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7)
문승협은 며칠 숙고 끝에 담임선생일직날 면담을 청했다. 부정맥에 재생불량성빈혈과 저혈압진단을 이실직고하였다. 담임선생이 직접 공군사관학교에 병력을 말하며 문의했다. 체력검정에서 탈락될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몹시 안타까워하며 문승협을 위로하였다.
“학교입장도 무자게 아쉬운 일인디, 어쩔 수 없는 상황인께, 공사 2차 시험은 포기하는 것이 맞겄다.”
“네, 현실이 그러니 할 수 없죠 뭐.”
“어허, 그런다고 너무 낙담 말고.”
“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어깨피고, 그깟 일로 기죽으믄 안 된다잉?”
문승협은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처럼 행세했다. 면담 전 이미 마음을 정하였으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마냥 홀가분했다. 무엇보다도 정난희가 군인은 안 된다고 한 말이 크게 작용하였다.
대검찰청이 명성그룹총수와 상업은행 혜화동지점대리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혐의로 구속했다. 국세청이 한 달간 명성그룹을 세무조사하여 112억 탈세로 고발한 지 15일 만이었다. 사상초유 속전속결 사법처리라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명성그룹시작은 호남비료출신 김철호가 1968년에 세운 택시운수업체 ‘금강운수’였다. 코로나택시 130여 대를 거느린 대형운수업체로 번창하자, 1976년 ‘명성관광’을 설립해 불모지였던 레저사업에 뛰어들었다. 자본기반이 미약한 명성관광은 빈번히 부도위험에 직면하였다. 김철호가 명성관광발행어음 연장결제문제로 상업은행혜화동지점대리를 자주 만나며 친분을 쌓았다. 상업은행대리가 이를 계기로 1,000여 명의 전주들에게 자금을 끌어모았다. 사채자금 1,066억 가운데 512억을 명성그룹에 투입했다. 554억은 사채업자선이자로 운용하였다. 수기통장을 이용한 변칙적 사채였다. 은행업무가 완전히 전산화되지 않았고, 된 경우도 정전을 대비한 수기통장병용관행에 가능했다. 명성그룹은 조달한 자금으로 65만 평 규모의 골프장 ‘명성컨트리클럽’을 개장하였다. 이후 ‘금강개발∙명성콘도미니엄∙남태평양레저타운’을 거느린 국내최초최대관광레저전문그룹으로 발전했다. 콘도미니엄사업개념을 정립한 한국레저산업선구자였다. 콘도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23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대형재벌로 성장하면서 ‘설악권 레저타운’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강원도일대에 콘도·호텔·골프장·수영장 등 온갖 종류의 레저시설을 갖춘 대형레저타운조성프로젝트였다.
명성그룹은 신군부집권 후 여러 번 세무조사를 받았다. 급성장배경이 불투명한 데다 신비에 가까워, 일반시민들도 명성그룹실체를 궁금해하였다. 통일교의 배후지원으로 성장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마침내 정권압박과 대중인식의 전환을 위해 김철호회장이 발 벗고 나섰다. 올해 1983년 7월 31일과 8월 1일 자 4대 일간지 1면에 성명서‘강호제현에게 고함’을 게재하였다. 외형적으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국민들께 사과지만, 실상은 정권과 국세청을 돌려 깠다. 김철호회장의 돌발행동은 명성그룹명줄단축을 자초했다. 국세청이 더욱 강화된 세무조사를 단행하고 검찰에 고발한 배경이었다.
대검찰청이 명성그룹총수와 상업은행직원을 구금하고 또 한 번 움직였다. 설악컨트리클럽 골프장사업승인 관련 인사들이 쇠고랑을 찼다. 김철호회장에게 뇌물을 받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됐다. 공군참모총장출신 전 교통부장관과 대한주택공사부사장 등 전현직고위공무원 10여 명이었다.
잘 나가던 대기업이 금융비리로 하루아침에 무너져 온갖 풍문이 돌았다. 김철호회장이 전두환정권의 정치자금요구에 소극적이어서 명성그룹을 공중분해위기에 빠뜨렸다거나, 김철호회장과 친분이 두터운 이규동이 본인소유부동산을 고가에 매입해 달라 요청하였는데 거절했다는 설도 있었다. 이규동은 전두환대통령의 장인이라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담이야, 요즘 영기가 좀 이상하지 않냐?”
