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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16.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27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19)

서수연선생이 긴 연휴를 병치레로 보냈다면, 문승협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매번 같았던 문승협의 추석일정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돌아가신 진외가증조할머니성묘였다. 선영에 모셔진 묘에는 잔디가 잘 덮여 안착되었다. 새로 심어놓은 아름드리나무들과 조경석도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았다.

특별한 변화라면 무척 오랜만에 아버지와 보내는 명절이었다. 내심기대에 찼지만 막상 닥쳐보니 별다른 소통도 없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여전한 괴로움은 엄마와 아버지에 대한 변함없는 친척들의 냉대와 차별적 언행이었다. 그로 인해 더욱 말수가 줄어든 사춘기 문승협에게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다.

문승협이 스트레스와 지루함으로 연휴를 지냈다면, 대한민국정치권은 태풍 전 격랑처럼 출렁였다.

이화여대생 3,000여 명이 ‘이화민주선언’ 발표 후 반유신집회를 벌였다.

나흘 뒤 추석전날은 김영삼신민당총재 의원직제명파동이 일어났다. 문승협이 지난 8월 중순 여름방학끝무렵, 부산 작은집에 갔을 때 택시기사에게 들었던 YH무역사건과 연관선상이었다.

김영삼신민당총재가 회사 측 부당폐업에 신민당당사를 점거하고 무기한농성을 벌이던 YH무역노동조합과 면담하여 받아들이자, 여당의원들이 김영삼총재의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 중 박정희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내용을 문제 삼았다. 여당의원 159명이 국회에 징계동의안제출과 동시에 10여분 만에 기습처리하였다. 이 사건은 부산·마산민주항쟁을 증폭시켰다.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서 공안사건도 터졌다. 내무부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관련자 20명을 검거하고 54명을 수배 중임을 알렸다. 대간첩대책본부는 동부전선에서 무장간첩 1명을 사살하고 잔당 2명을 추적 중이라고 했다. 국방장관이 최근 북한군사력규모가 56만 명에서 72만 명으로 증강되었다고 피력하였다.

와중에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파리에서 돌연 실종되었다. 미국망명 후 1977년 프레이저청문회에 출석해 박정희정권비리를 거침없이 폭로하면서 정부와 척을 진터라 갖가지 설이 난무했다.


서수연선생과 못난이5형제는 시국과 무관하게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다가오는 2학기 중간고사준비로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중간고사가 끝나면 수학여행이 기다리고 있어 위안 삼았다.

시국도 서수연선생과 못난이5형제를 의식하지 않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부산대구내에 ‘민주선언문’이 살포된 다음날, 내무부장관이 수배 중인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관련자 46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혔다. 서울성수대교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은 국민들 귓등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었다.

부산대생 5천여 명이 김영삼총재의원직제명파동에 격분하여 유신철폐·독재타도·학원탄압중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불붙은 시위로 10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마산지역에서 마산대학교와 경남대학교 학생들을 선두로, 민주공화당사·파출소·방송국을 타격하는 등 치열해졌다. 10월 19일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근로자와 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해 시위가 더욱 결렬하였다. 마산시내는 치안부재상태가 되었다. 정부가 10월 20일 마산창원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강경진압했다. 계엄군이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과 학생들을 체포하였다. 부산에서 1,058명, 마산에서 505명을 연행했다. 이 중 87명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이른바 ‘부마항쟁’이 학생들의 군부독재타도와 유신철폐 시위를 전국적 규모의 민주화운동으로 확산시켰다. 18년간 지속해 온 박정희군부정권청산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의 종말을 앞 당겼다.


