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무슨 감정일까? - (3)
일요일아침 문승협은 큰고모권유로 함께 교회에 다녀왔다. 4학년 때 처음 서울친구 이민우남매를 따라다녔듯이 본인의지는 아니었다. 신앙보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야구를 좋아했다. 작년가을 서울에서 다녔던 효자국민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했었다. 당시 입단시험에서 야구부코치에게 소질을 인정받을 정도였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지만 전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야구 외에는 꾸준히 해온 태권도였다. 검은띠로 1단에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목포에 와서 앞뒤 재지 않고 제일 먼저 한 일이 태권도도장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태권도복을 메고 도장에 갔다. 항동시장입구에 다다라 병원과 약국 건물에서 나오는 최선경을 발견했다. 순간 당황하여 멈춰 섰다. 최선경이 1층 약국을 들여다보았다. 문승협은 그냥 지나갈지 길 건너 돌아갈지 고민하다 자신을 못 봤다고 생각해 후자를 선택하였다.
최선경은 피아노학원에 가려고 내려왔다. 약국유리창에 비춰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유리창에 건너편으로 지나가는 문승협이 보여 획 돌아봤다.
문승협이 곁눈질로 최선경의 동태를 살피며 슬금슬금 가다 갑자기 돌아보자 냅다 뛰기 시작했다.
최선경은 자기를 피하듯 도망가는 문승협을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하였다.
문승협이 거친 숨을 돌리려 태권도장 2층 계단에 털썩 앉았다. 미처 최선경이 자신을 못 봤을 거라 생각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을 태권도복으로 두어 번 쓱 닦고 눈을 뜨자, 바로 앞으로 최선경이 올라오더니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갔다.
최선경은 열심히 뛰어가던 아이가 계단에 앉아있어 깜짝 놀랐으나 못 본 척 태연히 지나갔다. 행여 알은체하면 창피해할까 봐 그냥 왔지만 왜 피하는지 물어보고 싶기도 했다.
이 건물 3층에 태권도장이 있었고, 4층에는 피아노학원이 있었다.
문승협은 태권도수업을 하면서 조금 전 자신의 기이한 행동이 부끄러워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마주쳤을 때 최선경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생각하니 창피했다. 자책이 실린 강렬한 발차기를 샌드백을 향해 날렸다.
태권도를 마치고 문을 나섰다. 4층에서 피아노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피아노선율에 홀려 두세 계단 올라가 귀 기울였다. 곡이름은 모르지만, 요즘 큰고모 문희숙이 연습하던 바로 그 곡이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방금 전 들었던 피아노음률을 반복해서 입으로 되뇌었다. 그 아름다운 피아노소리가 온 세상을 감싸는 것 같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큰고모에게 허밍을 들려주며 무슨 곡인지 물었다. 문희숙이 ‘리처드크레이더만’이 연주한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라며,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피아노곡이라 악보도 구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어떻게 아는지 대견해하며 작품탄생배경을 설명해 주었다.
한 남자가 전쟁서 한쪽 팔다리를 잃고 돌아왔다. 처참한 자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사랑하는 여인을 떠났다. 훗날 사랑했던 여자의 결혼식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려고 갔다. 그녀는 양쪽 팔다리가 없는 휠체어 탄 남자와 결혼했다. 그제야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고 눈물로써 만든 곡이었다.
문희숙이 서툴지만 한번 들려주겠다고 하였다. 악보를 찾아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문승협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의 아름다운 선율에 점점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피아노 치는 최선경을 상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웃기고 쑥스러웠다.
월요일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로 운동장 군데군데 자그마한 물웅덩이가 생겼다. 그 위로 가는 빗방울이 날아와 튕겼다. 문현아가 장화를 신고 침략자처럼 거침없이 진격하였다. 물웅덩이를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운동장을 씩씩하게 행진했다. 그러나 교실 앞 복도입구가 물에 젖어있어 난감한 표정으로 문승협을 보았다.