“긍께, 내가 봐도 예전하고 다른 거 같어.”
“분명 뭔가 달라졌어. 정확하진 않은데, 아마도 엄마 삼우제 다녀온 후로 그런 것 같아.”
“엄마가 돌아가셔서 상실감 때문이까?”
“글세 그럴지도 모르지, 삼우제 지내고도 10일이나 지났는데, 아직 마음을 못 잡네.”
“인자 대입학력고사도 얼마 안 남았는디 큰일이다야, 설마 방황하는 것은 아니겄제?”
문승협과 이담이 천영기를 걱정하였다. 천영기가 부쩍 말수가 줄어들고 감정기복이 심해 자주 화냈다.
“그나저나, 니 모레 사관학교 2차 시험은 으짤래?”
“그냥 안 보기로 했어.”
“으째서야?”
“많이 고민했는데, 군인은 내 적성이 아닌 거 같아.”
“연설하네, 고생고생해서 시험 볼 때는 언제고.”
문승협은 건강검진결과등 구구절절 친구들에게 설명하기 구차했다. 공군사관학교시험자체를 집에다 숨겼는데, 혹여라도 친구들로 인해 알게 될까 우려하였다. 집에 말해봐야 관심도 없겠으나, 친인척들의 무책임한 말에 상처받는 게 싫었다. 어차피 2차 시험을 본들 체력검정에서 떨어질 것이라 비밀로 부쳤다.
사관학교 1차 합격 친구들이 1박 2일간 진행될 2차 시험을 치르러 출발했다. 장홍기는 애당초 1차만 응시하기로 학교와 협의돼 불참하였다. 문승협은 시험 보러 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한시름 놓았다. 만약 자신도 갔다면 3일간 집을 떠나야 하는데, 부모에게 뭐라 거짓말했을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관학교 2차 시험날 새벽 3시 25분 무렵, 뉴욕발 서울행 대한항공 KAL007편 B747기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사할린부근소련영공서 소련전투기 R-98 공대공미사일에 기체후방부가 피격됐다. 탑승자 269명 전원이 숨진 대참사였다. 정부는 즉각 ‘대한항공피격추락사건 실무위원회’를 구성하고,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긴급소집을 요청하였다. 성명을 통해 소련의 비인도적 잔악행위를 강력항의하며, 사과와 피해보상∙책임자처벌∙재발방지보장을 요구했다. 전투기가 초대형 비무장 민항기를 요격한 초유의 사건이 발생하자, 전 세계가 경악하였다. 설사 타국항공기가 영공을 침범하더라도, 민간항공기에 무력을 사용할 수 없는 국제관례를 무시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계속된 항공기 귀순과 납치 사건으로 또다시 공포에 빠졌다.
다음날, 레이건미국대통령이 야만행위라고 비난했다. 오후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개최되어 관련자처벌등 5개 항을 결의하였다. KAL기 피격사건은 국제관계를 급속히 긴장시켰다. 당장 미국이 전략물자금수와 문화교류단절 등 대소련제재조치를 발표했다. 영국∙프랑스∙캐나다 등 우방국가들도 소련을 규탄하며 강력한 응징에 뜻을 모았다. 중국까지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이라며 비난하였다. 세계 80여 개 국가가 공식동참하고, 민간단체대응도 잇따랐다. 국제조종사협회연맹이 60일간 모스크바취항중단을 결의하자, 각국조종사협회도 지지했다. 많은 나라들이 소련여객기서방취항과 서방여객기소련취항을 규제하였다. 운송협정폐기와 전략물자금수조치도 이어졌다.
