 계룡산인지 체험하였다. 마지막 오름길을 극복하고 올라서자, 잔뜩 물기품은 구름들이 스카우트를 맞이했다. 1시간여 걸려 도착한 관음봉은 해발 766미터로 삼불봉보다 조금 낮았지만, 가슴 탁 트인 경관으로 계룡산 주봉임을 알렸다. 넓은 휴식공간이 있어 사람들이 많았다. 동료로 보이는 등산객아저씨들이 손에 종이를 들고 이야기하였다.
“이 삐라 갖고 북한 가면, 생활보장금 3억3천3백만 원에 상금으로 185억까지 준다네, 자네 갈란가?”
“헛소리 말고, 자네나 그거 갖고 경찰서 가서 학용품이나 받으시게나.”
“그러면, 그것이 얼마짜리 연필이여?”
“대충 계산하면, 한 190억짜리 되겠네.”
“하하하, 호호호.”
삐라는 체제선전, 민심교란, 주민선동을 목적으로 북한이 풍선에 넣어 날려 보낸 전단지였다. 학교나 경찰서에 갖고 가면 공책이나 연필 등 학용품을 상품으로 주었다.
“웃는 자네들은 학생들인가 뭣인가?”
“중학생이고요, 보이스카웃하고 걸스카웃이어라.”
“처음 보는 제복이네만, 군복보다 멋지구만.”
땀을 식힌 스카우트들이 멀미 날 정도 심한 내리막길과 40분가량 사투를 벌여서 은선폭포에 도착했다. 물줄기낙차로 생긴 운무가 아름다운 계룡 8경 중 제7경이었다. 갈수기 때는 볼 수 없다는 폭포수가 40미터 되는 높이에서 쏟아져 내렸으나 아름다운 폭포를 감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관음봉에서 출발할 때 뭉치기 시작한 먹구름이 심술부리듯 이슬비를 뿌렸다. 점차 굵은 빗줄기로 바뀌었다. 예고 없는 비로 비옷을 챙기지 못한 스카우트들은 옷이 젖기 시작하였다. 만전을 기해 비옷을 준비한 문승협이 비에 젖어가는 서수연선생에게 주려고 꺼냈지만, 양명기선생이 우비를 서수연선생에게 입혀주고 있었다. 문승협은 굳어진 표정으로 홍지아에게 비옷을 건넸다. 괜찮다는 홍지아에게 입혀주는 와중에 서수연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서로 고개를 획 돌려 외면하면서 세 번째 신경전을 벌였다.
스카우트들이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질척거려서 미끄러운 길을 40여분 하산하여 동학사경내에 들어갔다. 걸스카우트는 지쳤으나 보이스카우트는 아직 힘이 있었다.
동학사는 절동쪽에 학모양 바위가 있어 동학사東鶴寺라는 설과 고려충신이자 동방이학東方理學 조종祖宗인 정몽주를 이 절에 제향 하여 동학사東學寺라고 했다는 설이 함께 전해졌다. 사육신 초혼제와 단종제단으로 단종폐위역사가 있었다.
스카우트들은 하산할 때 비까지 내리는 날씨에도, 5시간 계룡산등산대장정을 무사히 잘 마무리하였다.
어느새 바뀐 이슬비를 즐기며 캠프로 이동했다. 내린 비로 텐트는 물론 식기와 식자재 일부가 젖었으나, 다행히 중요식품은 무사하였다. 스카우트들이 물기만 닦고 피곤한 몸으로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몇몇 보이스카우트들은 이슬비를 피할 수 있게 조리대와 식탁 위로 천막을 설치하였다. 땅이 질척이지 않게 자갈과 돌을 바닥에 깔았다. 다들 오랜 시간 젖은 물기로 체온이 떨어져 추위에 떨었지만, 이슬비를 막아주는 천막 아래 서서 저녁식사를 해치웠다. 재빨리 뒷정리한 후 서둘러 씻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보이스카우트들은 대체로 별 탈 없었으나, 서수연선생과 일부 걸스카우트가 재채기를 했다. 양명기선생이 쌍화탕을 사 와 나눠줬다. 모두 쌍화탕을 마신 뒤 각자 텐트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남강이 심심하다며 옆텐트에 가서 화투 치자고 했으나, 문승협은 못 친다면서 텐트에 혼자 남았다.
비 내리는 계룡산풍경은 고즈넉한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문승협은 텐트사이로 보이는 풍경과 자연의 소리에 취해 멍 때렸다. 나른한 피곤이 몰려와 하품하는데, 서수연선생텐트에서 기침소리가 들렸다. 열이 많아서 약을 먹어야겠다는 강지영대장목소리가 뒤이었다. 문승협이 반사적으로 일어나 지갑을 챙겼다. 우산을 펼치고 슬리퍼를 신었다. 때마침 텐트에서 나온 홍지아가 우산 안으로 냉큼 들어왔다.
“어디 가냐, 약 사러 가지?”
“…….”
“나도 따라가께.”
“그럼 우비 입어.”
문승협은 신나서 텐트로 가는 홍지아를 뒤따라가며 우산을 씌워줬다. 홍지아가 급한 마음에 우비단추를 잘못 채웠다. 문승협이 다시 채워주자, 홍지아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너 자꾸 그런 눈빛 하지 마, 부담스러워.”
“제발 부담이라도 좀 가져라. 좋아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눈빛까지, 나는 통제 못하겄다.”