“왜 그래?”
“복도가 물에 젖어있는데, 장화를 어떻게 벗고 실내화 신어?”
“음, 먼저 실내화를 꺼내서 복도에 내려놔봐. 그리고 발을 들고 있으면, 오빠가 이렇게 장화를 벗겨주면 되잖아. 벗은 발은 실내화를 신고, 이쪽 발 들어. 그렇지, 됐지?”
“응, 고마워 오빠. 그럼, 젖은 장화는 어떡해?”
“신발주머니는 좀 젖어도 괜찮아. 줘봐, 이렇게 넣으면 되겠다.”
“자, 우산 잘 챙겨서 교실로 들어가. 수업 끝나고 집에 갈 때 차 조심하고, 알았지?”
“알겄습니다요.”
문승협은 등교할 때마다 문현아를 교실에 데려다주고 자기 교실로 갔다.
“오서옵쑈. 문승협님 납셨소?”
“안녕.”
“아야, 일요일에 뭐 했냐?”
“그냥, 도장 갔다 오고, TV 보고 놀았지 뭐.”
“뭔 도장아, 이렇게 찍는 도장? 허허, 뭐 배운디야?”
“하하, 그런 거 있어, 알면 다칩니다 철종씨.”
“오늘 비 온께, 애국조회는 대강당에서 한다드라.”
“그래? 비 와서 안 할 줄 알았는데.”
“뭔 소리어, 언제 비 온다고 안 했다냐. 대강당이 없었을 적에는 각반교실에서 했어야, 애국조회는 아마 전쟁 나도 할 것이다.”
대강당은 4학년교실, 문서고, 체육실이 있는 제3별관 3층에 있었다. 5학년교실이 있는 본관 3층과 연륙교처럼 다리로 연결되어 가까웠다.
반장 김용남이 ‘애국조회 집합’을 외쳤다. 반아이들이 하나 둘 복도로 나갔다. 가병수가 교실문을 나서는 문승협을 불렀다.
“어이, 문승협. 니는 애들 다 나가고 나믄, 교실문 잠그고 온나.”
“야 가분수, 미화부장인 니가 잠그고 와야제, 으째 부반장을 시키냐?”
“뭘 으짜긴 으째야, 반장이 그렇게 하란디. 물건 같은 거 없어지믄, 문승협 니 책임이다잉, 알겄냐? 그라고 김철종이, 니가 문승협이 꼬붕이냐? 으째 매번 니가 나서냐 나서긴?”
“뭣이라고, 꼬붕? 하, 저것을 확 그냥.”
“철종아 그만해, 내가 하면 되지 뭐.”
“아따, 김용남 빽 믿고 까부는 저 가분수 시끼를 으짠다냐 진짜. 이것이 뭔지 아냐, 다 승협이 너를 무시하라고 한 짓거리란께?”
“알아, 내가 해도 되는 일이잖아, 괜찮아 철종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복도에 줄 선 반아이들이 가병수와 김철종을 바라보았다. 문승협은 자기 일처럼 씩씩거리는 김철종을 진정시켰다. 김용남이 아이들을 인솔해 대강당으로 출발하였다.
문승협이 교실문을 잠그고 강당으로 향했다. 조금 앞서가던 김철종이 아래층에서 계단으로 올라오는 선생에게 인사하였다. 문승협도 습관적으로 인사하고 선생얼굴을 보았다. 3학년 때 담임 오성희선생이었다. 순간 반갑고 기뻤으나 뒤따라 오는 최선경을 보고는 당황했다.
“어, 승협이, 문승협 맞지? 어머 반갑다 승협아, 잘 있었니?”
“네 선생님,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그럼 그럼, 잘 있었지. 다시 전학 온 거야?”
“네, 이번에.”
“그랬구나. 근데, 왔으면 선생님에게 인사 왔어야 하는 거 아냐?”
