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4)
이항리와 문윤아가 서울로 간 뒤, 문승협은 동생의 마음안정을 위해 전보다 더 애정을 갖고 보살폈다. 할머니심기도 건드리지 않으려 각별히 신경 썼다. 그러나 막상 닥친 엄마 없는 하늘은 있었을 때와 천지차이였다. 당장 점심도시락반찬부터 달라졌다.
“서울놈, 밥 묵자. 도시락 들고 퍼뜩 돌아 앉으세요.”
“하하, 서울말 쓴다고 고생한다.”
“킥킥, 으째 쫌 비슷하냐? 내 생각에는 완벽한 서울말씬디.”
“억양이 그래서 그렇지 비슷해, 조금 더 노력해 봐.”
“뭐 싸왔냐? 나는 오뎅하고, 이 지긋지긋한 쥐포 묻힌 것이다.”
“왜, 맛있던데 그래. 난 볶은 김치랑 멸치볶음이네.”
“우리 아범이 쥐포를 수출하는 회사에 다녀 갖고, 이 반찬은 평생 묵어야 할란갑써.”
“야, 나는 좋아하니까, 매일 싸와도 돼.”
“근디 말이어, 으째 좀 이상 안 하냐?”
“뭐가?”
“아그들이 같이 밥 묵자고 너도나도 모여들었었는디, 어저께부터 썰렁하잖애.”
점심시간이 되면 주변에 앉은 아이들이 도시락을 들고 왔었다. 어제부터 뒷자리 김철종 외에는 각자 먹거나 자기들끼리 따로 모여 먹었다.
“그러게, 서울놈에 대한 신비감이 떨어졌나 봐. 경험에 비하면 좀 빠르긴 하다, 하하.”
“염병, 그것이 웃을 일이냐? 너는 참 속도 좋다잉.”
“왜 또 그러시오 철종씨? 각자 편한 대로 먹으면 되지, 뭘 그런 것까지 신경 쓰셔?”
“아마도 말이어, 용남이가 가분수를 시켜갖고, 아그들한테 뭐라고 한 것이 틀림없어. 안 그래도 니가 눈엣가신디, 아그들이 너랑 친하믄 배 아플 것이고, 뻔하지 뭐. 쪼잔한 시끼.”
“근데 넌 왜 나랑 같이 먹어? 용남이가 안 무서워?”
“너 없을 적엔 무서웠는디, 너랑 같이 있은께 이상시럽게 겁이 없어지드라?”
“하하, 그래? 지금 나한테 고백하는 거야?”
“허허, 지랄하네. 그래, 고백이라고 하자, 킥킥.”
“근데 말이야, 박진숙이 며칠째 점심시간에 안 보여. 어쩔 때는 도시락을 들고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니가 뭔 걱정이냐? 어디 편한 데 가서 먹겄지 뭐.”
“어디 가서? 아직 밖에는 날씨도 쌀쌀한데.”
“아니믄, 다른 반 친구한테 가서 먹든가.”
“박진숙이 다른 반에 친한 아이가 있나?”
“그라고 본께 그런다잉. 냅두고 너나 신경 써, 용남이한테 당하지나 말고. 니 앞가림이나 잘하라고.”
김용남이 가병수와 강모세를 시켜 문승협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함과 동시에, 다른 아이들의 문승협과 접촉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김철종과 반장선거에서 문승협에게 투표하였던 11명도 마찬가지로 배척당했다. 문승협은 따돌림을 눈치채고 나름 무관심으로 대응하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박진숙이 자리로 돌아왔다.
“야 박진숙, 어디 갔다 왔냐? 밥은 묵었냐?”
“염병, 신경 꺼라잉.”
“아야, 묻지도 못하냐? 별 희한한 가시나 다 보겄네 참말로.”
“니가 언제부터 나한테 관심 있었다고 지랄이냐 지랄은.”
“뭣이어? 뭔 저런 가시나가 다 있대?”
박진숙이 김철종에게 면박을 주고 책상에 엎드렸다. 문승협이 흥분해서 일어나는 김철종을 말려 앉혔다. 엎드려있는 박진숙을 바라보았다.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종례시간에 담임선생이 다음 주 가정방문을 예고하며 몇 가지 사항을 당부하였다.
“내가 이짝저짝 다니믄 시간도 많이 걸리고 힘든께, 같은 동네에 사는 아그들로 조를 짜서 방문할 것이어. 그라고, 선상님이 방문할 시간에는 부모님이 꼭 집에 계시도록 말씀드려, 알겄냐?”
“선상님이 집에 언제 오신 지 어떻게 안디라우?”
“가정방문기간에는 오전수업만 하고 오후에 방문할 것인디, 각조 하고 방문예정시간은 바로 알려주께. 그라고, 같은 조는 방문순서에 따라서 자기 다음사람 집에 나를 안내할 수 있도록 미리 알아두고."
담임선생이 방문 일정과 조를 알려주었다. 문승협의 앞사람은 공교롭게 박진숙이었다. 다음 순서는 김용남의 지시를 받는 강모세였다.
문승협은 집에 가서 할머니에게 가정방문을 이야기하였다. 인상 쓰며 짜증 낸 할머니반응에 찜찜했다.
아침부터 동생숙제를 봐주느라 정신없었다. 문현아가 어젯밤에 숙제를 하다 잠들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나 못한 부분을 마무리하느라 등교시간이 빠듯했다. 걷듯 달리듯 겨우 지각 전에 교문에 들어섰다.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화창한 봄날씨였다. 동요가 교정에 울려 퍼졌다.