사건발생당일 대한항공 KAL007편에 269명이 탑승했다. 한국인 81명, 미국인 55명, 일본인 28명, 중국인 36명, 필리핀인 16명, 캐나다인 10명, 타이인 6명, 오스트레일리아인 4명, 스웨덴∙말레이시아∙인도인 각 1명, 베트남난민 1명, 승무원 29명. 서울기준 8월 31일 오후 1시 5분 뉴욕을 출발하였다. 오후 8시 30분 경유지 앵커리지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예정보다 지연돼 오후 10시 다시 이륙하였다. 오후 10시 2분에 이정표베젤로 향하려고 방위 245도 선회했다. 25분 뒤 카이룽산전파국 부근을 지나 레이더권외로 빠져나갔다. 정해진 J501항로에서 북쪽 11km를 이탈해도 항공관제사경고는 없었다. 오후 10시 49분 앵커리지관제관이 베젤통과를 알렸지만, KAL기는 실제 이정표베젤 위치보다 22km 북쪽이었다. 미국공군레이더기지 KingSalmon권역이 민간항공기관제권이 없기에 역시 경고는 없었다. 이후 가장북쪽 북태평양항로 R20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9월 1일 0시 5분 소련영토 캄차카반도 북동쪽상공에 진입하였다. 소련방공군편대가 KAL기를 미국군용기로 판단하나, 체공시간이 길지 않아 요격시도 없이 귀환했다. KAL기는 오전 2시 28분 소련영공을 통과하여 소련레이더에서 없어졌으나, 오전 2시 36분 오호츠크해를 지나 재차 소련영토사할린상공에 근접하였다. 소련방공군이 경계태세에 돌입했다. 오전 3시 5분, KAL기가 뒤따라오는 로스에인절레스발 대한항공 KAL015편과 교신하면서 서로 바람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비행계획서상 오차범위 내로 판단해 항로이탈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오전 3시 8분, 사할린소련방공군소속 ‘오시포비치’를 태우고 발진한 전투기가 KAL기에 접근했다. 어두운 새벽이라 기종식별이 불가능하였다.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의 점멸을 보고했다. 같은 시각 KAL기는 도쿄관제소와 교신하였다.
“KAL : Korean Air 007 climb and maintain FL350 leaving FL330 at this time.”
“Tokyo Control : Roger.”
도쿄관제소가 3만 5천 ft로 고도를 올려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확인해 줬다. 교신을 마친 KAL기가 움직였다. 오시포비치는 급작스런 고도상승을 회피기동이라 여겨 곧장 경고사격을 했다. 야간인 데다 공교롭게 전투기탄띠에 예광탄이 없어서 KAL기 측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오시포비치는 KAL기를 ‘오버슛’하자, 빙 돌아 KAL기 8km 뒤편으로 날아가 요격태세를 갖췄다.
전투기는 갑자기 고도를 높이거나 속도를 줄이는 것을 공격으로 간주한다. 대다수 무장이 전면을 향하여 뒷전투기가 항상 유리하다. 앞 기체가 속도를 빠르게 줄이면 오버슛 하여 앞지르게 된다. 역으로 뒤를 잡힌 조종사입장에선 따돌리려는 포스트스톨기동이라고 인식한다. 더군다나 전투기는 중고속기동설계라 느린 민항기속도에 맞춰 날기 어렵다. 전투기조종사에게 실속을 유도한 지능적 행위로 비친다.
마침내 소련전투기가 R-98 공대공미사일 두 발을 발사하였다. 한 발은 비껴갔지만, 나머지 한 발이 KAL기후방에서 폭발했다. 기체후부에 구멍이 뚫리며 급격한 감압이 일어났다. 최소 1개 이상 유압장치가 파괴되고 3만 8천 ft까지 급상승하였다. 조종사들이 불안정한 기체를 제어하기 위해 랜딩기어를 내리려 시도했으나, 자동조종은 물론 정상적인 수동조종조차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비상강하를 시작하였고, 약 11분간 활공하다 레이더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오시포비치는 모네론섬 근처를 나선선회하며 추락한 KAL기를 확인하고 기지로 복귀했다. KAL기가 급강하한 데다, 바다수면은 땅에 비해 충격을 반사하므로 생존확률이 거의 없었다. 한편 도쿄관제소가 KAL015편과 교신이 되지 않자 다급히 찾았다. 사할린소련민간항공관제소에 연락해 봐도 헛수고였다. KAL기를 마지막으로 보고한 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9월 1일 아침, KAL기의 사할린강제착륙소문이 퍼졌다. 11시 55분 뉴스에 전국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소련미사일공격을 받아 행방이 묘연하다며, 1978년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과 유사하다고 보도하였다. 한국정부는 소련과 외교관계가 없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사건발생지역이 소련영공이면서도 미국과 일본의 비행정보구역인 것은 다행이었다. 우방국들에게 전달받은 정보를 토대로 격추됐다고 결론 내렸다. 문공부장관이 ‘대한항공기가 제3국에 요격당한 것이 확실시된다’며 성명을 발표했다. 슐츠미국무장관이 특별기자회견을 열어 소련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기피격을 확인해 줬다. 이어진 전두환대통령의 특별담화방송 하단자막에 온 국민눈길이 쏠렸다.