“네 맞아요, 죄송합니다.”
“호호, 난 6반 담임인데, 넌 몇 반이니?”
“5학년 1반이에요.”
“그럼, 고삼랑선생님 반이구나.”
“네, 맞아요.”
“그래, 조회시간 늦겠다, 어서 가자. 다음에 시간 내서 선생님한테 한번 와, 알았지?”
“네, 그럴게요.”
문승협은 오성희선생을 보고 이야기하면서도 같은 시선에 들어와 있는 최선경을 살폈다.
최선경은 담임인 오성희선생과 문승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듣고 있었다. 오성희선생과 강당으로 가면서 문승협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 저 아이 아세요?”
“알지. 내가 3학년 담임 때 우리 반 아이였어, 왜?”
“좀 이상한 아이 갔던데요?”
“그래? 똑똑하고 참 착한 아이인데, 부모 때문에 전학을 자주 다녀서 좀 내성적이긴 해, 적응할만하면 전학하곤 했으니까. 내 기억엔 어려운 친구도 잘 돕고, 공부도 잘했어.”
“그래요?”
“응, 그랬어. 그런데, 내가 처음담임을 맡았던 1학년 때는 아이가 왠지 좀 슬퍼 보였어. 가끔이지만, 표정이랑 눈빛이 조금 그래.”
“철종이랑 같이 다니길래 까불이인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문승협이 전학을 많이 다닌 와중에도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다정다감하게 꼼꼼히 살펴준 오성희선생이었다. 부모부재로 상심해 있을 때면 어느새 오성희선생이 다가와 항상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다른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견뎌내는데도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대강당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들어찼다. 학년별 반별로 줄 맞춰 서느라 북새통이었다. 담임선생들이 바삐 장내를 정리했다. 교장선생이 단상에 입장하면서 ‘애국조회’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구령에 따라 다 같이 왼쪽가슴에 오른손을 얹었다. ‘국기에 대한 맹세’를 뽐내듯 자랑스럽게 이구동성으로 외치자 대강당이 쩌렁쩌렁 울렸다. ‘애국가 제창’도 마찬가지였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 이어, 전교생이 매질을 당하거나 기합을 받으며 열심히 외운 ‘국민교육헌장’이 낭독되었다. 교장선생훈화말씀은 항상 길고 지루했다. 교가를 제창하면 비로소 애국조회가 끝났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문승협은 분단장과 부분단장 8명을 인솔하여 과학실로 갔다. 5교시 자연시간실습준비를 위해서였다. 다행히 과학실문이 열려있었다. 분단별로 바구니에 알코올램프와 쇠접시, 삼발이, 비이커, 메스실린더, 스포이드, 시험관, 집게, 비닐주머니, 요오드 등 실험도구를 담았다.
문승협이 실험도구입출대장에 기록하는 사이 과학실 뒷문이 열리면서 최선경이 들어왔다. 문승협은 최선경을 애써 못 본체 했다. 최선경이 뚜벅뚜벅 다가와 옆에 서서 기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분자의 운동, 물질의 상태, 맞지? 문승협.”
“응, 어떻게 실험도구 목록만 보고도 알아?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실험은 지난주 금요일에 우리 반도 수업했으니까 알고, 이름은 우리 전에 만났잖아, 방앗간에서. 그리고, 쓰레기장에서도 봤고, 어제는 우리 집 앞에서도 봤잖아.”
문승협은 마주쳤던 장소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 놀랐지만, 어제 마주친 곳이 태권도장이 아닌 최선경집 앞이라는 말에 당황했다
“집 앞이라니? 그럼, 병원하고 약국 있는 건물이 집이구나?”
“응, 나를 보고는 길을 건너더니 부리나케 뛰어가던데? 너 나 피한 거지, 그치?”
“내 내가? 왜 피해? 피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 나는 피하는 것 같아서, 태권도장 계단에 앉아있는 것도 모른 척해줬는데?”