“현아야, 선생님이 오늘 가정방문 온다고 했지?”
“응.”
“그럼 4교시 끝나고, 오빠가 현아네 반으로 데리러 갈게,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냐, 교실 말고 교문 앞에 있을게. 교실에 혼자 남아서 기다리고 있으면 무섭단 말이야.”
“그래? 그럼 정문 옆에 있어, 오빠가 최대한 빨리 올게. 어디 다른데 가면 절대 안 된다, 알았지?”
“알았어, 혼자 기다릴 수 있으니까 천천히 와도 돼.”
문승협은 동생을 데려다주고 나서야 겨우 한숨 돌렸다. 교실로 가면서 어젯밤 할머니구박이 생각났다.
할머니에게 가정방문을 오니 두 시쯤 집에 계실 수 있겠냐며 여쭤봤었다. 미리 말하지 않았다고 역정내서 난감했다. 세 번이나 말했었다는 억울함 보다 엄마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져 마음 아프고 괴로웠다.
오전수업이 끝난 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을 동생을 데리러 강모세와 박진숙과 함께 갔다. 그런데 문현아가 보이지 않았다. 당황하여 강모세와 박진숙에게 잠깐 기다려달라고 한 후, 2학년교실과 화장실을 뛰어다니며 찾았다. 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갑자기 불길한 생각에 몹시 초조해졌다. 이틈에 문현아가 왔는데 오빠가 없으면 불안해할까 봐 다시 빨리 정문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없었다. 박진숙은 화단에 그냥 앉아 있었다. 강모세가 짜증 내며 빨리 가자고 화냈다. 문승협이 미안하다며 자초지종 설명했다. 다시 교문 밖으로 뛰어나가 학교 앞 문방구안을 기웃거렸다. 문승협을 본 어떤 아이가 문현아의 친구라며 인사하였다. 혹시 동생을 봤는지 물으니, 튀김 사러 갔다며 분식집을 알려줬다. 얼른 달려가 분식집문을 열었다. 문현아가 포장된 튀김봉지를 들고 계산하는 중이었다. 문승협은 순간 어이없으면서도 안심되었다. 동생을 찾으면 말 안 들은 대가로 때려주겠다고 별렀는데 깜짝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화가 덜 풀려 동생의 왼손을 거칠게 낚아채 분식집을 나왔다. 손목이 아프다며 투정하는 문현아를 데리고 서둘러 정문으로 갔다. 박진숙과 강모세를 만나 문현아에게 같은 반 친구라며 인사시켰다. 박진숙이 의외로 문현아를 반갑게 다정히 대해주었다. 문승협은 처음 보는 박진숙의 상냥함에 놀라면서 본래 심성은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강모세가 오래 기다리게 했다며 혼잣말로 욕을 하였다. 문현아의 인사마저 본체만체했다. 이는 김용남을 믿고서 문승협을 무시하며 깔아뭉개려는 의도였다. 문승협은 동생 앞에서 도발한 강모세에게 불쾌했지만 차마 화낼 수 없어 째려보았다. 강모세가 움찔하더니 시선을 회피했다. 박진숙이 둘 사이 문제에 관심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문현아머리를 쓰다듬으며 예쁘다고 하였다. 박진숙의 화제전환에 문승협도 인상을 풀었다. 박진숙과 강모세에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다시 사과했다. 박진숙은 신경 안 쓴다는 표정인데 반해 강모세는 애써 외면하였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어색한 분위기에서 문승협집으로 향했다.
“현아야, 오빠가 어디 가지 말고 정문 옆에서 기다리라 했는데, 왜 다른 데 갔어?”
“처음에는 오빠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에 친구랑 맛있게 먹었던 튀김이 생각나서, 오빠랑 같이 먹으려고 사러 갔어. 미안해.”
“그랬구나. 그럴 땐 오빠 만나서 같이 가면 되잖아, 오빠는 너 잃어버린 줄 알고 엄청 걱정했어.”
“미안, 다음부턴 그렇게 할게. 화 풀어라 오빠, 응?”
“오빠 화난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아까는 너무 놀라서 그랬는데, 이젠 괜찮아.”
“오빠, 나 튀김 먹을래.”
문승협은 다른 때 같으면 집에 가서 먹자고 했을 텐데 동생기분도 달래줄 겸 먹게 하였다. 문현아가 미안한 마음에 봉지에서 튀김을 꺼내 박진숙과 강모세에게 하나씩 건넸다. 보통 튀김이라기보다는 당면이든 만두를 튀긴 것이었다. 문승협도 꺼내 먹었다. 강모세는 먹을 때만큼은 문승협에게 적대감이 없었다. 박진숙은 튀김만두를 보며 뭔가 생각하는듯하더니 잠시 들고 가다 입에 넣었다. 잠시 후 문승협집 앞에 도착했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너희들 잠깐 들어갈래?”
“뭣 땀시야? 아따, 너는 잘 산께 좋겄다.”