KBS당진송신소와 충남삽교천방조제가 준공되었다. 롯데리아가 서울소공동지하에 1호점을 내고, 호텔롯데가 소공동본사에 '롯데일번가'를 개점하였다. 이날 1979년 10월 26일 밤 7시 40분경, 서울종로구궁정동 중앙정보부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김재규가 연회 중에 대통령박정희를 향해 권총을 당겼다. 총알이 날아가 유신의 심장에 박혔다. 공교롭게도 70년 전 1909년 10월 26일은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가 조선초대통감으로 일본의 한반도강제병탄에 큰 역할을 했던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중국하얼빈에서 저격한 날이었다.

대다수 국민이 절실히 바라던 1972년 공포된 유신헌법에 의한 유신체제정권과 긴급조치가 종식되었으나, 대통령딸로서 영부인역할을 하던 박근혜에게는 참담한 일이었다. 5년 전인 1974년 8.15 광복절 장충동국립극장에서 문세광에게 모친 육영수여사 피살에 이은 두 번째 닥친 불행이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된 보안사령관전두환이 10월 28일 '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여 전말이 세상에 알려지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국무회의에서 11월 3일까지로 국장을 결정하였다. 김영삼신민당총재와 의원 30여 명이 박정희대통령빈소에 분향했다.

미국도 긴박하게 움직였다. 한반도정세안정을 위한 미항모키티호크 등 군함 11척이 제주남방 10km 해상에 도착하였다. 미국에서 급파된 조기경보 통제기 E3A기 2대가 24시간 한반도감시 탐지업무를 개시했다.

서울중앙청에서 거행된 영결식에 밴스미국무장관이 카터대통령특사자격으로 참석하였다.

국장을 마무리한 며칠 뒤, 전두환계엄사합동수사본부장이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서울궁정동안가에서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 현장검증이 이뤄졌다. 김재규 등 사건관련자 8명을 육군보통군법회의에 기소하였으나, 훗날 어떤 역사적 평가가 내려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제1보병사단장시절 제3땅굴 발견으로 언론에 잠깐 비췄던 전두환이 10.26 사건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숨겨진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대한민국역사에 큰 상처를 남길 대격변을 예고하였다.


국가적 큰 사건에도 국민들 일상은 계속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애도하는 현실에도 문승협과 이정훈은 2학기중간고사를 치렀다. 두터운 검은색 교복과 교모를 쓰고 여수로 2박 3일간 수학여행을 가야 했다.

문승협은 생애 첫 수학여행임에도 즐겁지 않았다. 모든 국민들이 그렇듯 국가수반인 대통령서거에 대한 애도로 착잡하기도 하였지만, 서수연선생이 건강악화로 병원에 입원하여 수학여행을 동행하지 못해서였다. 하물며 가방을 싸놓고 밤새 잠 못 이뤘다는 설렘조차 없었다.

양명기선생이 임시담임을 맡아 출발했다. 왠지 지루할 것만 같은 여수행 완행열차를 탔다.

검은색교복에 까까머리친구들이 틀어 논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춤췄다. 문승협은 흥이 나지 않아 그냥 앉아있었다. 춤추고 놀자는 이정훈의 부추김, 함께 게임하자는 못난이형제들의 꾐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기묘한 우울감에 차창 밖만 바라볼 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였다.

여수에 도착하여 오동도와 남해대교 등 관광지를 쫓아다녔다. 친구들과 사진 찍기, 싱싱한 해산물 먹기, 지역특산품과 관광상품을 구경했다. 저녁시간이 가까워져 유스호스텔에 투숙하였다. 못난이형제들이 주도하여 잠자는 아이들 얼굴에 그림 그리기, 머리에 껌 붙이기 장난을 했다. 문승협은 일찍 잠든 죄로 다음날 거울에 비친 만신창이 된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비누로 잘 지워지지 않아 짜증 났다.

평상시 못해본 탈선을 수학여행 중에 해보자고 부추기는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망설이다 꼬임에 넘어가서 담배를 피워보거나, 술을 사 와 먹는 아이들이 있었다. 술 취해 자는 몇 명을 복도에 내놓는 장난을 하다 선생들에게 걸려 혼나는 일도 있었다. 문승협은 남다른 준법정신과 도덕심에 술담배를 모두 거절하는 용기를 선택하였다.