“아, 모른척한 거였구나.”
“응, 네가 당황할까 봐 내가 그래 줬지, 호호호.”
“그러네, 너를 보거나 마주치면 멍해지고 당황의 연속이네.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내가 침착하지 못하고 마치 바보 같아져.”
“그럼 계속 모른 체해줄까?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게, 그럴까?”
“아니, 아냐, 내가 침착하도록 해볼게.”
“그래? 그럼 지켜볼게. 자, 열쇠. 문 잘 잠그고 가시오, 열쇠는 알지?”
최선경은 과학실열쇠를 문승협에게 건네고 기분 좋은 걸음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조금 전 보았던 문승협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면서도 깊었다. 슬퍼 보이기도 하고 묘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느꼈다. 가끔 문승협의 표정과 눈빛이 슬퍼 보였다는 오성희선생님말이 떠올랐다.
문승협은 5교시 자연수업이 끝나자, 실험도구를 챙긴 아이들에게 과학실로 가라고 하였다. 들뜬 마음으로 한층 아래에 있는 5학년 6반 교실로 향했다.
오성희선생이 과학실담당이었다. 6반 부반장 겸 과학부장인 최선경이 과학실열쇠를 관리했다.
최선경은 반납한 실험도구를 입출대장과 하나하나 대조하였다. 확인을 마치고 별다른 말없이 과학실문을 잠근 후 자기 교실로 갔다.
문승협은 기대와 다르게 사무적으로 대하는 최선경에게 형언할 수 없는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그렇다고 뭐라 불평할 수도 없었다.
최선경이 교실옆 복도를 지나가는 문승협을 창문을 통해 지켜보았다. 잘 가라는 인사라도 해줄걸 그랬나 싶었지만, 갑자기 너무 많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방과 후, 최선경이 떡볶이를 먹자는 친구들 성화에 따라갔다. 교문을 나와 왼편에 있는 문방구 쪽으로 걸었다.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할머니를 쫓아가는 아이를 보았다. 같이 가던 한 친구가 최선경시선을 따라갔다.
“어, 그 아그네? 선경아, 쩌그 맞제? 서울서 전학 왔다는, 이름이 뭣이드라?”
“문승협.”
“그냐? 아까 우리 반에 왔었는디.”
“그래, 아까 오긴 왔었지.”
“근디, 왜 그냐?”
“아니야, 가자, 가서 떡볶이나 먹자.”
문승협이 리어카를 뒤에서 밀다가 앞으로 갔다. 할머니와 자리를 바꾸어 직접 끌었다.
친구들이 떡볶이를 주문하는 동안에도 최선경시선은 계속 문승협에게 향해 있었다. 이번에는 최선경과 가장절친한 제갈민주가 최선경시선을 따라갔다.
“음마? 저 아그는 쓰레기장에서 김철종이랑 있었던 그 아그네, 맞지 선경아.”
“응, 맞아.”
“즈그 할무닌가? 그런 것 같진 안은디? 돕는 건가 부다야.”
“그러게.”
“그라믄 애가 착한가 보다잉. 그란디, 선경이 너는 으째 그렇게 넋 빼놓고 보냐?”
“어? 내가? 아 아냐, 떡볶이나 먹자.”
문승협이 리어카를 끌고 힘들게 언덕을 올라 갈림길에 섰다. 집과 반대방향이라 잠깐 망설였다. 내친김에 할머니집까지 리어카를 끌어다 주기로 결정했다.
“할머니, 빈리어카를 끌고 이 언덕을 올라오는데도 엄청 힘드는데, 어떻게 이 길을 다니세요?”
“아따, 무쟈게 고맙네야. 뭐 으짜것는가, 한 푼이라도 벌라믄 할 수 없제.”
“할머니, 물 한잔만 주시면 안 돼요? 갈증이 나서요.”
“그려 그려, 줘야제. 쫌만 기다리소, 언능 가서 한 사발 떠올 텐께.”
