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12)
문승협이 아침에 일어나 텐트밖으로 나왔다. 청량한 공기가 전신을 감싸고돌았다. 모든 산의 비 온 뒤 아침풍경은 자체만으로도 훌륭하지만, 정상부터 산 아래까지 운무가 그윽한 계룡산자태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훌륭한 산수화가 탄생했으리라.
오늘은 갑사로 이동해야 해서 다들 일찍 일어났다. 평상복을 입고 목에 스카우트항건만 두른 채 하나둘 텐트밖으로 나왔다. 어제 등산하면서 비에 젖은 스카우트단복을 입을 수 없었다. 다들 온몸이 뻐근하였으나 다행히 아픈 사람은 없었다. 서수연선생도 약을 먹고 금세 회복했다.
조식을 해 먹고 캠프철수작업에 들어갔다. 조별로 조리대와 식탁을 철거하고 임시화장실을 매립하는 등 원상 복구하였다. 텐트를 해체하고 쓰레기를 깨끗이 처리했다. 거의 머물다간 흔적조차 없었을 정도였다.
동학사정류장에서 갑사방면버스에 올랐다. 등산노독과 캠프정리로 힘쓴 탓에 버스를 타자마자 기진맥진해 졸았다. 문승협도 차창 밖 풍경을 구경하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였다.
버스가 1시간여 달려 갑사에 도착할 무렵, 윗장이라는 정류장에서 여자아이 둘이 탔다. 꾸벅꾸벅 졸던 문승협이 버스에 오르는 여자아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아이가 최선경과 너무 닮아 환생한 것으로 착각했다. 국민학교5학년 때 방앗간에서 처음 만났던 최선경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장이 요동쳤다. 자신이 앉아있는 근처로 오길 바랐지만 버스 중간에 서있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내린다는 여자아이들의 대화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최선경을 닮은 아이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문승협을 의식하였다. 그러나 힐끗 쳐다볼 뿐 무심히 외면했다. 문승협이 다급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저기 몇 학년이에요?”
“저유? 5학년 인디유?”
“어디까지 가요?”
“다음 정류장유.”
“이름이 뭐예요?”
“지선아 이리 나와봐. 그 짝이 뭔디 남의 이름을 묻고 그런대유?”
“명주야 왜 그랴, 그냥 내리자.”
몇 마디 나누지 않았는데 금세 중장1리정류장에 도착하였다. 두 여자아이는 버스에 내려서도 이상한 사람이라는 눈빛으로 문승협을 째려보았다. 문승협은 버스차창 밖으로 두 여자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목 빠지겄네요 승협씨.”
“어, 안 잤어?”
“몇 학년이믄 뭐 할라고 물었으까?”
“그 그냥, 좀 귀여워 보여서.”
여자아이에게 질문하는 문승협목소리에 깨서 지켜보던 홍지아가 눈을 흘기며 한마디 하였다. 서수연선생도 눈을 흘기진 않았으나 비슷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은 그 여자아이가 최선경을 닮았다는 데 이의가 없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이름까지 묻는 이유를 충분히 알았다.
문승협은 무안함도 잠시, 두 아이 성은 모르지만 대화 중에 들은 지선과 명주라는 이름을 되뇌었다. 지선이라는 아이가 피부만 까무잡잡할 뿐, 큰 키와 마주쳤던 눈빛까지 영락없는 최선경이었다.
스카우트들이 다음 갑사정류장에서 하차했다.
갑사계곡에 캠프를 설치한 뒤, 아직 축축한 스카우트단복을 텐트줄 곳곳에 널어 말렸다. 김치와 반찬들도 시원한 계곡물에 담가놓았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따가운 여름햇볕에 땅이 바싹 말라 먼지가 날렸다. 널어놓은 빨래도 빠르게 말랐다. 점심을 지어먹고 갑사구경에 나섰다.
“뭐를 그렇게 찾냐?”
“응? 아무것도 아냐.”
“너 아까 버스서 본 가시나 찾제?”
“아 아냐, 그냥 여기저기 둘러보는 거야.”