박진숙이 비꼬듯 한마디 하고 휙 가버렸다. 강모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계단을 올라가 대문 앞에서 폴짝폴짝 뛰며 집안을 살펴봤다. 그러다 문승협과 눈이 마주치자 머쓱해하며 자기 집으로 향했다. 문승협이 문현아에게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으나 혼자 있기 싫다며 따라가겠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동생과 함께 강모세집으로 갔다. 강모세는 뭐가 그리 뿔났는지 씩씩거리며 앞장서 빨리 걸었다. 문승협은 쫓아가기 힘들어하는 문현아에게 계단입구에 앉아 기다리라 하고 따라잡았다. 문승협집 옆 큰길을 지나가면 계단이 나왔고, 숨이 찰 정도로 한참 올라가서야 강모세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강모세가 문승협에게 아무 말도 없이 혼자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문승협은 멀뚱히 대문을 지켜보다 혼자 있을 동생 때문에 급히 계단을 내려왔다.
“공주님, 이번에는 어디 안 가고 그대로 계셨네요?”
“힝, 오빠, 나 놀릴 거야?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하하, 알았어, 안 그럴게. 현아야, 오빠가 요즘 들은 소문이 있거든. 완장 찬 아저씨들이 길 잃은 아이들하고 거리부랑자들을 막무가내로 트럭에 실어간대.”
"뭐 하는 아저씨들인데?"
"오빠도 자세히는 몰라, 경찰이나 경비처럼 옷을 입은 사람도 있고, 일반인이 완장찬 사람들도 있대."
“어디로 실어가?”
“수용시설에 집어넣고 때리면서 막노동시킨대, 죽은 사람도 있다더라.”
“정말? 에이 설마.”
“오빠가 언제 거짓말하는 거 봤어?”
“진짜야 그럼?”
“응, 진짜라니까. 그래서 아까 오빠가 엄청 놀라고 화났던 거야.”
“알았어, 다음부턴 오빠말 잘 들을게.”
“그래,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말고.”
“근데 오빠, 아까 그 언니한테 이상한 냄새나더라?”
“현아야, 오빠에겐 괜찮지만,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냐. 너한테서 냄새난다고 하면 기분 좋을까?”
“아니, 기분 나쁠 거 같아.”
“그래, 입장 바꿔 생각하면 그런 거야. 사실을 말하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이어서 더 불편하고 큰 상처가 될 수도 있거든.”
“알았어. 그래서 지금 말한 거야, 그 언니가 들으면 창피해하고 기분 나빠할까 봐.”
“그래. 어서 집에 가서 밥 먹자, 배고프다.”
문승협남매는 함께 점심을 차려먹고 담임선생의 가정방문을 기다렸다.
할머니 박옥춘이 다다미거실과 정원을 잇는 토방 유리문까지 활짝 열어놨다.
두 시가 되어 문현아의 담임이 왔다. 문승협남매는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박옥춘이 커피와 다과를 내놓았다. 담임선생이 질문하고 박옥춘이 답하기를 몇 차례였다. 이후에는 박옥춘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였다.
문승협남매가 방에서 나와 정원을 오가며 가정방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담임선생이 담소를 마무리하고 일어나자, 문승협남매가 다가갔다. 담임선생이 측은한 표정으로 문현아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대견하다는 듯 문승협 등을 토닥거린 후 다음 방문지로 갔다.
십분 쯤 지나 박진숙이 문승협의 담임 고삼랑선생을 모시고 왔다. 박옥춘이 마찬가지로 커피와 다과를 대접했다. 고삼랑선생과 박옥춘이 다다미거실에서 이야기 나눴다.
문승협은 토방에 앉아있는 박진숙에게 음료수와 과자를 건넸다. 슬쩍 밀어주면서 먹으라고 했으나 한번 쳐다볼 뿐 손대지 않았다. 문현아는 작은 연못 건너편에 엉거주춤 앉아 금붕어를 살펴보았다. 박진숙이 연못으로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그때 박옥춘이 고삼랑선생에게 문승협부모이야기를 하며 목청을 높였다. 박진숙이 흠칫 놀라 돌아보더니 다시 토방에 앉았다. 문승협은 담임에게 부모이야기를 하는 할머니를 말리고 싶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할머니입에서 결코 좋은 말만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가슴이 타 들어갔다. 조금 전 동생의 담임이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박옥춘이 원통해하고 한숨 쉬어가며 아들내외이야기를 하다 가정방문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말을 꺼냈다. 태선화학회장인 큰오빠 박동후와 정치인 작은오빠 박동일을 들먹였다. 이름만으로도 다 아는 지역유지인 집안자랑을 하느라 희색만면했다. 박진숙이 대화를 엿들으면서도 과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삼랑선생이 한참 흥미롭게 듣다 시계를 보았다. 다음 학생집을 방문해야 한다며 일어났다. 문승협이 넌지시 박진숙에게 과자를 가져가라고 하였다. 그래도 되냐는 듯 쳐다보는 박진숙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박진숙이 그제야 과자와 음료수를 챙겼다. 고삼랑선생도 문현아의 담임처럼 측은하면서도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문승협남매를 다독여주었다. 박옥춘이 고삼랑선생을 배웅하면서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많아 아쉬운 얼굴이었다. 문승협이 담임선생을 다음 가정방문지인 강모세집으로 안내하려고 따라나섰다.
“그란께, 승협이 할머니가 박동후회장하고 박동일의원 친동생이냐?”
“네.”
“와따, 승협이 진외가가 대단한 집안이다잉. 그라믄, 우리 문승협이가 기업회장님 하고 정치인 손주네?”
“…….”
“으째, 쑥스럽냐?”
“네, 조금요.”