그렇게 첫 수학여행을 다녀온 문승협은 친구들과 많은 추억을 남기지 못한 데다 온전히 즐기지 못해 아쉬웠다. 가정형편상 못 간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수학여행은 일제강점기에 학생들을 세뇌시킬 수단으로 시작됐다. 해방 이후는 학교 밖 사회에 대한 경험과 관찰 차원에서 교육목적으로 시행했다. 결코 근대화의 바람직한 요인을 담지 않은 행사였다.

일본제국은 수학여행을 통해 학생들을 집체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집단적인 야외여행으로 조직적 행동을 습득시키려는 의도였다. 학생들은 그저 대규모 여행과정에서 통제의 대상이었다.


문승협은 서수연선생에게 줄 수학여행선물을 사 왔다. 머리가 스프링에 연결되어 끄덕이는 한 쌍의 왕과 왕비 목각인형이었다. 등교하자마자 교무실에들러 서수연선생책상에 가져다 놓았다.

이틀 뒤 서수연선생이 출근하였다. 점심시간에 병원에서 퇴원한 기념으로 빵을 사겠다며 못난이5형제를 인혜여중고매점으로 데려갔다. 여섯 명이 서로 경쟁하며 빵을 먹는 틈에 홍지아가 들어왔다. 당연하듯 문승협 옆에 앉으면서 장난스럽게 인사했다.

“선생님, 안녕하셨죠? 도련님들도 잘 계셨어요?”

“음마, 으째서 우리가 아주버님에서 도련님으로 낮아졌으까잉, 제수씨의 설명이 필요한디?”

“호호, 전에는 우리 서방님 키가 작았는데, 지금은 우리 서방님이 제일 커서요.”

“어허, 언제부터 위아래 항렬이 키로 바뀌었단가? 인자 삼강오륜이 물구나무서부렀네.”

“내가 오늘 만든 지아오륜으로 그렇게 바뀌었네요, 이해해 주세요, 호호호.”

“호호, 지아야, 너 말투가 좀 생소한데?”

“저희 어머니께서 사투리 좀 그만 쓰라고 닦달하셔서 고치는 중이랍니다, 호호호.”

“그래, 홍지아만의 투박함이 없어서 그렇지, 훨씬 숙녀스럽다.”

“칭찬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런데, 정작 우리 서방님은 별말씀이 없으시네?”

“하하, 오랜만이다 지아야.”

“오랜만이네요 승협씨. 호호, 엎드려 절 받기네요.”

“우리 여기 있는 거 알고 왔어?”

“응, 이거 받아.”

“이게 뭐야?”

“수학여행선물.”

“나한테?”

“응. 그리고 이건, 네가 나한테 주는 수학여행선물.”

“나 선물 사 온 적 없는데?”

“그럴 줄 알고, 내가 알아서 갖고 싶은 걸로 사 왔어.”

“그럼 내가 미안하잖아.”

“괜찮아. 이건 집에 가서 네 책상에 놓고, 이건 지금 나한테 선물로 주면 돼.”

홍지아가 수학여행 중에 쌍으로 이뤄진 예쁜 남녀아기천사 도자기인형을 발견하고 두벌을 사 왔다. 한벌은 문승협에게 선물하고, 남은 한벌은 문승협에게 선물로 받고 싶었다. 똑같은 인형을 서로의 책상에 놓고, 감상과 상상을 통해 문승협과 교감하면서 동질감을 만들고 싶었다. 비록 자기가 사 왔으나 문승협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의식을 치르려고 하였다.

문승협이 어리둥절해 선물을 건네주었다. 홍지아가 기쁘게 받아 들고 인사한 후 먼저 갔다.

못난이형제들은 부러웠다. 서수연선생이 언짢은 표정으로 홍지아 뒤통수를 향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홍지아가 진짜 승협이를 좋아하나 보다? 좋아하는 친구정도로 알았는데, 그 이상으로 생각하나 봐?”