‘대한항공 KAL007편 B747기가 소련 SU-15TM전투기에 격추당하여 추락. 뉴욕 존F케네디국제공항출발~알래스카 앵커리지국제공항경유~김포국제공항으로 비행 중 사할린모네론섬부근 상공에서 피격. 한국국적기사고사상 최악최대규모.’
전문가들이 앞다퉈 경위를 유추하였다. 추락직전까지 승객들이 살아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자, 침통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국민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련은 모네론섬인근을 수색하였다. 미공군대형정찰기 RC-135로 예상하고 영공침범증거잔해들을 인양하러 갔지만, 자신들이 격추한 것이 민간항공기였음을 알았다. KAL기파편∙블랙박스∙유류품을 수거하여 은폐할 생각으로 극비에 부쳤으나, 미국과 일본이 정보를 공개하였다. 소련이 마지못해 시인하자, 미국이 일본과 공조하여 공해상에서 구조수색을 시도했다. 해군∙해안경비대∙해상자위대∙민간트롤어선까지 동원하지만, 유력추락지점 모네론섬근해에 들어갈 수 없었다. 소련의 해군과 해안경비대가 소련영해로 진입하려는 미일구조대를 막았다. 추락직후시점에 일본 오징어잡이어선‘58치시마호’가 폭발을 목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고현장과 인접한 일본홋카이도부근서 유류품과 13여 명의 시신일부를 찾았다.
소련이 KAL기블랙박스존재를 부인하였다. 왜 한국민간여객기를 격추했는지 공식입장표명도 없었다. 항로이탈의문점이 미궁에 빠졌다.
KAL기기장은 대한민국공군 조종간부후보생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하였다. 소위로 임관해 곡예비행단‘블루세이버’ 팀원이 됐다. 공군예편 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대통령전용기기장을 한 초엘리트조종사였다. 대한민국 최고조종사가 수없이 다닌 항로를 이탈했다는 건 미스터리였다.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많을수록 유가족들 마음은 숯덩이처럼 타 들어갔다.
레이건미국대통령이 군사용 GPS의 민간제공을 전격 공표하였다. 서방국가에서 민항기항법용 INS 대신 GPS를 표준으로 사용할 길이 열렸다. 각항공전자장비제조사들이 비행 중에도 실시간 항로를 작성∙수정할 수 있는 FMC를 개발∙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엉뚱하게 레이건대통령에게 정치적 행운으로 작용됐다. 자신의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국가안보위기를 강조한 바 있었고, 현실이 된 것으로 보였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한 전 세계에 대한 공격이라며, ‘소련의 야만적 대량학살’로 규정하였다. 조지슐츠미국무장관 등 레이건각료들도 퍼싱미사일 MGM-31 유럽배치의 국내외반대여론을 누르는데 활용했다. 과거나 현재나 정치는 늘 그랬다. 아니 정치가들이 늘 그랬다. 모든 상황을 정치선전에 이용하고 자기 이익으로 돌렸다.