“하하, 승협이 어깨가 무자게 무겁겄다. 학교생활하다 힘든 거 있으믄, 꼭 나한테 이야기해라잉?”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집이에요, 여기가 강모세집이에요.”
“잉 수고했다, 인자 가봐도 돼.”
“네, 내일 뵙겠습니다.”
문승협은 강모세집으로 들어가는 담임선생을 지켜보았다. 계단을 내려오니 박진숙이 앉아있었다.
“집에 안 갔네?”
“과자를 받았은께,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제.”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박진숙답지 않게.”
“뭣이어? 나다운 게 뭔디? 그냥 갈라다가 고마워서 기다렸드만.”
“아 아냐, 미안 미안, 내가 실언을 했다. 그냥 인사치레 안 해도 된다고.”
“그나저나, 너는 좋겄다 잘살아서.”
“내가 잘 사는 거 아냐, 우리 할머니지.”
“어쨌든 그것이 그 거제,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
“그럼, 너는 부모랑 같이 사니까 좋겠네?”
“니가 뭘 안다고 그냐, 부모도 부모 나름이어. 간다.”
가정방문 후 문승협에게 곤혹스러운 일이 생겼다. 강모세를 통해 반아이들에게 퍼진 좋은 집에 잘 사는 부잣집이라는 말은 대수가 아니었다. 부모와 떨어져 사는 가정사와 재벌가 손자라는 소문이 일부 선생들 사이에 오르내려 충격이었다. 어떤 선생은 문승협을 측은해하였다. 어떤 선생은 엄청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었다. 문승협은 편견의 시선과 행동들이 몹시 불편했다. 가정방문이 생기게 된 이유와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 의아했다.
김용남의 사주로 반장선거에서 문승협을 찍은 아이들에 대한 감시와 괴롭힘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아이들이 견디다 못해 잘못을 빌거나 문승협을 멀리하면서 해제되었으나, 문승협과 김철종에게는 계속되었다.
문승협과 김철종이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서 소변을 봤다. 화장실 옆쪽에서 때리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째 사람을 패냐 패긴, 내가 뭔 잘못했는디?”
“어허, 똑바로 서라잉. 이 상노무 시끼가 디저불라고, 어따 대고 까부냐 까불긴.”
“청소구역을 정해줬으믄 청소를 해야제, 니가 안 한께 그런 거 아니어.”
“니가 뭔디? 니가 뭣인디 나한테 이러쿵저러쿵 하냐고, 이 가분수새끼야.”
“내가 미화부장이잖애, 청소구역 정하고 확인하는.”
“허, 이 새끼가 김용남이 빽 믿고 진짜, 확 디진다잉.”
강덕구가 청소문제로 가병수를 화장실 뒤로 불러 때리고 있었다. 가병수가 나름 대항했으나 강덕구의 상대가 되진 못했다.
문승협이 김철종에게 가보자며 고개를 까딱여 신호를 보냈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자는 김철종말에도 낯익은 목소리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야 강덕구,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왜 병수를 때리고 그래?”
“오메오메, 서울서 오신 문승협씨 아니신개라우? 아따, 우리 귀하신 몸께서는 얼른 저리 꺼지쑈, 한대 쥐어 터지기 전에.”
“덕구야, 마음 상한 거 있으면 말로 해야지, 같은 반 친구인데 때리면 되냐?”
“니가 뭔디 짠하고 나타나서, 나한테 이랬냐 저랬냐 씨 부리냐, 디지고 싶냐?”
“야 깡다구, 승협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애.”
강덕구가 어이없어하며 장난스럽게 굽실거리더니 문승협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치려 하였다. 김철종이 강덕구팔을 잡으며 끼어들었다.
“음마, 이 시끼들이 때로 덤빌라고 하네. 으째, 한번 해보끄나, 잉?”
“덕구야, 우리가 싸우려고 이러는 게 아니잖아. 철종아, 손 놔라. 덕구야, 너도 손 놓고.”
그때 아이들 서너 명과 강모세가 앞장서서 김용남을 데려오고 있었다. 강덕구 옆에 있던 이진구가 보고 김용남이 온다며 속삭였다. 강덕구가 손을 풀었다. 가병수에게 한 번만 더 김용남 빽 믿고 까불면 가만 안 둔다고 하였다. 문승협과 김철종을 향해서 너희도 두고 보자며 다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병수야 괜찮니? 안 다쳤어?”
“손 치워 시끼야, 쪽 팔리게 하지 말고 꺼져라잉.”
“야 가분수, 승협이는 널 돕자고 한 것인디, 니가 그러믄 쓰냐?”
“누가 도와달래디? 야 쫑, 너도 깝죽대지 마라잉.”
가병수가 상처를 살피며 걱정스러워하는 문승협에게 도리어 화냈다. 문승협을 대변하는 김철종에게도 성질부렸다. 김용남이 주변을 살피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뭔 일이어?”
“강덕구가 청소를 안 해갖고 내가 뭐라 했는디, 그 개시끼가 화장실 뒤로 불러서는.”
“안 다쳤냐, 괜찬해?”
“잉 괜찬해, 암시랑 안 해.”
“근디, 느그들은 으째 여깄냐?”
“화장실 왔는디, 뭔 소리가 들린께 와봤제. 승협이가 말렸어야, 승협이가 안 말렸으믄.”