문승협은 대문 앞에 리어카를 잘 세워두고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올라오니 땀이 많이 흘렀다.
할머니가 수건을 들고 나와 닦으라며 주었다. 문승협은 수건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에 멈칫했으나 할머니가 무안해할까 봐 그냥 닦았다. 물대접에도 이겨진 밥풀과 고춧가루가 붙어있고 이물질이 떠있었다. 입으로 불어서 밀어내고 아무렇지 않게 마셨다. 비위가 약한 편인 문승협에게는 곤욕이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할머니입장을 생각해 참았다.
집안에서 여자아이들의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가 갑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문승협도 무심결에 대접을 들고 뒤따라갔다.
동생 문현아와 문윤아 또래 아이들이 연필 한 자루를 서로 자기가 쓰겠다며 싸웠다. 할머니가 연필을 교대로 쓰라며 타일렀다. 그래도 계속 싸우자 연필을 분질러 나눠주겠다고 야단쳤다. 문승협이 할머니를 말리며 자기 필통에서 연필 세 자루를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었다. 아이들이 연필을 받아 들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할머니가 뻘쭘히 웃으며 미안해했다. 문승협은 또 있으니 줘도 괜찮다고 하였다. 할머니가 고맙다며 문승협의 두 손을 잡았다. 손을 끌어 토방마루에 잠깐 앉으라 하고는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문승협은 졸지에 아무 관계도 없는 한 가족의 가정사를 들어야 했다.
“아들이라고 하나 있는디, 뻑하믄 술 취해서 주먹을 휘둘러 갖고, 며느리가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 부렀어. 그래서 벨 수없이 나 혼자 손녀 셋을 키우제. 인자는 내가 정신까정 깜박깜박한께 답답해서 미치겄그만. 손녀들 땜시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이 지랄을 하고 사네야.”
“할머니, 정말 많이 힘드시겠어요. 오늘 처음 뵙고, 또 어린 제가 뭘 알겠습니까? 이런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행복은 오는 게 아니고 우리가 찾아가는 거래요. 그러니, 일단 건강만이라도 잘 지키면서 무조건 버티세요. 할머니께서 힘드시다는 걸 적어도 저는 아니까 너무 낙담하지 마시고, 행복을 찾을 때까지 힘내서 버티시는 거예요, 아시겠죠? 제가 꼭 시간 내서 또 들릴게요.”
문승협은 할머니의 한탄을 듣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어떻게든 위로해드리고 싶었다.
할머니가 서럽게 울면서도 문승협의 거듭된 다짐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승협은 절망한 할머니와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땟국물이 흐르던 두 아이를 뒤로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대문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집으로 가는 길이 내리막길이라 걸음은 가벼웠지만, 도대체 불행은 무엇이고 행복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니 머리가 무거웠다.
‘불행과 행복은 앞뒤 한 글자 차이인데 극과 극이다. 불행은 지나가지 않을 것 같은 오늘이고, 행복은 오지 않을 것 같은 내일일까? 불행은 절망적 현실이고, 행복은 희망적 이상인가? 불행은 앞에 마주하고, 행복은 뒤에 따라오는 건가? 불행은 알겠는데, 행복은 모르겠다.’
문승협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집 근처에 다다라 집 앞 계단에 앉아 훌쩍이는 동생을 보고 허겁지겁 뛰어갔다. 문현아가 오빠를 보자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였다.
“현아야, 왜 그래? 왜 나와서 울고 있어? 무슨 일이야, 응?”
“오빠, 엉엉엉.”
“현아야, 울지 말고 말을 해야 오빠가 알지. 윤아랑 싸워서 엄마한테 혼난 거야?”
“아니 아니야, 엉엉엉,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면 뭔데 그래?”
“엄마랑 윤아랑 간대, 오빠하고 나하고 여기 두고 아빠한테 간대, 엉엉엉.”