“…….”
“아마 내 눈빛 하고, 니가 서수연선생님 보는 눈빛 하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여.”
문승협은 생각도 못한 서수연선생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빛과 비교에 당황하였지만, 갑자기 투정 부리는 홍지아표정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뭐여, 너 웃었어?”
“가자,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갔다 오자.”
“뭐시여, 너 방금 웃었잖애? 뭣 뜻이어, 언능 뭔 웃음인지 말해 보란께?”
“지아야, 너는 관찰력 있고 이해심 많고 솔직하고 해맑고 착해. 그래서, 네가 밉지 않아.”
“그라믄, 자꾸 나를 밀치지만 말고, 아까 멩키로 이정스럽게 대해주믄 안 되냐? 니 맘에 들어가는 거 까진 안 바라께, 그냥 아까 멩키로만 해주믄 좋겄는디.”
“넌 내가 왜 좋니?”
“오호, 인자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거는 확실히 안 것이제?”
“내가 뭐 대단한 게 있다고.”
“니가 대단해서 좋아한 거 아니어. 좋아한디 이유가 있간디, 그냥 좋은께 좋은 거여.”
문승협이 평소 느꼈던 홍지아에 대한 생각을 말해주자, 홍지아는 작은 소망을 이야기하듯 말했다. 둘은 처음으로 관계와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홍지아가 대화가 이어질수록 우산 안으로 바짝 들어왔다. 무심결에 문승협 팔을 잡았다 놓았다.
“지아야, 우산 들어봐.”
“왜?”
“소매 좀 걷자, 불편해 보인다.”
“…….”
“또 그 눈빛, 내가 부담스럽다고 하지 말랬지.”
“호호, 시방 부끄럽냐? 오호라, 이것이 요로코롬 잘 통할지 몰랐네잉.”
“이그.”
“아!”
문승협이 홍지아손을 덮은 우비를 팔꿈치까지 접어주었다. 홍지아가 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문승협을 바라보았다. 홍지아는 하지 말라며 부끄러워하는 문승협모습이 귀여워서 놀렸다. 문승협은 못 말리는 홍지아이마에 검지로 딱밤을 살짝 때렸다. 홍지아가 아픈 척 과장된 몸짓을 하다 얼결에 우산 든 문승협 팔을 잡았다. 어색해하는 문승협반응에 팔을 놨으나, 걸으면서 우산 든 손을 바꿀 때마다 우비를 걷은 홍지아팔과 문승협 팔이 계속 스쳤다.
둘이서 약을 산 뒤 캠프로 돌아왔다. 홍지아는 우비를 벗으러 갔다. 문승협이 서수연선생텐트로 들어갈 때, 강지영선생이 서수연선생에게 약을 먹이고 있었다. 옆에 앉아있는 양명기선생손에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문승협은 사온 약봉지를 아무도 모르게 얼른 호주머니에 넣었다. 홍지아가 물을 준비해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양명기선생과 강지영대장이 텐트 밖으로 나갔다.
“선상님, 약 드셔야지요.”
“응, 방금 먹었어.”
“몸은 좀 으짜요?”
“지아가 걱정해 주니까, 금세 낫는 거 같다.”
“약은 승협이가 사 왔는디, 칭찬은 내가 받네요잉.”
“응?”
“아 아니에요, 약 드셨으니 누워서 좀 더 쉬세요.”
문승협이 황급히 대화를 끊었다. 누우라고 권하며 편히 누울 수 있게 자리를 정리했다. 홍지아가 문승협 호주머니에 삐죽 나와있는 약봉지를 발견하고, 바닥에 있는 또 다른 약봉지를 보았다.
“지아는 캠프 간다니까, 집에서 흔쾌히 보내줬니?”
“아니요, 울엄니아부지가 걱정을 사서 하믄서, 못 가게 난리법석이었어라우.”
“그럼 어떻게 온 거야?”
“승협이랑 같이 간다고, 땡깡 좀 부렸지라.”
“호호, 승협이랑 간다니까 허락해 주신 거야?”
“예, 승협이 옆에 딱 붙어있는 조건으로 허락해 줘서 왔는디, 실상은 딴판이네요.”
“지아야, 농담 좀.”
“알았다 알았어, 나의 진실을 농담으로 덮어 불자. 근디, 수확은 쪼깐 있었어라.”
“그래?”
“산 오를 때 손도 잡아서 끌어주고, 물도 챙겨주고, 우비도 입혀주고. 호호호.”
“…….”
갑자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홍지아가 깜짝 놀라 옆에 앉은 문승협에게 안기다시피 하였다. 문승협은 홍지아가슴이 팔에 닿아 꼼짝 할 수 없었다. 홍지아가 흠칫하며 문승협 품에서 떨어져 앉았다. 무안함을 감추려고 한마디 했다.
“오메 놀라라,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나는 거짓갈 한 적 없는디, 마른하늘에 뭔 날벼락이까잉.”
“승협아, 지아한테 좀 잘해줘라.”
“선상님 냅두쑈, 승협이는 승협이 방식이 있은께라. 같은 여자가 잘해 주란께, 기분이 쪼까 껄적지근하네요.”
“호호, 그래?”
서수연선생이 태연히 웃었지만 표정은 굳어있었다. 강지영대장이 들어오자, 문승협과 홍지아는 밖으로 나갔다. 어느덧 비가 멈춘 대신 계룡산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각자 텐트로 돌아가 곧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