김용남이 설명을 들으면서 상처 난 가병수입술을 보았다. 문승협과 김철종에게 강렬한 시선을 보내며 함께 있는 이유를 물었다. 김철종이 대답하다 김용남기세에 위축되어 말을 얼버무렸다.
“피가 조금 나기는 하는데, 상처가 크지 않아서 괜찮을 거 같아, 다행이다.”
“야 서울놈, 찌그러져 있어라잉, 육갑 떨지 말고.”
“그래 서울놈, 오지랖 넓게 여그저그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고, 니 할 일이나 잘해. 병수말대로 자꾸 깝치다 너도 된통 당한다잉, 내가 분명히 경고했다잉?”
가병수가 상처에 대해 말하는 문승협에게 또 화냈다. 김용남도 경고하고 가병수와 일행을 데려갔다.
“야 가분수, 너는 으째 그렇게 서울놈을 싫어하냐?”
“그 시끼? 기생오랍씨 같이 생겨갖고는, 키도 좃만한 것이 서울서 왔다고 뻐기고, 좃나 재수없잖애.”
“너 나중에 그 맘 바꾸지 마라잉.”
“내가야? 뭔 소리까잉. 만약에 내가 맘이 변하믄,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장을.”
김용남일행이 가고 나자, 문승협이 어깨를 올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김철종도 똑같이 문승협을 따라 했다.
“철종아, 강덕구랑 친하게 어울려 다닌다는, 그 악명 높은 쌈구가 뭐야?”
“내가 일전에 말해줬는디 까먹었냐? 잘 들어라잉.”
김철종말에 의하면 9반에 쌈구의 우두머리 조동구가 있었다. 조동구에게 2학년 동생이 하나 있으며,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함께 보육원에 맡겨졌다고 하였다. 강덕구와 이진구도 보육원이 있는 동네에 살았다. 셋이 등하교를 같이하면서 자연스레 친해졌다. 6학년선배들 중에 조동구에게 힘이 될 법한 보육원형들이 있으나, 그 형들이 학생회장 남강과 선도부장 박현에게 눌려있어 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김용남 뒤에 남강과 박현이 있기에 지금은 조동구가 밀려있지만, 둘이 앙숙이라 언젠간 한판 붙을 거라고 하였다.
“근디 희한한 것이, 둘 다 나쁜 놈이라는 거여. 쌈구놈들은 대놓고 괴롭혀서 뺏고, 김용남은 앞에서 보호해 주고 남몰래 뺏은께 말이어.”
“용남이가? 무슨 말이야?”
“쌈구가 아그들을 괴롭히고 직접 뺏으믄, 용남이는 아그들이 보는 데서는 막아주고, 뒤로 불러서 그 대가로 상납을 받는단께.”
“왜? 용남이는 집도 잘 살잖아.”
“내가 아냐? 나도 실은 그것이 의문이어, 당최 그 이유를 모르겄단께.”
”…….”
“그건 그렇고, 쌈구시끼들 별명이 뭔지 아냐? 강덕구는 깡이 세서 깡다구고, 이진구는 항시 빡빡이 머리에 짱구라서 그렇고, 조동구는 성질이 그래서 좃똥꾸여. 조동구는 아그들이 무서워해서 그냥 똥꾸나 똥꼬라고 해. 큭큭큭, 웃기지.”
문승협이 피식 웃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서 교실로 향했다.
“야 김철종, 잠깐 거기 서봐.”
“어, 선경씨께서 저를 부르시다니, 뭔 일이 단가요?”
최선경이 계단을 올라가는 김철종을 불러 세웠다.
“너희들 참 나쁜 아이구나?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같은 반 친구를 때리고 그러니?”
“뭔 소리 다냐, 누가 누굴 때려야?”
“내가 저 동산에 앉아서 다 봤어. 너희들 화장실 뒤에서, 아니다 관두자, 너희 같은 애들한테 말해서 뭐 하겠니. 김철종, 그렇게 안 봤는데, 이상한 아이랑 다니면서 변했다 너. 여자애들 치마를 내린다고 하질 않나, 가병수 같은 순한 애를 때리질 않나.”
“오매오매, 뭔 소리까잉. 우리가 으쨌다고야, 우린 그런 적 없단께?”
“됐어. 다음에 한 번만 더 보면, 그땐 진짜 교무실로 간다, 알았니?”
“저기 선경씨, 난 아니, 우린 그런 적 없단께요?”
최선경은 김철종에게 말하면서도 경멸하는 눈길로 문승협을 힐끗힐끗 쳐다봤다.
“그럼, 김용남에게 말할까?”
“하하하. 누구에게 말해도 상관은 없는데, 눈에 보이는 것만 다가 아니라는 거,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게 할 말이면 나한테 직접 말해도 괜찮아, 괜히 철종이 입장 곤란하게 하지 말고.”
“어머? 서울에서 전학 오고 그래서 좋게 봤는데, 내가 잘못 봤나 보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사람 환경이나 겉모습만 보고 갖는 생각을 선입관이라고 해. 그 선입관 안 좋은 거래, 사람에 대한 평가나 편견도 그렇고.”
문승협은 오해받는 건 상관없었지만 최선경입에서 김용남이름을 듣고 기분이 상했다.