미국은 소련의 KAL기격추를 알면서도 처음엔 침묵하였다. 소련군감청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으나, 계속 부인하자 감청녹음을 공개했다. 미국증거제시로 국제사회가 들끓어도 소련은 변명뿐이었다. 사건진상을 밝히는데 일본역할이 컸다. 홋카이도항공자위대 왓카나이감청기지에서 소련전투기와 지상관제사 간 대화자료를 UN에 제시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한동안 소련군정보수집에 어려움을 예상하면서도 고육지책이었다. 소련은 군사통신망주파수를 모조리 바꿔야 했다.
크림반도에서 요양 중이던 소련의 안드로포프는 사건실상을 보고받았다. KGB∙국방부∙외무부가 서방과 동유럽조차 대한항공기격추항의시위를 벌인다며 심상찮다고 하였다. 안드로포프는 체르넨코에게 각국제재대처방안을 준비하라며, 절대 양보 말고 현재태도유지를 지시했다. 체르넨코가 긴급 소집한 정치국회의에서, 미국반발은 대소련 적대시정책이라고 폄하하였다. 소련공산당정치국원들 모두 철두철미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답게 정당한 격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떤 유감이나 애도도 없이 어떻게 정당화할지만 논의했다. 고르바초프농업서기마저 공세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동조하였다. 심지어 오르가코프원수는 미국의 계획된 도발행위로 의심했다. 소련정치국결의에 따라 소련언론이 일제히 정신승리성 보도를 개시하였다. 9월 7일에서야 소련정부가 특별성명을 통해 첩보임무를 수행하던 비행기를 요격했다고 밝혔다.
사실 KAL기의 우연한 기동과 소련전투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불운이 겹쳤다기엔 설득력이 떨어졌다. 오히려 오시포비치가 KAL기꼬리에 민항기마크를 식별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KAL기기동으로 보아 위장용이라 여겼을 수는 있었다. 당시 보잉 707을 개조한 미공군전자정찰기 RC-135가 소련영공을 침범하다 말다 하면서 약 올리는 비행을 반복했었다. 소련방공군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잔뜩 벼르던 상황도 일조하였다. 오시포비치가 전투기특성을 꿴 미국군용기라 판단하고, 도주로 인식해 격추시켰다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더욱이 극동지방 소련방공망대응이 신속하지 못했다. 오시포비치가 KAL기와 조우한 지점이 소련군기지 주변을 지나 공해로 빠져나가는 시점이어서, 요격하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조급한 시간문제도 있었다.
5년 전 발생한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과 너무 유사하여 음모론이 힘을 얻었다. 냉전시대에 적국영공서 벌어진 일이라 당연하였다. 1978년 대한항공 902편 격추사건과 연결시킨 고의정찰설과 미국방조설이 주요 음모론이었다. 대한항공이 미국비밀작전에 동원되고, 소련이 낚였다는 것이다. 로렌스맥도널드미국하원의원이 탑승한 것도 음모론을 자극했다. 올해 1983년은 6.25 전쟁 휴전 30주년이자,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3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미국의원대표단의 한국방문이 예정되었다. 다행히 대표단은 10분 뒤 출발하는 다음 편 항공기에 탑승한 덕에 비극을 피하였다. 소설 같은 음모론도 미국에 퍼졌다. KAL기가 추락한 것이 아니라 캄차카에 착륙하여 탑승객전원이 살았으며, 맥도널드의원은 루뱐카에, 나머지승객들은 시베리아에 위치한 굴라크에 수용됐다는 주장이었다. 해상에서 발견된 파편은 소련이 비슷한 기체를 고의폭파시켰고, 블랙박스는 임의처리했다는 허망한 논지였다.
안타까운 사고희생자들 사연이 전해졌다. 아픈 동료 대신 탑승한 승무원. 병상의 노모소원에 따라 사직하려 마지막 비행길에 오른 승무원. 나란히 박사학위를 받고 시어머니생신잔치참석차 4년 만에 귀국하는 부부. 멕시코대사관임기가 끝난 남편을 1주일 전 먼저 보내고, 짐정리가 늦어져 뒤늦게 한국으로 가던 가족.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급히 귀국길에 오른 형제. 딸산후조리를 하러 갔다가 편찮다는 시어머니소식에 비행기를 탄 어머니. 한 달 전 한국에 배치된 미군남편을 찾아가던 가족. 대부분 가족단위승객들이었다.