“선상님, 좋아하는 친구 이상이 뭐다요?”

“그 그건, 문승협이 알겠지?”

“제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친구 이상은 뭔데요?”

“어? 쟤 승협이 친구 아니니?”

서수연선생이 훅 끌어 오른 질투심에 한마디 했다가 질문을 되받고 당황하였다. 마침 매점에 들어오는 제갈민주를 보고 화제를 돌렸다. 문승협이 일어나 제갈민주에게 갔다. 서수연선생과 못난이형제들은 교실로 갔다.

“민주야.”

“어? 오랜만이다잉.”

“그래, 잘 지냈어?”

“잉, 너도 잘 지냈냐?”

“응.”

“연락받았제? 18일에 동창회 한다는 거.”

“응.”

“선경이 죽은 날, 아니 생일이 19일인디. 염병, 하필 태어난 날 죽어갖고 말하기도 껄적지근하네. 암튼, 그날이 월요일이라 하루 땡겨서 일요일에 하기로 했다드라.”


동창회에 참석한 인원이 작년보다 줄었다.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은 대부분 참석했다. 다들 예년에 비해 몸과 마음이 성숙해졌다. 제갈민주와 박진숙 주도로 간단하게나마 최선경을 추모하였다. 김철종과 제갈민주는 여전히 옥신각신하여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차여선과 이정주가 다투어 서로 본체만체 냉랭했다. 친구들은 둘 사이에서 눈치 보느라 바빴다. 각자 사춘기 고민거리가 다양하였다.

신체변화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남녀가 나뉘었지만, 이성과 공부 문제가 화두로 나올 때는 모두 참여했다. 서로 다양한 고민과 해법을 토로하였다. 공통점은 평상시에 고민거리를 털어 놀 사람이 없다거나, 가족과 대화가 부쩍 줄어들었다는 푸념이었다. 중학교2학년 삶에 낙이 없다는 일상자체에 대한 비관이 주를 이뤘다.

동창회가 끝난 뒤, 문승협은 최선경집 앞으로 갔다. 지금은 홍지아의 먼 친척이 산다지만 예전 그대로였다. 최선경과 있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추도했다. 허전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뜬금없이 보이스카우트여름캠핑 때 갑사로 가는 버스에서 마주쳤던 지선이라는 아이가 떠올랐다. 생전 처음 봤고, 그것도 잠깐 스쳐갔음에도 머릿속에 남아있어 소름 돋았다. 더욱이 최선경얼굴과 오버랩되어 나타나 죄스러웠다. 고개를 가로저을수록 또렷이 기억났다. 최선경얼굴이 뇌리에서 지워질까 봐 두려웠다. 문득 최선경을 생각하는 자신의 감정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였다. 서수연선생이 얼마 전 매점에서 말했던, 그냥 좋아하는 친구 이상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남녀사이에 다양한 감정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하였다.


아침조회시간, 서수연선생이 미쳐 챙겨 오지 못한 중간고사성적표를 문승협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문승협이 교무실로 뛰어갔다. 급히 성적표를 챙기다 책상모서리에 살짝 부딪혔다. 수학여행선물로 서수연선생책상에 올려놓았던 목각인형 중 왕비인형이 고개를 끄떡거렸다. 마치 반겨주는 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전혀 미동 없는 왕인형에 심술이 발동하였다. 손가락으로 톡 쳤더니 넘어졌다. 왕인형 뒤쪽 도포끝자락에 쓰인 ‘문승협’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재빨리 왕비목각인형 뒤를 살폈다. 아무 글씨가 없는 왕비인형 뒤쪽 도포끝자락에 ‘서수연’이라고 썼다. 왕과 왕비로 서수연선생과 커플이 되었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교실로 가면서 아기천사도자기인형에 의미를 둔 홍지아마음을 알 것 같았다.