최선경은 말수 없던 아이가 정색하며 갑자기 말을 술술 잘하는 데다, 자기 말을 끝내고 획 돌아서 가버리자 기가 막혔다. 점심시간 동산에 앉아서 분명히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당당히 3층으로 올라가는 문승협뒷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최선경이 동산에 앉아서 본 장면은 실제와 달랐다. 가병수가 화장실 뒤쪽으로 밀려 넘어지고 문승협이 나타났기에, 최선경시선에서는 강덕구가 서있는 곳이 안 보여 충분히 오해할만했다. 화장실 옆쪽에서 강덕구가 가병수를 때린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종례가 끝나고, 문승협이 빵과 우유를 책가방에 넣었다. 먹고 싶어 했던 동생 문현아를 위해 모아둔 용돈으로 신청했었다.
학교급식 빵과 우유는 도시락을 싸 올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에게 무상으로 배급했지만, 먹고 싶은 아이들은 별도로 돈을 주고 신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1학년부터 3학년까지는 돈이 있어도 불가했다. 저학년은 학생수가 많아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2부제수업을 하여 점심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문승협은 절대 돈을 헤프게 쓰지 않았다. 부모와 자주 떨어져 살면서 돈이 필요할 때 정작 돈이 없어 서러웠던 적이 많았다. 돈이 필요해서 달라고 할 사람도 없었을뿐더러 달라는 족족 주지도 않았다. 어른들로부터 받은 용돈과 세뱃돈을 꼼꼼히 모았다. 경험을 통해 얻은 나름의 지혜였다.
문승협은 빵과 우유를 받아 들고 좋아하는 동생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였다. 맛있게 먹는 동생모습을 상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교실을 나섰다.
교문을 나와 학교 담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코너를 돌아갔다.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할머니와 리어카를 밀며 언덕길을 올라가는 세 명의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리어카를 끌어다 주고 연필을 나눠줬던 안면이 있는 할머니와 두 손녀였다. 그러나 얼굴을 숙이고 리어카를 미는 아이는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문승협이 반갑기도 하고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막 뛰어가려는 찰나, 얼굴을 숙이고 리어카를 밀던 아이가 고개를 들며 할머니를 향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할무니, 인자 날도 덥고 그란께 이 일은 그만하쑈, 이러다가 골병들겄소.”
문승협은 익숙한 목소리에 멈춰 섰다. 그 아이 차림새가 짝꿍 박진숙이어서 놀랐다. 가서 알은체 하거나 돕는다면 박진숙성격상 자존심 상해 십중팔구 화낼 것이라 더는 접근하지 못했다. 술주정에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집 나간 엄마, 치매증상할머니와 세 손녀, 리어카할머니가 하소연한 비극적 주인공이 박진숙가족이라는 사실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또한 박진숙이 숨기고 싶은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아 난감했다. 그동안 박진숙이 왜 삐딱했는지 조금 이해되었다.
언덕을 올라 갈림길에 들어서 박진숙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걸었다. 마침내 박진숙일행이 언덕갈림길에서 문승협집과 반대방향으로 꺾었다. 문승협은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을 생각하며 바삐 걸었다. 언덕길 중간쯤 지나가는데, 골목에 모여 앉아있던 아이들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면서 소리쳤다.
“아야 서울놈, 이리 와봐라잉.”
“어? 강덕구,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뭐 해야, 서울놈 너 기다렸제.”
“나를? 왜?”
강덕구와 이진구를 포함한 아이들 다섯 명이었다. 문승협은 기다렸다는 말에 느낌이 좋지 않았다. 엄습한 불안감에 경계하며 천천히 골목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세 아이 중에 키 크고 덩치 좋은 아이가 앞으로 나서며 강덕구에게 물었다.
“이 새끼여? 그 서울놈이?”
“잉.”
“너 내가 누군지 아냐?”
“…….”
“내가 조동구다.”
문승협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주먹이 날아왔다. 턱을 강타당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조동구가 턱을 만지며 몸을 일으키는 문승협 얼굴을 향해 다시 발차기를 하였다. 문승협이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젖혀 피하고 재빨리 일어서 자유대련자세를 취했다. 문승협은 태권도 1단이어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자기도 몰랐던 스스로의 능력에 놀랐지만 내색할 틈이 없었다.
“네가 조동구면 조동구지, 나를 치는 이유가 뭐야?”
“요새끼 봐라? 큭큭, 이유? 이유는 나중에 알고, 일단 좀 맞자.”
조동구가 말을 마치자마자 주먹과 발을 날렸다. 문승협이 이리저리 피하다 오른발돌려차기로 조동구의 왼쪽어깨와 뒤통수를 동시에 가격했다. 조동구는 왼팔로 막았는데도 강한 충격을 느껴 약간 당황하였다. 지켜보던 아이들도 놀랐다.
“이런 키도 좃만한 것이 디질라고.”
조동구가 어깨와 뒤통수를 매만지며 이죽거렸다. 문승협이 상기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뒤에 있던 이진구가 문승협허리를 잡아 넘어트리고 올라타려 했다. 문승협이 뒤구르기로 민첩하게 빠져나왔다. 문승협과 쌈구파 간에 1대 5 싸움구도에 바짝 긴장한 순간,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 세 명이 등장했다.
“아야, 느그들 뭐 하냐? 어디서 벌건 대낮에 주먹질이어?”
“…….”
“이눔 시끼들, 여그가 어딘지는 알고 쌈질하냐? 여그는 느그 교장선상님 집 앞이어.”
“…….”
“느그들 전부 다 이 짝으로 서, 줄 맞춰서 똑바로 서, 아따 배짱도 좋다잉.”