대한항공은 KAL007편을 KE025/026편으로 변경하였다. KAL기격추사건을 둘러싸고 많은 의문점이 제기됐다. ‘KAL기는 왜 3백 마일가량 항로를 이탈했나. 조종사들 실수라면 어떤 경위일까. 소련은 왜 캄차카반도에서 요격하지 않고 사할린을 지날 때까지 그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가. 소련은 왜 CIA첩보작전으로 믿는가. RC-135 미국첩보기는 왜 비슷한 경로로 정찰하였나. 코브라볼비밀작전의 정체는? 미국정보기관들의 의회 내 비밀보고회의내용은? 레이건대통령과 슐츠국무장관이 자료조사 완결 전부터 신랄하게 대소공격을 서두른 이유는? 국제민간항공기구 조사보고서의 골자는? 자동항로추정기란 어떤 컴퓨터인가.’
9월 7일 서울운동장서 거행한 대한항공기피격희생자 269명 합동위령제에 10만 인파가 운집했다. 대통령을 포함해 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 등 각부처장관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KAL기부기장의 장녀가 희생자유가족대표로 연단에 서서 고별사를 낭독하였다. ‘우리 아버지를 살려내라’. 한마음 한 뜻으로 애도하던 국민들이 눈물을 쏟으며 소련을 향하여 분개했다. 합동위령제는 전국에 생중계되고 언론톱으로 다뤄졌다. 주요 외신들이 앞다퉈 취재할 만큼 뜨거운 관심사였다.
“아야, 우리도 서울로 가야 하는 거 아니어?”
“가서 뭐 할라고야?”
“서울운동장에 가서 소련의 만행을 규탄해야제.”
“규탄 갖고 되겄냐, 차라리 니가 언능 군대를 가라.”
“군대 가서 뭐 하게?”
“군바리 돼갖고, 총 들고 소련 모스크바로 쳐들어가.”
“허허, 염병하고 자빠졌네. 어느 세월에 모스크바까지 가냐, 가다가 낙오하겄다.”
“운대야, 니가 빨리 해사 졸업해서 군함 몰고 가라, 가서 대포 한방으로 조져 부러.”
“해군도 마찬가지어, 공군이믄 몰라도.”
“승협이가 공군조종사됐어야 했는디, 쪼깨 아깝다잉.”
“옆반 이민상있잖애, 민상이가 공사에 합격했다드만.”
“민상이는 어뜨크롬될란지 모른다던디?”
“으째서야, 2차 시험 봤잖애?”
“거시기 신원조회인가 뭔가, 아무튼 둘째 누나 땜시 무슨 문제가 있나 보드라?”
“민상이 둘째 누나믄, 광주서 대학 다니잖애?”
“전남대 앞서 민주화운동대모하다가 경찰서에 잡혀갔었다던디, 고것이 문제까?”
“뭐야, 연좌제 폐지됐잖애?”
“무식한 시끼, 그 놈들이 폐지됐다고 언제 안 하디?”
사관학교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원조회를 거쳤다. 신원조회동의와 상관없이 친인척은 물론 사돈네팔촌까지 무차별적으로 사찰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응시생 친인척들 이력뿐 아니라 사상까지 검증하여 연좌제를 적용했다. 조금이라도 의심되거나 흠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
“조운대, 너는 뭐 문제없냐?”
“나는 뭐 특별한 거 없어.”
“친인척 말고도 가까운 친구들까지 확인한다던디?”
“그라믄 느그가 문젠디 으짜쓰까?”
“왐마, 그라믄 우리 땜시 니 떨어지겄다잉.”
조운대와 장기원은 2차 시험을 다녀온 후, 신체검사와 체력검정은 당연하고 면접도 잘 봤다며 자신만만하였다. 이민상은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지냈다.
종전 은행신용카드협회가 ‘비씨카드’로 출범했다. 신용거래에 서민들 관심이 고조됐다. 마침내 고리원전 2호기가 준공되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성수~을지로입구 3단계 구간이 개통되고, 성수~신설동을 성수지선으로 분리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