“호호, 승협이는 표정에 다 나타나지.”
문승협이 혹시나 싶어 지선이라는 아이와 재회를 기대하며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었다.
홍지아가 그럴 줄 알았다고 핀잔하자, 서수연선생도 동참하여 홍지아와 편이 되었다.
문승협은 두 사람에게 속마음을 들켜 뻘쭘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몰래 슬쩍슬쩍 살폈다. 언제나 그렀듯 문승협기대와 세상은 늘 따로 놀았다. 결국 포기하고 갑사탐구에 집중하였다.
스카우트일행이 갑사일주문을 통과해 오래된 나무들로 우거진 산길을 걸었다. 나무숲으로 덮여 싱그러운 공기와 매미소리가 넘쳐나는 사천왕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갑사가 나왔다. 대웅전과 갑사동종은 필수코스였고, 철당간과 승탑은 덤이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문승협이 합창대회참가곡들을 나직이 불렀다. 누군가는 따라 부르고, 누군가는 풍경에 어우러져 울리는 노래를 즐겼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문승협이 서수연선생신청곡으로 가곡 ‘선구자’와 ‘비목’을 부르자, 지나가던 등산객들도 함께 불렀다. 서로가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미소로 화답했다. 가을갑사라 하여 추秋갑사라고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여름갑사도 그 이상이었다.
즐겁게 갑사구경을 다녀온 스카우트들이 한여름 더위를 식히려 갑사계곡에 몸을 담갔다. 수박을 깨 먹으며 한나절을 여유롭게 보냈다. 시원한 계곡바람이 불어오는 나무그늘에 누워 낮잠을 자기도 하였다.
캠핑마지막 날 저녁식사라 삼겹살을 굽고, 남은 재료를 탈탈 털어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를 끓였다. 감자볶음에 장조림까지, 가져온 모든 반찬을 꺼내놓고 푸짐히 먹었다. 설거지인원을 빼고 모두 다음일정에 투입되었다.
보이스카우트가 캠프파이어를 준비하고, 걸스카우트는 과일과 과자 음료수를 마련했다.
스카우트캠핑의 꽃이라고 하는 캠프파이어가 시작되었다. 개회선언과 몇 가지 의식이 서론이라면, 둥그런 불꽃이 줄을 타고 내려가 우물정자로 쌓아 올린 장작더미에 불이 붙으면 본론이었다.
양명기선생이 치는 기타에 맞춰 다 함께 노래하였다. 스킨십으로 친밀감을 높이려고 두 명이 한마음이라는 커플게임을 했다. 조별장기자랑과 수건 돌리기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수건 돌리기 게임에서 문승협이 서수연선생에게 벌칙으로 엉덩이로 이름을 쓰게 하여 굴욕을 선사하였고, 서수연선생은 홍지아를 걸리게 하여 딱밤을 맞는 아픔을 주었다. 홍지아는 문승협을 잡으려다 오히려 본인이 잡혀 얼굴에 낙서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남녀가 함께하는 게임이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오갔다. 똘망똘망한 눈빛에 관심과 감시가 있었다. 특히 커플게임에서 오묘한 견제와 질투도 존재했다. 게임마지막에 신나는 음악을 틀고 고고춤대회를 하였다. 캠프파이어 마무리는 조용한 배경음악에 촛불의식이었다.
뒷정리가 끝난 후, 문승협은 더위를 식히려고 산보에 나섰다. 조금 걷다가 달이 보이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뛰따르던 서수연선생이 옆에 앉았다.
“바람도 선선하고, 달빛이 참 밝다.”
“네.”
“너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아뇨, 왜요?”
“그럼 삐친 거는?”
“없어요. 선생님은 있나 보죠?”
“나도 뭐 특별히 없어.”
“그럼 특별하진 않지만, 뭔가 있다는 거네요?”
“말하기는 좀 유치한데, 나한테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좀 서운하더라.”
“네? 제가요?”
“응, 등산 때도 홍지아만 챙기고, 물도 우비도 홍지아에게만 줬잖아.”
