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왜 <나는 솔로>에 나가고 싶어 할까

당신은 솔로가 아니다

by 세템브리니


“내가 나가면 옥순보다 인기가 더 많을 거야. 아마 저기 있는 남자들 전부가 나한테 오겠지?”


남자 출연자들이 옥순에게 몰린다. 아내는 그 장면을 보며 같은 말을 연신 반복한다. 아내는 왜 그러는 걸까. 매주 본방사수를 하며 <나는 SOLO>와 <나솔사계>를 챙기는 아내는 내가 옆에 있든 없든 계속 같은 말을 한다. 가끔은 나를 흘깃 쳐다보며 한숨까지 내쉰다. 정말 새로운 상대를 원해서일까, 아니면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현실이라면 고독정식으로 자장면을 예상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까. 프로그램이 끝나도 이어지는 아내의 근거 없는 자신감과 끝없는 아쉬움. 그 뿌리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 아내의 상상 속 일탈이 딱히 걱정되지 않지만 짧게 생각해 보았다.


우리 부부는 사실 사이가 좋다. 연애 6개월도 안 되어 결혼했고, 딩크로 살며 여전히 둘만의 시간을 신혼처럼 즐긴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벌써 12년째다. 신혼이라 부르기엔 살짝 오래된 셈이다. 나는 아내를 제주 여행 중에 만났다. 친구와 들른 한 펍에서 처음 본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미 남자친구가 있던 그녀는 한동안 나를 애태웠지만, 결국 내 무모한 돌진이 우리를 결혼으로 이끌었다. 그 과정에서 아내는 자연스레 ‘갑’이 되고 나는 ‘을’이 되었다.


아내의 위치는 단지 우리 둘만의 관계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녀는 객관적으로도 예쁘다. 제주 대표로 미인대회 본선까지 오른 경력은 내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여러모로 내 입장은 불리하다. 그런 아내가 남자들의 선택을 자신 쪽으로 기울 것이라 가정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래서일까, 아내는 자신이 연애 프로그램에 나가면 모든 선택을 휩쓸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내 평화를 지키는 길이다.


하지만 아내는 한 가지를 놓치고 있다. 남자들이 배우자를 고를 때 외모만 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나처럼 보수적인 성향의 남자라면 성격이 부드럽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다. 제주 출신답게 생활력이 강하고 자기주장이 분명한 아내는 분명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그런 기질을 기꺼이 감당할 남자 출연자가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내의 어떤 심리가 <나는 SOLO>를 포기 못하는 아쉬움으로 바꾸어 놓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을 재미로 분석해 봤다.


첫 번째는 ‘자기 안의 욕구’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매력을 확인받고 싶은 욕망을 지닌다. 특히 안정된 관계 안에 오래 머물수록 그 욕망은 일상의 그림자처럼 조금씩 커진다. 아내가 “내가 나가면 인기가 많을 거야”라고 말하는 순간, 사실 그것은 새로운 사랑을 원한다기보다는 ‘여전히 나는 매력적인 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을 얻고 싶은 몸짓에 가깝다. 결혼 생활에서 충분히 존중받고 있음에도, 낯선 무대 위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확인받고 싶은 갈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의 생각을 빌려올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승자인 그는 저서 『인정투쟁』에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근본 동력은 단순한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설명했다. 사랑, 법, 연대라는 세 가지 관계 맥락 속에서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아가 형성되며, 이 인정이 좌절될 때 인간은 상처받는다고 본다. 그렇다면 아내가 프로그램 속 무대에 자신을 투사하는 모습은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누구나 지니고 있는 보편적 욕망인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충동의 작은 표현일 수 있다.


<나는 SOLO>는 바로 그 욕구를 자극한다. 현실의 부부 관계에서는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아내를 바라본다. 하지만 프로그램 속 무대는 수많은 시선이 교차한다. 아내가 그 시선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은 단순한 인기의 크기가 아니라, 지금도 충분히 빛나고 있다는 자기 존재감일 것이다.