고등학생들은 유선국민학교 교장선생아들과 친구들이었다. 문승협의 명찰을 보고 금방 알아보았다. 조동구가 저항하려 했으나 고등학생들을 상대하긴 힘들었다. 더욱이 교장선생아들이라는 말에 제아무리 조동구라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교장선생아들이 싸운 이유를 묻고 이름과 반을 받아 적었다. 싸우더라도 1대 1로 싸워야지 치사하게 한 명을 여러 명이 때리냐며 야단쳤다. 문승협이 싸운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태권도를 연습한 거라고 변명했다. 학교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며 극구 부탁하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꿀밤이었다. 교장선생아들이 쌈구파아이들을 먼저 쫓아 보낸 뒤 문승협의 왼쪽입술을 벌려보았다.
“약간 찢어졌은께, 집에 가서 약 발라야겄다.”
“네.”
“느그 집 어디냐?”
“저쪽이요, 집은 왜요?”
“앞장서, 우리 성들이 집까지 바래다 줄라니까.”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스읍, 성들 말 들어, 얼른 앞장서란께.”
“혼자 갈 수 있는데.”
"아까 그놈들이 다시 쫓아오거나, 어디서 기다릴지도 몰라."
교장선생아들이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조동구눈빛을 보니 또 괴롭힐 거라며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문승협은 고등학생형들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돌아가는 형들을 뒤로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현아가 대문까지 반갑게 뛰어나왔다. 다친 오빠입술을 보고 놀랐다. 문승협이 얼른 가방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주며 시선을 돌렸다.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입술은 왜 그런 거냐고 묻는 동생에게 입이 커지려나 보다며 얼버무렸다. 할머니와 고모들에게 상처를 들키면 사건이 커질까 걱정되었다. 가슴 졸이며 의식적으로 피했지만 막상 아무 관심이 없어서 섭섭했다.
며칠 후, 담임호출을 받아 교무실에 갔다. 문승협을 곧장 교장실로 데려갔다. 고삼랑선생이 교장실 앞에서 복장을 점검한 후 노크하고 들어갔다. 교장과 교감 외에도 두 명의 남자선생이 앉아있었다. 교장은 상석에, 교감과 남자선생 두 명은 탁자 앞에 나란히 자리했다. 고삼랑선생과 문승협은 건너편에 앉았다. 두 명의 선생은 학생주임 엄정한선생과 5학년 9반 담임이었다. 가운데 앉은 학생주임이 문승협이름을 확인하고 쌈구와 있었던 일을 물었다. 문승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어떻게 알았는지 여쭸다. 학생주임이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며 취조하듯 했다. 문승협이 고자질하는 것 같아서 말하기 곤란하다고 하였다. 고삼랑선생이 나무랐다.
“문승협, 그것이 시방 뭔 태도여? 선상님 질문에 공손하게 대답해야 제, 그러믄 못써.”
“하하하, 당돌하다잉. 그래, 내 아들이 고발했단다. 그날 우리 아들 봤제, 고등학생.”
“네, 그 형이 도와주고 집에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웠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래 그래. 그건 그렇고, 박동후회장님이 할아버지 된다고?”
“친할아버지는 아니고요, 할머니 오빠니까 진외가할아버지세요.”
“하하, 그것이 그것이제.”
문승협은 갑자기 교장선생이 집안내력을 물어서 당황했다. 할머니가 가정방문 때 담임선생에게 집안자랑 하던 일이 떠올라 담임선생을 쳐다봤으나 모른척하며 노트만 보았다.
“니는 어떡했음은 쓰겄냐? 학교서 모르는 것도 아니고, 조동구랑 그 놈들 불러서 이미 다 조사했는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간단해, 처벌해 달라믄 처벌할 것인께. 쯔, 뭐 어차피 처벌은 해야겄지만.”
“누구를요? 저를요?”
“아니, 너를 때린 조동구랑 그 놈들 말이어. 엄선생, 집단폭행이믄 퇴학이요?”
“네. 그런데 교장선생님, 당시 상황을 면밀히 조사해서 잘잘못을 먼저 가려야 합니다.”
”엄선생님은 너무 원리원칙주의여. 내 아들이 보고 듣고 써왔는디, 내 아들을 못 믿는단 말이요?”
“아닙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 양쪽당사자 이야기를 듣는 게 먼저라는 뜻입니다.”
“선생님, 처벌 안 하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제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가능한가요?”
“그건 쉽지가 않다. 교장선생님 아들이긴 하지만, 엄연히 학교 외 제삼자신고로 접수된 사건이기 때문에, 네가 용서한다고 해서 해결되거나 그냥 조용히 넘어갈 일은 아니야.”
조동구의 5학년 9반 담임선생이 고개 숙이고 조용히 듣다가 눈치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교장선상님, 승협학생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으로 좋게 꾸미믄 되지 않을까라우?”
“선상님은 또 맘 약해갖고 그런다, 조동구가 이번이 몇 번째요, 한두 번도 아니고.”
“그것이 아니라, 부모한테 조동구가 동생이랑 버림받은 상처 땜시 좀 삐틀어져서 그러제, 본래 심성은 착해라우. 지가 4년을 지켜봤은께 잘 알지라우.”
교감선생이 팔짱 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듣다가 한마디 거들었다.
“조동구의 그간 행적을 보면 문제학생이긴 하지요. 그런데, 이제 5학년의 어린아이인생을 생각하면, 처벌위주로만 의논하기에는 교육자로서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은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뭔디요, 교감선상님 생각을 말해보쑈.”