“하하, 그렇게 보셨어요?”
“바란 건 아니지만, 좀 서운하긴 하더라고.”
“선생님이 지아 챙기라고 했잖아요. 그게 진심이든, 화나서 한 말이든 간에요.”
“…….”
“저는 오히려 선생님이 좀 웃기던데요?”
“뭐가?”
“제가 물도 챙기고 우비도 챙겨드리려 했는데, 양명기선생님이 주는 걸 넙죽넙죽 잘도 받으시던데요. 손도 덥석덥석 잘도 잡고.”
“야 그건.”
“아침에는 데이트도 하시고, 아주 보기 좋더라고요.”
“그건 오해야 오해. 아침에 강지영선생이랑 셋이 갔다가, 강선생이 아침준비로 먼저 간다고 뛰어가서, 우리는 그냥 뒤따라 천천히 걸었을 뿐이라고.”
“양명기선생님이 들켰다면서, 비밀로 해달라는 말까지 했는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 미치겠네 진짜. 승협아, 이건 절대 비밀인데, 지킬 수 있겠어?”
“네. 선생님과 양명기선생님이 사귄다는 거, 죽을 때까지 지킬게요, 됐어요?”
“이그, 그게 아니라. 사실은 양명기선생과 강지영선생이 사귀고, 강지영선생은 나랑 친한 사이야.”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절대 비밀이다, 사내연애라 소문나면 복잡해진단 말이야.”
“진짜요? 근데 왜 양명기선생님은 선생님을 그렇게 챙긴대요?”
“내가 몸이 좀 안 좋다고, 강지영선생이 양명기선생에게 부탁했어. 비밀 지킬 거지?”
“네, 비밀 지킬게요.”
“오호라, 너 그래서 나한테 삐쳤구나? 질투 나서, 그렇지? 맞지?”
“…….”
문승협은 마침내 양명기선생이 서수연선생에 대해 물은 이유를 알았다. 서수연선생에게 속마음을 들켜 부끄러웠으나, 양명기선생과 아무 관계가 아니어서 안도했다. 더구나 서수연선생이 홍지아를 질투하다니 기뻤다.
서수연선생은 홍지아를 상대로 시샘한 것이 창피하고, 양명기선생을 시기한 문승협에게 더욱 애정이 갔지만, 선생으로서 가져도 되는 마음인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두 사람은 순수한 사제간사랑에 인간적 남녀본성이 더해진 갈등이 있었으나, 서로 위하는 마음이 생각보다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세 번의 신경전으로 생긴 오해가 해소되어 한결 나아진 기분이었다.
어두운 밤 울퉁불퉁 흙길을 서로 챙기며 조심조심 내려갔다. 캠프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홍지아가 서있었다.
“수상하게 시리, 이 야밤에 어디들 다녀오시오?”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너 지달렸제.”
“어? 지아야, 이쪽으로 가자.”
문승협이 홍지아뒤쪽에서 손잡고 걸어오는 양명기선생과 강지영선생을 보았다. 두 사람 교제를 비밀로 해야 한다는 서수연선생말이 생각났다. 홍지아에게 발각될까 봐 황급히 반대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홍지아손을 잡아끌자 순순히 따라왔다.
“뭐 한디 오던 길로 다시 가냐?”
“그 그냥, 이쪽이 바람도 선선하고 걷기도 좋아서.”
“진짜 수상한디? 내 손까지 잡고, 거그다가 당황해서 흔들리는 눈빛까정.”
“하하, 너는 이 어둠에서도 내 눈빛이 보이냐?”
“아따 그 말했다고 금세 손 놔부냐? 선상님, 혹시 승협이랑 내 욕한 거 아니지라우?”
“호호, 지아가 잘못한 게 있어야 뒷담화라도 하지.”
“흐흐, 제가 쫌 완벽하기는 하지라. 근디, 선상님 건강은 좀 으짜시요?”
“응, 이제 다 나았어, 괜찮아.”
“승협이가 사다 준 약을 먹었으믄, 승협이 정성 땜시 더 빨랑 나았을 것인디.”