두 번째는 ‘타인의 시선에 대한 갈망’이다.

부부 생활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시선은 익숙해진다. 칭찬과 애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일상의 배경음처럼 자연스러워지면서 더 이상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내가 <나는 SOLO>를 보며 “저기 나가면 다 나를 좋아할 텐데”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그 익숙함을 잠시 벗어나고 싶은 욕구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낯설고, 그렇기에 강렬하다. 낯선 사람들이 보내는 호감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나조차 몰랐던 면을 발견하게 한다. 결혼 안에서의 안정된 자리와는 달리, 무대 위에서의 경쟁과 선택은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불러온다. 아내가 바라는 것은 아마도 그 긴장 속에서 다시 확인되는 자기 존재일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이 단순한 외형이 아니라, 나를 끊임없이 깨우고 윤리적 책임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라고 보았다. 또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타인의 시선이 여성의 존재 방식을 규정하고, 때로는 구속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맥락에서 아내에게 <나는 SOLO>는 단순한 예능이 아니다. 낯선 이들의 시선을 상상할 수 있는 통로이며, 이미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있으면서도 다시 태어나고 싶은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다.


세 번째는 ‘일상과 판타지의 간극’이다.

아내가 <나는 SOLO>에 자신을 대입하는 순간은 현실과 완전히 분리된 판타지의 영역이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 익숙한 배우자와의 관계 속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현실의 아내는 일하느라 바쁘고, 집안일을 챙기며, 때로는 나와 사소한 말다툼도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속‘출연자 아내’는 늘 빛나고 주목받는 존재로만 남을 수 있다.


이 간극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말했듯 꿈은 억압된 욕망을 안전하게 드러내는 장치이듯, 판타지는 현실에서 감추어진 욕망을 무해하게 풀어내는 공간이다. 또 문학이 일상을 낯설게 하듯, 아내에게 예능 속 판타지는 익숙한 현실을 잠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만약 실제로 무대에 선다면 긴장과 경쟁, 예상치 못한 불편함에 곧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화면 앞에서의 상상은 위험이 없고, 실패가 없으며, 오직 달콤한 가능성만 허락한다. 그것이야말로 판타지의 매력이다.


결국 아내가 반복해서 내뱉는 “내가 나가면 더 인기 있을 텐데”라는 말은 현실의 삶이 불만족스럽다는 신호는 아니다. 일상 속에서 잠깐 펼쳐보는 판타지의 놀이다. 그 간극을 유지할 수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안정된 결혼 생활을 지속할 수 있다. 아내는 판타지를 통해 자기 안의 또 다른 얼굴을 확인하고, 나는 그런 판타지를 바라보며 아내가 여전히 매혹적인 존재임을 새삼 깨닫는다.


아내의 반복되는 말속에서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느낀다. 하나는 ‘혹시 진담일까’ 하는 은근한 긴장이고, 다른 하나는 ‘다행히도 TV 앞에서만 하는 말이구나’ 하는 안도다. 만약 그녀의 판타지가 현실의 문을 두드린다면, 아마 나는 매주 <나는 SOLO>를 챙겨보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고민을 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현실 속에서 그녀의 아쉬움은 안전하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다시 부엌에서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주고, 주말이면 함께 산책을 나간다. 그녀가 상상 속에서 어떤 인기를 누리든, 결국 돌아오는 자리는 우리 둘만의 자리다. 나는 그 사실이 늘 든든하다.


오히려 그 상상이 반복될수록 아내의 매력을 새삼 깨닫는다.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청춘의 흔적일지 모르지만, 아내는 여전히 자신을 주목받는 존재로 그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상상 속 아내를 지켜보며, 내가 결혼한 사람이 단지 아내가 아니라 여전히 빛나는 ‘개인’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결국 아내가 “내가 나가면 다 나한테 올 거야”라고 외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뇐다. “좋아, 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자장면은 내가 시켜 놓을 테니.” 그렇게 우리는 일상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며,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결혼 생활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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