문승협이 유난히 환한 웃음으로 성적표를 가져다 주자, 서수연선생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였다.

이정훈이 중간고사성적표를 받아 들고 기뻐했다. 인생 최대목표라는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이정훈은 얽혀있던 가정사가 풀리면서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 그룹스터디와 공부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중간고사를 치른 결과 반에서 8등을 하였다. 이정훈의 부모는 강요가 아닌 아들 스스로노력에 얻어진 결과라며 눈물로 기뻐했다. 성취감을 느낀 이정훈이 자신감에 찼으나, 이정훈의 누나는 핀잔을 줬다. 난리법석을 떨길래 전교 8등인 줄 알았다고 면박하였지만 더 분발하라는 뜻이었다. 남매간의 정이 담긴 격려와 칭찬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할 뿐, 현실남매에게는 험악한 구박만 난무했다.


이정훈이 서수연선생을 찾아갔다. 좋은 성적을 받게 힘써주고 관심 가져줘 감사하다며 인사하였다. 교무실에서 나오다 서수연선생과 고순영선생이 나누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이정훈은 곧장 교실로 달려가 서수연선생의 특급비밀을 알았다며 호들갑 떨었다. 문승협과 안광호는 처음엔 무시했으나, 거만 떨며 의기양양한 태도에 궁금해졌다. 이정훈이 둘을 상대로 거래를 시도하였다. 야채크로켓 두 개와 우유로 합의했다.

“느그 놀라지 마라잉, 아마도 담임이 지난주에 선본 거 같어.”

“뭐여, 으째서 말이 같어로 끝난대? 비밀이믄 추측이 아니라 확신 이어야제, 진짜 맞어?”

“잉, 쫌 전에 교무실서 나오다가, 고순영선상님이 우리 담임한테 물어본 거를 들었단께.”

“확실해? 고순영선생님이 선본 건 아니고?”

“음마? 그렇게 되물은께 갑자기 헷갈린다야.”

“염병, 니가 그라믄 그라제, 너는 말만 많제 실속이 없어 실속이.”

“우자지든간에, 두 선상님 중에 한 분은 선본 것이 확실하잖애.”

“시끄러, 합의파기다잉.”

“오메 아까운 거, 야채고로케하고 우유는 날아가부렀네.”

이정훈이 말한 비밀을 듣고 무덤덤한 안광호에 비해 문승협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서수연선생이 아닌 고순영 선생이 선봤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소문은 날개가 달렸는지 금세 퍼졌다. 문승협의 소망과 다르게 선 본 사람은 서수연선생이었다. 문승협은 실연당한 사람처럼 망연자실했다. 선 본 사실을 숨긴 서수연선생이 미웠다. 비틀어질 테다 하는 심정으로 서수연선생을 대하였다. 서수연선생 병문안 때 자신이 농담 삼아 선보라고 권유했던 사실은 까마득히 잊었다.

문승협은 서수연선생이 말한 친구이상의 감정과 서수연선생에게 느끼는 감정을 알고 싶었지만, 이를 계기로 그런 감정 따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에게는 사치라고 치부하며 마음을 굳게 닫았다.

서수연선생이 걱정스레 영문을 물어도, 문승협은 대꾸자체를 회피했다.

서수연선생에게 사주를 받은 못난이형제들이 교대로 문승협에게 접근하였다. 무엇 때문인지 알아보려고 무던히 애썼으나 원하는 답을 얻는 데 실패했다. 다 모여서 물어봐도 문승협은 묵묵부답이었다. 친구들 일에는 물심양면으로 간섭하면서, 자기 일은 입도 뻥긋 안 하는 나쁜 놈이라는 비난도 문승협에게 통하지 않았다.

서수연선생은 갑작스러운 문승협의 태도변화에 당황하였다. 나름대로 원인을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못난이형제들조차도 모르기에 전혀 감을 잡지 못하였다. 별수 없이 곧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지켜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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