“네, 승협학생이 처벌불원 한다는 말에서 생각한 것이니 전제조건입니다. 이번에 교육청에서 공문이 하나 왔어요. 국민건강증진정책차원에 내년시행을 계획으로 준비 중인 국민체조를 대비해서, 학교자체적으로 보건체조나 그에 상응한 체육활동을 만들어 주 1회 이상 전교생을 참여시키랍니다. 때마침 태권도진흥재단이 문교부를 통해서 태권도보급에 힘써달라는 공문도 왔고요. 그리고 교장선생님 아드님이 학교에 제출한 내용을 보면, 승협학생이 태권도를 연습한 거라 했다고 되어있어요. 엄선생님, 세 가지 내용이 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교감선생님.”
“둘 다 정부방침이니 반드시 시행해야 할 것 같은데, 승협이 생각은 어떤가?”
“네? 무슨 말씀이신지.”
“승협학생이 말한 대로,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면 어떨까? 물론, 조동구에게는 마지막이라는 단서를 달고 말이지.”
“난 뭔 말인지 못 알아듣겄소, 좀 쉽게 설명해보쑈.”
교장선생이 이해가 안 된다며 다시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문승협머리는 빠르게 돌아갔다.
“교감선생님 말씀은, 제가 태권도를 가르친다면, 조동구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요?”
“승협이가 조동구처벌을 원치 않는다면 말이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저를 도와준 형에게 동의받게 해 주시고, 조동구와 저랑 둘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문승협대답을 들은 교감선생이 정리해서 다시 설명하였다. 교장선생아들의 고발내용을 근거해 학교자체조사를 실시한 결과, 태권도지도를 준비하다 발생한 오해로 결론짓자면서, 그 증거로 문승협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게 하자는 뜻이었다.
교장선생이 시큰둥했으나 엄정한선생의 설명을 듣고 조동구를 처벌하기로 굳혔던 마음을 바꾸었다. 엄정한선생이 교감선생말에 따라 정리되면 교육청과 문교부의 지침도 해결되고, 내년 국민체조시행까지 태권도강사를 별도로 채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교장선생은 엄정한선생말처럼 1석 3조 인 데다, 박동후회장의 손자가 부탁해서 들어준 모양새를 취하면, 나중에라도 분명 학교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1석 4조라고 생각했다.
교장선생이 최종 승낙함으로써 결론이 났다. 선생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하였다.
“승협이가 참 착하고 똑똑하네. 혹시나 집에서 물어보믄, 나한테 부탁했는디 들어줬다고 해라잉.”
“네, 교장선생님.”
“승협이 학생 고맙네야, 조동구가 인자는 정신 차릴 것이어.”
“아닙니다 선생님, 앞으로도 제자를 믿어주시고 많이 보듬어주세요.”
“수고했다 문승협, 근데, 태권도를 가르쳐 본 적은 있나?”
“아니요, 제가 지금까지 배웠던 순서대로 하면 안 될까요?”
“태권도급수는 어떻게 되는데?”
“1단입니다.”
“아 그래, 그럼 뭐 배운 것만 가르쳐도 되겠다.”
“승협아 생각 잘했다, 난 니가 사고 친 줄 알고 무자게 걱정했단께.”
“죄송합니다 선생님.”
“아녀 아녀, 니가 내 반이라 다행이다야.”
문승협은 엄정한선생 주선으로 학생부사무실에서 교장선생아들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동의받았다.
“그래 알았어, 근디 쬐깐한 녀석이 대견하다잉, 그런 생각을 다하고.”
“아니에요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음마, 시방 나한테 동상이 생겨 분거여? 하하하.”
“형,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장선생아들이 돌아가고, 조동구가 인상 쓰며 거만하게 들어왔다. 발로 툭툭 차서 의자를 빼내 앉았다.
“뭘 쳐다보냐 좃만시끼야.”
“한 가지만 물어보자, 왜 갑자기 날 때린 거야?”
“아야, 그냥 내가 치고 싶으믄 치는 것이어, 뭔 이유가 있겄냐?”
“그럼 나도 너를 치고 싶으면 쳐도 되냐?”
“뭣이어? 어디 칠 수 있으믄 쳐봐라, 칠 자신이 있으믄 쳐봐. 큭큭, 못 치겄제? 용기도 없는 것이 쫄아갖고는.”
“널 치는데 용기까지 필요하지 않아, 더구나 쫄 이유도 없고. 화나서 악하게 하면 더 멀리 가고, 결국 약간의 선함이 모든 걸 이기더라.”
“이 시끼가 디질라고 진짜, 조동아리만 살아갖고 어서 깝치냐 지금?”
“그래, 이유를 말할 수 없다는데 할 수 없지. 그런데, 이것만 알아둬. 이유가 거창하지 않아도 언젠간 내게 말하게 될 거고, 난 내게 한만큼 반드시 돌려준다. 넌 잊을 수 있겠지만, 난 잊지 못할 거야. 왜냐면, 난 싸워 본 적도 맞아 본 적도 없어, 네가 처음이거든.”
문승협은 조동구에게 할 말을 다하고 일어났다. 조동구가 분해하며 씩씩거렸다.
문승협이 나간 뒤 조동구의 담임이 들어갔다. 조동구에게 처벌하지 않기로 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도 분명하게 못을 박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