“승협이가 약을 사 왔었어?”
“양명기선상님이 준 약 드신께로, 지가 사온 약은 호주머니에다 쑥 넣어붑디다.”
“너 그랬어? 말하지 그랬어, 난 그것도 모르고.”
“그렇다고 방금 약 먹었는데, 또 먹을 순 없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말은 했어야지.”
“오메, 선상님 눈에서 꿀 떨어지네 그냥. 선상님, 저도 약 사러 같이 갔었다는 사실을 함께 아룁니다잉.”
“그랬구나, 지아도 고맙다.”
그동안의 시샘과 질투가 모두 표출되어 이해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가 바라며 원하는 흔적이 더욱 뚜렷해졌다. 스스로 풀어야 할 난제가 늘어났다.
다음날 스카우트들은 춘春동학 추秋갑사를 뒤로하고 마지막 일정인 신원사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계룡저수지 근처 하대리삼거리에 접어들 즈음, 문승협이 길갓집에서 나오는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어제 버스에서 만났던 최선경을 닮은 지선이라는 아이였다. 그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뭔가가 심장을 강하게 때렸다.
두 사람은 계속 서로를 바라보았다. 버스가 삼거리를 지나 좌회전하여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문승협도 지선이라는 여자아이도 서로에게 알 수 없는 강렬한 끌림이 있었지만, 각자 흐르는 시간과 함께 기억에서 곧 지워질 일이었다.
문승협은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가로수를 보며, 인간에게 수많은 인연이 있으나 기억을 찾아내지 못할 뿐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신원사에 도착하기까지 최선경얼굴과 오버랩된 지선이라는 아이의 얼굴이 떠나지 않았다. 신원사를 둘러보면서 점차 옅어졌다.
신원사는 651년(의자왕 11년) 열반종의 개조인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다. 그 뒤 폐허가 되어 신라말 이곳을 지나던 도선이 중창했고, 1298년(충렬왕 24년) 무기화상이 3창한데 이어, 1396년(태조 5년) 풍수도참사상가인 무학대사가 4창하였다. 무학대사는 태조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 조선건국초기 한양천도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태조와 태종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데도 공이 컸다. 조선왕조개창에 큰 영향을 준 문화재로 대웅전과 5층석탑이 있고, 대웅전에서 50m 떨어진 곳에 전국 으뜸가는 산신기도장 산신각인 중악단이 있었다.
스카우트들이 계룡산 3대 사찰 마지막 신원사를 둘러보는 여정을 마무리하고 목포를 향해 출발했다. 늘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펼쳐지는 풍경처럼, 기차를 타자마자 모두 잠에 빠졌다.
저녁 6시가 넘어 목포역에 도착하였다. 광장에 모여 해산식을 한 뒤 피곤을 챙겨 각자 집으로 향했다.
문승협은 택시 타는 서수연선생을 배웅하였다. 20여 일 남은 방학 동안 만나지 못해 서로 아쉬워했다.
홍지아가 배웅하고 돌아서는 문승협을 불렀다. 마중 나온 엄마차를 같이 타자며 졸랐다. 문승협은 애써 기다려준 미안함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다. 홍지아는 집에 도착하기까지 3박 4일을 회상하며 문승협과 있었던 일들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했다. 문승협은 홍지아엄마질문에 대답만 하다 차에서 내렸다.
문승협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기념품으로 사 온 효자손을 할머니 박옥춘과 엄마 이항리에게 하나씩 선물하였다. 작은 고모 문희경에게 부채를, 동생 문현아와 문윤아에게 목각인형을 주었다.
샤워를 하고 저녁식사를 한 후 방으로 갔다. 일찍 자려했으나, 문현아와 문윤아가 방으로 쳐들어왔다. 캠핑이야기를 궁금해하는 동생들 질문이 끝나지 않았다. 일일이 답해주다 지친 문승협이 졸려 죽겠다며 사정사정하여 몰아냈다. 비로소 피곤한 몸을 잠자리에 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