“몰랐어? 현아는 몰랐구나? 오빠는 다 알았는데.”
“어? 진짜? 정말이야?”
“그럼, 오빠가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안 그래?”
“그래. 그럼 오빠는 안 슬퍼?”
“왜 슬퍼? 다 알고 있었고, 오빠랑 현아랑 같이 있는데. 그리고, 우리 둘이 조금만 참고 있으면, 엄마랑 아빠랑 윤아랑 다 같이 데리러 올 건데 왜 슬퍼?”
“그래도 난 자꾸 눈물이 나고 슬퍼 오빠, 엉엉엉.”
“그래, 그럼 울어. 이리 와, 오빠가 안아줄게.”
문승협은 이미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엿듣고 예견했었다. 다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문승협도 슬퍼서 눈물이 났으나 동생을 달래려 아랫입술을 깨물며 참았다. 잠시 동생등을 다독여 달랜 후 손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슬픔과 우울함을 억누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할머니신발을 확인하고 다다미거실로 올라갔다. 할머니방을 향해 다녀왔다며 인사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귀가인사에도 아무 대꾸 없는 할머니반응에 오늘도 할머니와 엄마가 다퉜음을 짐작했다.
조심스레 할머니방을 노크하여 문을 열고 다시 인사했다. 며느리와 언쟁에 심사 뒤틀린 할머니는 손자인사도 받아줄 아량이 없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라고, 어미가 미우니 아무리 장손자라도 미운 건 미운 것이었다.
등지고 돌아누운 할머니의 반응이 없자, 조용히 문을 닫고 엄마가 있는 작은방으로 갔다. 평소 같으면 오빠목소리만 듣고도 뛰쳐나와 반겼을 문윤아인데, 그림책을 들고 서서 슬픈 표정으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짠한 마음에 막냇동생볼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방안에 놓여있는 짐과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누워있는 엄마 곁으로 가 다녀왔다며 인사를 건넸다.
이항리가 한숨을 내뱉으며 일어나 앉아 아들손을 모아 잡았다가 놓았다. 벽에 기대어 무릎을 세우고 손을 턱에 괴었다. 문승협에게 하소연할 때마다 취하는 자세였다. 오늘 시어머니 박옥춘과 있었던 일을 아들에게 구구절절 한탄하기 시작했다.
문승협은 양반다리로 앉아 엄마말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듣는 자세가 흐트러지면 자기 말을 안 듣는다고 서운해했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엄마불평을 너무 오랜 시간 듣다가 발에 쥐가 나서 자세를 바꿔 앉았었다. 그것도 못 참고 엄마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며 아들마저 적으로 몰았다. 그런 게 아니라며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었다. 거기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문승협을 임신해서 땡볕에 밭일한 것부터, 만삭에도 쉬지 못해 일하고, 해산하는데도 일 안 한다고 하여 물벼락 맞는 일 등, 할머니에게 당한 서러운 수난사와 아버지와 싸웠던 일까지,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엄마의 원통함을 또다시 들어야 했다.
이항리의 신세한탄은 저녁식사시간이 되어 들어온 고모들 때문에 멈췄다.
이항리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기차시간에 늦는다며 서둘러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배웅하러 따라 나온 문승협과 문현아의 마음은 모르는지, 전화하겠다는 한마디 남기고 문윤아와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가 출발하자, 오빠눈치만 살피던 문현아가 오빠손을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문승협도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문현아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발을 마구 저으며 계속 울었다. 성이 안 풀려 뒤로 벌렁 드러누워 대성통곡하다 오줌까지 지렸다. 문승협도 감정이 무너졌다. 동생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소리 죽여 가슴을 치며 꺼억 꺼억 울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러나 마음 놓고 울틈도 없었다. 밖에서 동네 창피하게 뭐 하냐는 작은 고모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며 동생을 일으켜 보듬었다. 집 앞 계단에 올라가 앉아 동생어깨를 감싸 안았다. 둘은 행여 집안에서 고모나 할머니가 들을까 봐 소리 죽여 또 한참을 울었다. 문현아의 울음소리가 한숨과 함께 점점 잦아들었다. 문승협이 동생 눈가를 닦아주고 자신도 소매로 닦았다.
“현아야, 이제 좀 괜찮아?”
“응, 괜찮아, 엉엉엉.”
문현아가 또다시 울었다. 문승협도 울컥해 울었으나 금세 진정했다.
“오빠가 아까 전에 한 말 기억나?”
“오빠랑 나랑 같이 있으니까, 조금만 참고 있으면, 엄마아빠가 데리러 온다고?”
“맞아. 현아 유치원 때, 오빠는 혼자 여기 있었어.”
“몰랐어, 오빠 엄청 슬펐겠다.”
“그래, 엄청 슬펐어. 근데, 지금은 현아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아. 그러니까, 현아도 오빠 믿고 슬픔을 이겨내야지, 안 그래?”
“알았어 오빠, 엉엉엉.”
“현아야, 하늘에 별 봐봐. 저 별들도 가끔은 엄마아빠랑 떨어져 살기도 해, 우리처럼 말이야. 저 별들이 그런 슬픔을 이겨내서 반짝반짝 빛나는지도 몰라.”
“그러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더 반짝이는 거 같아.”
“우리도 울지만 말고, 저 별들보다 더 밝고 빛나게 살자, 응?”
“응, 알았어.”
오늘따라 유난히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 보인 이유는 문승협과 문현아의 속눈썹에 맺힌 눈물 때문이었다. 문승협은 주먹을 힘주어 쥐고 하늘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염병할. 불행은 피하고 싶은데 알아서 잘도 찾아오고, 행복은 열심히 찾는데 잘도 피해가. 세상 참 지랄 갔다 정말.’
밤공기가 차가웠다. 문승협은 추위를 느껴 동생을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 박옥춘이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들어오는 문승협과 문현아를 힐끗 흘겨보았다. 혼잣말이지만 마치 들으라는 듯, 설거지도 안 하고 갔다며 며느리 이항리를 비난하였다.
작은딸 문희경이 그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왔다. 애들이 뭘 안다고 그러냐며 그만하라고 하였다. 오히려 올케언니 이항리에 대한 욕과 잔소리를 대신 들어야 했다. 엄마의 퍼붓는 욕설에도, 손주들이 주눅 들어 눈치 보는데 불쌍하지도 않냐며 재차 그만하라고 항변하였다. 그제야 박옥춘이 멈췄다.
문승협은 평소 모른척하기만 하던 작은 고모의 뜻밖 선의에 감사하며 방으로 갔다. 동생의 수업준비물을 확인하고 책가방을 챙겨준 후 이부자리를 펴 잠을 청했다.
문현아는 엄마와 동생 없는 잠자리가 허전했다. 돌아누워 오빠 모르게 숨죽여 흐느꼈다.
문승협은 행여라도 동생울음소리를 할머니가 듣고 야단칠까 무서웠다. 함께 이불을 푹 덮어썼다. 불안한 마음에 다시 돌아눕는 동생의 두 손을 잡아줬다. 남매는 이불속에서 서로 마주한 채 그렇게 또 숨죽여 한참을 울었다. 마침내 문현아가 먼저 잠들었다.
문승협은 예전 오늘 같은 비슷한 상황에서 자지러지며 울고불고했던 적이 떠올라 쑥스러웠다. 오늘은 왠지 자신이 조금 의젓하고 대견스러웠다. 예전에는 혼자여서 그랬지만, 지금은 동생과 함께 있기에 그렇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는 동생도 있으니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솔로몬왕자가 그랬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래, 그때처럼 이 또한 지나갈 거야.’
문승협은 잠든 문현아에게 성경구절을 속삭였다. 한동안 슬픔에 힘겨워하다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